이응노의 ‘종이밥풀’.
이응노의 ‘종이밥풀’.
얇은 합판에 작은 나무조각 수십개가 붙어 있다. 조각들이 흩뿌려졌다가 서로 엉겨붙은 듯한 작품은 실험적인 조형미를 뽐낸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합판 사이로 짓이겨진 밥풀 자국이 보인다. 나무를 채색한 검붉은 재료는 고추장과 간장이다. 고암 이응노 화백의 1968년 조각작품 ‘구성’이다. 동베를린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하던 이 화백이 배식 때 받은 나무 도시락통과 고추장, 밥풀 등으로 만들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작품을 만들어낸 그의 예술정신과 조형감각을 보여준다.

대전 만년동 이응노미술관에서 ‘이응노의 조각, 공간을 열다’전이 16일 개막했다. 세계적인 화가이자 조각가로 프랑스에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한 이 화백은 동베를린사건 이후 생존 당시에는 국내에서 잘 조명되지 않았던 작가다. 그를 기리기 위해 2007년 개관한 이응노미술관에 이 화백의 부인인 박인경 명예관장이 9차례에 걸쳐 작품 1304점을 기증했다. 이번 전시에는 구성을 비롯해 지난달 새로 기증받은 95점 중 조각 57점이 처음 공개된다.

전시 작품은 주로 이 화백이 프랑스로 건너간 뒤 1960~1980년 제작한 것들이다. 사람들의 모습을 운율감 있게 표현한 ‘군상’ 연작, 한글 자모음의 조형미를 살린 문자 추상 작품을 대표작으로 남긴 이 화백의 면모를 조각에서도 볼 수 있다. 조각을 시작한 1960년대에는 재료 촉감을 살린 거친 느낌의 작업을 했다. 1970년대부터는 서예적 추상에 집중했다. 회화에서 다루던 추상적 형상을 표현하면서 중간중간에 빈 공간을 만들어 균형미를 살린 작품이 많다. 제4전시실에 나란히 놓인 ‘얼굴’ 연작은 각각 1960년, 1985년 작품으로 이런 작품 경향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회화 작품도 함께 전시해 평면 회화에서 입체적인 조각으로 확장된 이 화백의 작품세계를 감상할 수 있다. 오는 8월30일까지. (042)611-9800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