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영혼 포착한 '찰나의 예술'이 온다
프랑스의 전설적인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1908~2004·사진)이 묻힌 파리 몽파르나스의 묘비에는 ‘사진은 영원을 밝혀준 순간을 포획하는 단두대’라고 씌어 있다. 전쟁과 냉전을 겪으며 20세기를 관통한 그의 사진예술과 삶을 극명하게 표현한 말이다. 브레송은 연출이나 조명 같은 촬영 테크닉보다는 피사체의 결정적인 순간과 영혼을 포착하는 데 주력했다. 플래시도 사용하지 않았다. 현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고 진정성이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림과 영화에도 관심을 보이던 그는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 등 수많은 역사적 현장에서 마주친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은 물론 간디, 피카소, 사르트르, 마티스, 샤갈 등 유명인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브레송이 1932~1946년 자신의 사진 행적을 직접 정리한 스크랩북에 담긴 걸작들이 대거 한국을 찾는다. 서울 방이동 한미사진미술관이 오는 27일부터 12월3일까지 여는 사진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스크랩북’을 통해서다. 이번 전시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그가 미국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스크랩북에 연대순으로 정리한 작품 346점 가운데 250여점을 만날 수 있다.

전시작은 브레송이 가장 활발히 활동한 시기의 대표작들로, 전쟁과 포로생활을 겪은 뒤 고른 사진이라는 점에서 더 주목된다. 암실작업을 하지 않기로 유명한 그가 직접 인화했다는 점도 의미를 더한다. 유명인의 모습을 비롯해 정교하게 설계된 건물, 벽면에 장식처럼 배치된 인물, 빛과 그림자가 기하학적 대비를 이룬 빼어난 구도의 흑백사진들은 오묘한 미감을 전한다.
프랑스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1933년 모로코에서 찍은 ‘아실라’. 매그넘포토스 제공
프랑스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1933년 모로코에서 찍은 ‘아실라’. 매그넘포토스 제공
20세기 프랑스 최고 가수 에디트 피아프를 비롯해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 초현실주의 화가 앙리 마티스 등을 찍은 작품들은 인물 사진의 백미로 꼽힌다. 젊은 시절 만난 유명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 존재에 내재한 본질을 사진예술로 승화했다. 닻과 밧줄 등이 기하학 문양처럼 놓인 모래사장에서 발가벗고 노는 아이들을 포착한 1933년작 ‘아실라’는 모로코를 여행하며 찍은 걸작이다. 정교하게 설계됐다기보다 배경과 인물이 리듬감을 띠는, 생동감 넘치는 찰나를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했다.

1934년 멕시코 콰우테모크 거리에서 활동하는 매춘부를 드라마틱하게 찍은 작품도 걸린다. 출입문에 뚫린 구멍으로 얼굴을 내밀며 호객하는 두 여성의 모습을 하나로 묶어내 은밀한 지역의 풍경을 잡아냈다. 파리의 잔 구종 거리, 스페인 알리칸테에 거주한 여성,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해방된 사람 등을 찍은 작품들도 브레송의 다양한 감성과 열정을 카메라 렌즈 속에서 필터처럼 걸러낸 게 이채롭다.

김선영 한미사진미술관 큐레이터는 “브레송은 1990년대 접착제 등으로 이미지가 변질될 것을 우려해 스크랩북에 붙어있던 사진을 대부분 떼어내 따로 보존했다”며 “브레송의 작품을 통해 다양한 삶의 기록과 예술적 향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02)418-1315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