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왕은 부처의 현신… 관직 나가려면 '8祖' 조상 중 천민 없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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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11) 고려의 사회와 문화
(11) 고려의 사회와 문화
불교의 시대
한국경제사 3000년의 시간여행은 지금부터 10∼14세기의 고려 시대로 들어간다. 고려는 8∼10세기의 통일신라와 동질의 역사시대다. 국가라는 정치체로 통합된 인간 삶과 사회의 질서를 문명이라 할 때, 고려와 통일신라는 동일의 문명사에 속한다. 두 시대는 혼인, 가족, 친족, 촌락, 노동 등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 펼쳐지는 공간에서 동질적이었다. 그 공간을 지배하고 그로부터 각종 잉여를 수취하는 국가의 지배체제에서 두 시대는 연속적이었다. 두 시대는 그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나아가 우주와의 관계, 곧 종교가 대변하는 정신문화를 공유했다. 두 시대는 공통으로 불교의 시대였다. 고려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는 불교의 정신세계에 의해 규정됐다.
불교의 세계에서 고려의 국왕은 부처의 현신이었다. 제시된 불화는 1350년 회전(悔前)이 그린 미륵하생경변상도(彌勒下生經變相圖)다. 도솔천의 미륵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용화수 아래서 성불하고 그때까지 구제되지 못한 대중을 구원한다는 내용이다. 불화는 화려하게 단청을 한 궁전과 성벽을 경계로 그 안팎이 구분되고 있다. 안은 부처의 세계인데, 현실에서는 왕족과 귀족의 세상이다. 성벽 밖의 속세는 그들의 지배를 받는 천한 서민의 세상이다. 사람의 크기는 위에서 아래로 점점 작게 그려져 있다. 맨 아래는 밭 갈고 추수하는 농부들인데, 손가락만큼 작게 그려져 있다. 불교의 정신세계에서 인간은 원리적으로 평등하지만, 현실의 사바에서 귀족과 서민의 신분 차등은 신체의 대소로 명확하게 감각됐다. 짧은 겉옷의 농부와 움집의 여인
변상도 맨 아래의 8명은 한국사에서 그 모습이 그림으로 전하는 최초의 서민들이다. 거기엔 고려인의 생활사와 관련해 몇 가지 귀중한 정보가 담겨 있다. 첫째는 쟁기로 밭을 가는 소가 두 마리라는 점이다. 제7회의 연재에서 원(元)과의 교통로에 조성한 마을 이리간(伊里干)에 200개 정호(丁戶)를 옮기면서 호당 2마리의 농우를 지급했다는 기사를 소개한 적이 있다. 쟁기 갈이가 이두경(二頭耕)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을 변상도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둘째는 농부들이 거의 바지를 입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1123년 중국 송의 서긍(徐兢)이란 관료가 사신단의 일원으로 고려를 방문해 3개월간 체류했다. 서긍은 귀국 후 그가 살핀 고려의 제도와 현실을 《고려도경(高麗圖經)》이란 책으로 적었다. 그에 의하면 고려의 하층 서민은 단갈(短褐), 곧 짧은 겉옷으로 몸을 가리고는 아랫도리는 입지 않는다고 했다. 바로 그 모습을 변상도에서 생생하게 살필 수 있다.
변상도 맨 아래에는 8명의 농부 외에 1명의 여인이 추가로 그려져 있다. 여인은 움집 속에 앉아서 남자들의 일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고려 서민의 주거는 일반적으로 반지하 움집이었다. 물론 왕족이나 귀족의 집은 지상의 웅대한 저택이었다. 그와 관련해 서긍의 《고려도경》은 개경 성내의 일반 주거를 가리켜 벌집 및 개미굴과 같이 밀집해 있는데, 서까래를 양쪽에 잇대고 풀을 베어 지붕을 덮어 겨우 바람과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지배세력이 모여 사는 개경이 이러했으니 농촌으로 내려가면 더 말할 것이 없었다. 바로 그 점을 변상도는 숨기지 않고 전하고 있다.
윤회의 고리
불교의 세계에서 사바는 윤회의 한 고리일 뿐이다. 고려의 귀족들은 깊은 불심에서 즐겨 불경을 필사했다. 제시된 그림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어느 사경(寫經)에 전하는 한 장면이다. 불경을 비방하다가 죽으면 구렁이로 태어나 기어 다닐 때 작은 벌레들이 비늘 밑을 빨아먹어 고통을 받고, 온몸이 옴과 버짐으로 얼룩진 여우로 태어나 어린아이들의 매를 맞고, 어쩌다가 사람으로 태어나도 난쟁이, 절름발이, 장님, 귀머거리, 곱사로 태어난다는 내용이다. 고려인은 일반적으로 두건을 썼는데 그 같은 복식이 확인되고 있는 점, 서민의 주거로 움집이 그려져 있는 점도 연구자의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이 같은 윤회의 고리에서 조상을 숭배하는 이념이나 조상신을 모시는 제례는 있을 수 없었다. 죽은 아버지가 죄업이 많아 마당을 기는 구렁이나 매를 맞는 여우로 태어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인은 부모가 사망하면 불교식으로 화장하고 철 따라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천도재(薦度齋)로 망자를 기억했다. 고려인들은 조상신의 엄한 눈초리 하에서 그들을 모시는 장례와 제례에 인생의 거의 절반을 투여한 후대의 조선인과는 상이한 질서의 삶을 살았다. 고려인에겐 단일 계통의 혈연 친족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점에서 고려인은 태어날 때부터 특정 신분의 친족집단에 얽매인 조선인과 달리 비교적 자유로운 개성이었다. 8祖 세계
고려인은 관직에 나아갈 때 8조(祖)의 세계(世系)를 밝힌 호적을 제출해야 했다. 8조는 자기의 부(父) 쪽으로 조부, 조모, 증조모, 고조모, 모(母) 쪽으로 외조부, 외조모, 처(妻) 쪽으로 처부, 처모를 말한다. 세계는 이들 8조의 부, 조부, 증조부, 고조부로 올라가는 남계(男系) 조상을 말한다. 따라서 8조 세계라 함은 부, 모, 처 3변으로 올라가는 32명의 조상을 가리킨다. 그 안에 천한 사람이 없어야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렇지 못하면 기껏해야 하급 서리나 군인의 지위에 그쳤다.
32명의 조상이 모두 남성이어서 고려 시대가 부계(父系)사회인 듯이 보이지만 국가 제도의 형식에서 그러했을 뿐이다. 8조의 구성에서 여성이 더 많듯이 결혼, 가족생활, 상속 등의 일상생활에서는 모계(母系) 원리가 훨씬 강하게 작동했다. 고려의 남자들은 대개 처방(妻方) 거주의 관습에 따라 결혼 후 장기간 처가에 거주했다. 처가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모계 친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고려인들이 친족의 서열과 원근을 구분한 용어는 부계보다 모계 친족을 대상으로 더 정교하게 발달했다.
처용과 안길
친족이 3변으로 넓게 열린 집단이듯이 그 하부 단위로서 가족도 마찬가지 속성을 띠었다. 조선 시대와 같은 일부일처의 가족제는 정립돼 있지 않았다. 《고려사》는 어느 관료가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결혼을 거듭하는 몇 가지 사례를 전하고 있다. 서긍의 《고려도경》은 부유한 집은 3, 4명의 아내를 맞이하는데, 쉽게 사랑해 합쳤다가 조금만 맞지 않아도 쉽게 헤어진다고 했다. 복혼의 풍습이 광범했음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처용가(處容歌)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처용가의 내용은 통일신라를 무대로 하지만, 그것의 채집과 연주는 고려 시대의 일이었다. 고려 왕실은 즐겨 처용가를 궁중에서 공연했다. 주지하듯이 처용의 부인은 남편의 귀가가 예정된 밤늦은 시각에 다른 남자를 침실에서 맞이하고 있었으며, 처용은 그것에 관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외에 복혼의 풍습과 관련해 《삼국유사》는 안길(安吉)의 고사를 소개하고 있다. 무진주의 안길은 귀한 손님이 집을 방문하자 3명의 처를 불러 “오늘 밤 이 거사를 모시고 자면 그녀와 평생 해로하리라”고 했다. 2명의 처는 차라리 함께 살지 않을지언정 모르는 사람과 잘 수 없다고 거절했다. 다른 한 처는 “만약 평생토록 함께 살기를 허락한다면 명을 받들겠다”면서 손님의 침실에 들었다. 이 역시 통일신라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지만 고려의 맥락에서 전승되고 기록된 것이다.
고려의 남녀는 결혼 후 한집에서 같이 살아야 한다는 동거율에 강하게 구속되지 않았다. 안길이 3명의 처에게 평생 해로의 조건을 내건 데서 그렇게 짐작할 수 있다. 남녀 배우자는 각기 자신의 친족집단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에 결혼은 방문혼의 형태를 취하기도 했다. 부부가 동거하는 경우에도 그리 안정적이지 않았다. 1107년 예종은 군인의 처로 30년 이상 떠나지 않고 동거한 여인에게 상을 내렸다. 고려왕조는 가정윤리에 충실한 효자, 효녀, 절부를 포상했는데, 의부(義夫)도 그 대상이었다. 의부란 처를 버리지 않고 오래 동거한 의리 있는 남자를 가리키는 고려 시대 고유의 역사적 용어다. 장기간의 동거가 포상의 대상이었음은 그렇지 못한 결혼이 일반적이었음을 방증하고 있다. 근친혼도 고려 결혼의 한 가지 특색이었다. 원 복속기의 충선왕은 원의 뜻을 받들어 왕족과 양반의 근친혼을 금했다.
한국경제사 3000년의 시간여행은 지금부터 10∼14세기의 고려 시대로 들어간다. 고려는 8∼10세기의 통일신라와 동질의 역사시대다. 국가라는 정치체로 통합된 인간 삶과 사회의 질서를 문명이라 할 때, 고려와 통일신라는 동일의 문명사에 속한다. 두 시대는 혼인, 가족, 친족, 촌락, 노동 등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 펼쳐지는 공간에서 동질적이었다. 그 공간을 지배하고 그로부터 각종 잉여를 수취하는 국가의 지배체제에서 두 시대는 연속적이었다. 두 시대는 그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나아가 우주와의 관계, 곧 종교가 대변하는 정신문화를 공유했다. 두 시대는 공통으로 불교의 시대였다. 고려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는 불교의 정신세계에 의해 규정됐다.
불교의 세계에서 고려의 국왕은 부처의 현신이었다. 제시된 불화는 1350년 회전(悔前)이 그린 미륵하생경변상도(彌勒下生經變相圖)다. 도솔천의 미륵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용화수 아래서 성불하고 그때까지 구제되지 못한 대중을 구원한다는 내용이다. 불화는 화려하게 단청을 한 궁전과 성벽을 경계로 그 안팎이 구분되고 있다. 안은 부처의 세계인데, 현실에서는 왕족과 귀족의 세상이다. 성벽 밖의 속세는 그들의 지배를 받는 천한 서민의 세상이다. 사람의 크기는 위에서 아래로 점점 작게 그려져 있다. 맨 아래는 밭 갈고 추수하는 농부들인데, 손가락만큼 작게 그려져 있다. 불교의 정신세계에서 인간은 원리적으로 평등하지만, 현실의 사바에서 귀족과 서민의 신분 차등은 신체의 대소로 명확하게 감각됐다. 짧은 겉옷의 농부와 움집의 여인
변상도 맨 아래의 8명은 한국사에서 그 모습이 그림으로 전하는 최초의 서민들이다. 거기엔 고려인의 생활사와 관련해 몇 가지 귀중한 정보가 담겨 있다. 첫째는 쟁기로 밭을 가는 소가 두 마리라는 점이다. 제7회의 연재에서 원(元)과의 교통로에 조성한 마을 이리간(伊里干)에 200개 정호(丁戶)를 옮기면서 호당 2마리의 농우를 지급했다는 기사를 소개한 적이 있다. 쟁기 갈이가 이두경(二頭耕)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을 변상도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둘째는 농부들이 거의 바지를 입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1123년 중국 송의 서긍(徐兢)이란 관료가 사신단의 일원으로 고려를 방문해 3개월간 체류했다. 서긍은 귀국 후 그가 살핀 고려의 제도와 현실을 《고려도경(高麗圖經)》이란 책으로 적었다. 그에 의하면 고려의 하층 서민은 단갈(短褐), 곧 짧은 겉옷으로 몸을 가리고는 아랫도리는 입지 않는다고 했다. 바로 그 모습을 변상도에서 생생하게 살필 수 있다.
변상도 맨 아래에는 8명의 농부 외에 1명의 여인이 추가로 그려져 있다. 여인은 움집 속에 앉아서 남자들의 일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고려 서민의 주거는 일반적으로 반지하 움집이었다. 물론 왕족이나 귀족의 집은 지상의 웅대한 저택이었다. 그와 관련해 서긍의 《고려도경》은 개경 성내의 일반 주거를 가리켜 벌집 및 개미굴과 같이 밀집해 있는데, 서까래를 양쪽에 잇대고 풀을 베어 지붕을 덮어 겨우 바람과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지배세력이 모여 사는 개경이 이러했으니 농촌으로 내려가면 더 말할 것이 없었다. 바로 그 점을 변상도는 숨기지 않고 전하고 있다.
윤회의 고리
불교의 세계에서 사바는 윤회의 한 고리일 뿐이다. 고려의 귀족들은 깊은 불심에서 즐겨 불경을 필사했다. 제시된 그림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어느 사경(寫經)에 전하는 한 장면이다. 불경을 비방하다가 죽으면 구렁이로 태어나 기어 다닐 때 작은 벌레들이 비늘 밑을 빨아먹어 고통을 받고, 온몸이 옴과 버짐으로 얼룩진 여우로 태어나 어린아이들의 매를 맞고, 어쩌다가 사람으로 태어나도 난쟁이, 절름발이, 장님, 귀머거리, 곱사로 태어난다는 내용이다. 고려인은 일반적으로 두건을 썼는데 그 같은 복식이 확인되고 있는 점, 서민의 주거로 움집이 그려져 있는 점도 연구자의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이 같은 윤회의 고리에서 조상을 숭배하는 이념이나 조상신을 모시는 제례는 있을 수 없었다. 죽은 아버지가 죄업이 많아 마당을 기는 구렁이나 매를 맞는 여우로 태어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인은 부모가 사망하면 불교식으로 화장하고 철 따라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천도재(薦度齋)로 망자를 기억했다. 고려인들은 조상신의 엄한 눈초리 하에서 그들을 모시는 장례와 제례에 인생의 거의 절반을 투여한 후대의 조선인과는 상이한 질서의 삶을 살았다. 고려인에겐 단일 계통의 혈연 친족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점에서 고려인은 태어날 때부터 특정 신분의 친족집단에 얽매인 조선인과 달리 비교적 자유로운 개성이었다. 8祖 세계
고려인은 관직에 나아갈 때 8조(祖)의 세계(世系)를 밝힌 호적을 제출해야 했다. 8조는 자기의 부(父) 쪽으로 조부, 조모, 증조모, 고조모, 모(母) 쪽으로 외조부, 외조모, 처(妻) 쪽으로 처부, 처모를 말한다. 세계는 이들 8조의 부, 조부, 증조부, 고조부로 올라가는 남계(男系) 조상을 말한다. 따라서 8조 세계라 함은 부, 모, 처 3변으로 올라가는 32명의 조상을 가리킨다. 그 안에 천한 사람이 없어야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렇지 못하면 기껏해야 하급 서리나 군인의 지위에 그쳤다.
32명의 조상이 모두 남성이어서 고려 시대가 부계(父系)사회인 듯이 보이지만 국가 제도의 형식에서 그러했을 뿐이다. 8조의 구성에서 여성이 더 많듯이 결혼, 가족생활, 상속 등의 일상생활에서는 모계(母系) 원리가 훨씬 강하게 작동했다. 고려의 남자들은 대개 처방(妻方) 거주의 관습에 따라 결혼 후 장기간 처가에 거주했다. 처가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모계 친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고려인들이 친족의 서열과 원근을 구분한 용어는 부계보다 모계 친족을 대상으로 더 정교하게 발달했다.
처용과 안길
친족이 3변으로 넓게 열린 집단이듯이 그 하부 단위로서 가족도 마찬가지 속성을 띠었다. 조선 시대와 같은 일부일처의 가족제는 정립돼 있지 않았다. 《고려사》는 어느 관료가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결혼을 거듭하는 몇 가지 사례를 전하고 있다. 서긍의 《고려도경》은 부유한 집은 3, 4명의 아내를 맞이하는데, 쉽게 사랑해 합쳤다가 조금만 맞지 않아도 쉽게 헤어진다고 했다. 복혼의 풍습이 광범했음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처용가(處容歌)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처용가의 내용은 통일신라를 무대로 하지만, 그것의 채집과 연주는 고려 시대의 일이었다. 고려 왕실은 즐겨 처용가를 궁중에서 공연했다. 주지하듯이 처용의 부인은 남편의 귀가가 예정된 밤늦은 시각에 다른 남자를 침실에서 맞이하고 있었으며, 처용은 그것에 관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외에 복혼의 풍습과 관련해 《삼국유사》는 안길(安吉)의 고사를 소개하고 있다. 무진주의 안길은 귀한 손님이 집을 방문하자 3명의 처를 불러 “오늘 밤 이 거사를 모시고 자면 그녀와 평생 해로하리라”고 했다. 2명의 처는 차라리 함께 살지 않을지언정 모르는 사람과 잘 수 없다고 거절했다. 다른 한 처는 “만약 평생토록 함께 살기를 허락한다면 명을 받들겠다”면서 손님의 침실에 들었다. 이 역시 통일신라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지만 고려의 맥락에서 전승되고 기록된 것이다.
고려의 남녀는 결혼 후 한집에서 같이 살아야 한다는 동거율에 강하게 구속되지 않았다. 안길이 3명의 처에게 평생 해로의 조건을 내건 데서 그렇게 짐작할 수 있다. 남녀 배우자는 각기 자신의 친족집단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에 결혼은 방문혼의 형태를 취하기도 했다. 부부가 동거하는 경우에도 그리 안정적이지 않았다. 1107년 예종은 군인의 처로 30년 이상 떠나지 않고 동거한 여인에게 상을 내렸다. 고려왕조는 가정윤리에 충실한 효자, 효녀, 절부를 포상했는데, 의부(義夫)도 그 대상이었다. 의부란 처를 버리지 않고 오래 동거한 의리 있는 남자를 가리키는 고려 시대 고유의 역사적 용어다. 장기간의 동거가 포상의 대상이었음은 그렇지 못한 결혼이 일반적이었음을 방증하고 있다. 근친혼도 고려 결혼의 한 가지 특색이었다. 원 복속기의 충선왕은 원의 뜻을 받들어 왕족과 양반의 근친혼을 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