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사유화 확산… 안향 가문, 수만 결 땅에 경작 노비만 수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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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16) 13~14세기 사회경제사
몽골과 전쟁 후 농지 황폐
귀족에 녹봉 대신 땅 지급
국제 교류로 경제 발전·인구 증가
토지 개간 늘고 농업도 발전
농민 권리 커지며 사유화 늘어
군현 호족세력 해체·이동 활발
2281개 성씨 중 542개 사라져
지배세력 해체 '역성혁명' 잉태
(16) 13~14세기 사회경제사
몽골과 전쟁 후 농지 황폐
귀족에 녹봉 대신 땅 지급
국제 교류로 경제 발전·인구 증가
토지 개간 늘고 농업도 발전
농민 권리 커지며 사유화 늘어
군현 호족세력 해체·이동 활발
2281개 성씨 중 542개 사라져
지배세력 해체 '역성혁명' 잉태
수조지의 부활
몽골과의 전쟁 이후 고려의 사회 구성에 큰 변화가 일었다. 전쟁으로 농지가 황폐하자 조세의 수취가 어려워졌다. 귀족·관료에 대한 녹봉 지급이 줄어 그들의 생활이 곤궁해졌다. 1257년 그들에게 수조지(收租地)를 지급하는 제도가 부활했다. 1075년에 시행된 녹봉제는 182년 만에 폐지됐다. 다시 지급된 수조지를 가리켜서는 녹과전(祿科田)이라 했다. 녹과전의 설정은 경기도에 한했다. 왕족과 공신에게도 수조지가 지급됐는데, 별사전(別賜田)이라 했다. 별사전은 경기도의 범위를 벗어나 전국적으로 설치됐다.
녹과전의 규모는 10∼12세기 전시과(田柴科)에서의 사전(私田)보다 훨씬 컸다. 예컨대 제1과 중서령(中書令)에게 지급된 사전은 100결임에 비해 녹과전은 300결이나 됐다. 특히 별사전의 규모가 커서 산천을 경계로 할 지경이라고 했다. 이 같은 13∼14세기의 토지제도를 두고 후대의 《고려사》는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귀족의 농장에 편입된 농민들은 수탈이 가중됨에 따라 점점 고달파졌다. 농장의 팽창은 정부재정을 압박했으며, 이는 각종 잡세의 신설을 유발해 농촌 경제를 압박했다. 농민들은 처자를 팔거나 사방으로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이 같은 《고려사》의 논조에는 조선왕조의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었다 10분의 1 수조율의 성립
이전에 소개한 대로 고려왕조의 수조율은 공전과 사전에 따라 달랐다. 공전은 4분의 1, 사전은 2분의 1이었다. 이런 차이는 고려왕조의 집권적 지배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점차 해소됐다. 12세기 초 고려왕조는 공전과 사전의 농민을 전호의 지위로 일괄 규정한 다음 사전을 개간한 농민에게 1∼2년간 조세를 면하는 혜택을 베풀었다. 이를 계기로 사전의 수조율은 공전의 수조율과 같아지기 시작했다.
1225년 이규보는 어느 정부 창고의 상량문을 지으면서 공전의 수조율이 10분의 1이라고 했다. 고려왕조가 수조율을 일부러 낮추지는 않았다. 10∼12세기만 하더라도 1년 1작의 상등전보다 2년 1작의 중등전이나 3년 1작의 하등전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휴한(休閑)농법이 13∼14세기에 걸쳐 1년 1작의 연작(連作)농법으로 진보했다. 그 과정에서 4분의 1 수조율은 수조량이 고정된 가운데 자연스럽게 10분의 1로 낮아졌다.
1257년의 녹과전 지급은 10분의 1 수조율을 전제했다. 중서령에게 지급된 녹과전 300결의 수입은 30결의 소출에 해당했다. 10∼12세기 중서령에게 지급된 사전 100결의 수입은 수조율이 2분의 1이므로 50결의 소출에 해당했다. 그 사이 토지의 소출이 1.7배 증가했다면 사전 100결과 녹과전 300결의 수입은 동일하다. 녹과전의 지급은 이 같은 농업 생산력 발전과 그에 따른 수조율 저하를 전제했다.
민전의 고양
토지의 소출이 증가함에도 수조량이 고정된 것은 토지에 대한 농민의 권리가 강화됐기 때문이다. 토지는 농민의 사실상의 소유인 민전(民田)으로 바뀌었다. 직접생산자의 자기 노동에 기초한 근로적 소유였다. 1375년께 이후 조선왕조를 창건하는 주역의 한 사람인 정도전은 전라도 나주의 거평 부곡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정도전이 교제한 이웃 농민은 향리 신분이 아님에도 철 따라 술 빚기를 빼먹지 않을 정도로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힘써 농사를 지은 결과라고 했다. 정도전은 나주의 일반 촌민에 대해 “자기 땅 농사짓고 자기 집 살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휴식해 그 인생을 즐긴다고 했다. 14세기 후반 나주 농촌사회의 넉넉한 분위기는 전국의 토지가 고려왕조의 국전(國田)에서 일반 농민의 민전으로 바뀌는 13세기 이래의 역사적 추세를 대변했다.
인구의 증가와 농장의 개간
팍스 몽골리카의 번성한 국제 교류는 고려의 경제 발전을 자극했다. 그에 따라 인구가 증가했다. 12세기의 인구는 250만∼300만 명이었다. 14세기 말의 인구는 대략 600만 명이었다. 13세기는 대전란의 시기이므로 인구 증가는 주로 14세기의 일이었다. 짧은 기간에 인구가 2배 이상 증가한 것은 14세기가 경제적으로 일대 고양기였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구 증가는 농업의 발전을 촉구했다. 휴한농법이 극복되고 연작농법이 정착했다. 토지의 연작을 위해서는 지력을 보충하는 비료의 투여가 필수적이었다. 농사는 보다 과학적으로 조직될 필요가 있었다. 1372년 원의 농서 《농상집요(農桑輯要)》가 간행된 것은 그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였다. 비록 수입 농서지만 한국사에서 최초로 발간된 농서였다.
경제 발전과 인구 증가는 토지의 활발한 개간을 불렀다. 관련해서는 안씨가의 사례가 잘 알려져 있다. 안향(1243∼1306)의 손자 안목(?∼1360)은 개경 부근 파주의 서쪽 들을 개간했다. 안목의 손자 안원(1346∼1411)에 이르러 개간지 규모는 수만 결에 달하고 경작 노비는 수백 호나 됐다. 안씨가의 농장은 수조지 녹과전으로 이뤄진 권문세족의 농장과 달랐다. 그것은 농장주의 개인적 소유였다. 농장을 경작한 것은 노비들이었다. 노비노동에 기초한 새로운 생산양식(生産樣式)이었다. 그 점에서 안씨가의 농장은 조선왕조 15∼16세기의 농촌에서 일반화하는 양반가 농장의 선구를 이뤘다.
지방세력의 이동
13∼14세기에 걸쳐 군현의 지배세력인 호장(戶長)을 위시한 토성(土姓) 집단이 해체되거나 다른 지방으로 이동했다. 몽골과의 전쟁에 따른 농촌의 황폐, 새로운 토지제도로서 녹과전의 시행, 뒤이은 귀족·관료의 농촌 침투, 대외교역의 활성화, 농촌경제의 부흥과 같은 격동의 역사가 그 역사적 배경을 이뤘다. 지방세력의 해체와 이동에 관해서는 15세기 전반의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린 전국 334개 군현의 토성(土姓), 망성(亡姓), 속성(續姓)의 실태에서 그 정보를 구할 수 있다. 망성은 13세기 후반과 15세기 전반 사이에 유망해 그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된 토성 집단이다. 속성은 같은 기간 다른 군현으로 이동한 토성 집단인데, 이동 후에도 호장 직을 수행한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으로 구분된다.
전국의 2281개 토성 가운데 망성은 542개로서 24%다. 망성은 주로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발생했다. 이 두 도에서 새롭게 이동해온 속성의 수는 망성의 수에 미치지 못했다. 그것은 아무래도 개경에 가까워 중앙의 착취나 압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13세기 후반 이후 경기도와 충청도의 지방세력은 크게 위축됐다. 대조적으로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토성 집단은 안정적이었다. 이 두 도에서 망성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을뿐더러 속성의 수가 훨씬 더 많았다. 속성의 3분의 2는 이동 후에도 여전히 호장 직을 수행했다. 이로부터 이 두 도에서 지방세력의 이동은 족세가 번창한 호장층의 일부가 다른 군현으로 이동해 그곳의 지배세력에 편입되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속성 가운데 호장을 내지 않은 집단은 대개 지방세력이 약한 속현이나 부곡으로 이동해 주민을 노비로 잡고 농장을 개척하는 등 품관(品官) 신분으로 정착했다. 그렇게 지역마다 양상을 달리하면서 조선왕조 이후에 펼쳐질 농촌사회의 구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국인 집단의 해체
1390년 12월 고려왕조는 위화도 회군으로 공신이 된 이성계에게 식실봉(食實封) 300호와 노비 20명을 하사했다. 그때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호적의 일부가 전하는데, 국보로 지정돼 있다. 그 호적에 개경에 거주하는 관료, 학생, 군인 신분 25호의 가계(家系)가 밝혀져 있다. 이성계에게 식실봉으로 지급된 자들이었다. 호주와 처의 본관과 성씨를 살피면 모두 52종이다. 그중의 26종은 본관 군현의 토성 출신이다. 이들은 비교적 오래전에 개경으로 유입한 자들이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한 뒤 개경이 재건될 무렵이었을 것이다. 나머지 26종은 본관 군현의 속성 출신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오래전에 원거 군현에서 본관 군현으로 이동했다가 비교적 최근에 개경으로 유입한 자들이다. 거꾸로 원래의 국인이 지방 군현으로 내려가 지방세력의 일원으로 정착하는 흐름도 있었다. 그렇게 개경의 인구 구성은 14세기에 걸쳐 심하게 유동했다. 이전에 강조한 대로 고려왕조는 국인(國人)의 공동체였다. 개경을 장악한 이성계는 국인이 아니었다. 호적에 적힌 그의 주소는 삭방도 화령부 동면 덕흥부였다. 고려는 더 이상 국인의 나라가 아니었다. 그 종국은 조선왕조를 연 역성혁명이었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몽골과의 전쟁 이후 고려의 사회 구성에 큰 변화가 일었다. 전쟁으로 농지가 황폐하자 조세의 수취가 어려워졌다. 귀족·관료에 대한 녹봉 지급이 줄어 그들의 생활이 곤궁해졌다. 1257년 그들에게 수조지(收租地)를 지급하는 제도가 부활했다. 1075년에 시행된 녹봉제는 182년 만에 폐지됐다. 다시 지급된 수조지를 가리켜서는 녹과전(祿科田)이라 했다. 녹과전의 설정은 경기도에 한했다. 왕족과 공신에게도 수조지가 지급됐는데, 별사전(別賜田)이라 했다. 별사전은 경기도의 범위를 벗어나 전국적으로 설치됐다.
녹과전의 규모는 10∼12세기 전시과(田柴科)에서의 사전(私田)보다 훨씬 컸다. 예컨대 제1과 중서령(中書令)에게 지급된 사전은 100결임에 비해 녹과전은 300결이나 됐다. 특히 별사전의 규모가 커서 산천을 경계로 할 지경이라고 했다. 이 같은 13∼14세기의 토지제도를 두고 후대의 《고려사》는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귀족의 농장에 편입된 농민들은 수탈이 가중됨에 따라 점점 고달파졌다. 농장의 팽창은 정부재정을 압박했으며, 이는 각종 잡세의 신설을 유발해 농촌 경제를 압박했다. 농민들은 처자를 팔거나 사방으로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이 같은 《고려사》의 논조에는 조선왕조의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었다 10분의 1 수조율의 성립
이전에 소개한 대로 고려왕조의 수조율은 공전과 사전에 따라 달랐다. 공전은 4분의 1, 사전은 2분의 1이었다. 이런 차이는 고려왕조의 집권적 지배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점차 해소됐다. 12세기 초 고려왕조는 공전과 사전의 농민을 전호의 지위로 일괄 규정한 다음 사전을 개간한 농민에게 1∼2년간 조세를 면하는 혜택을 베풀었다. 이를 계기로 사전의 수조율은 공전의 수조율과 같아지기 시작했다.
1225년 이규보는 어느 정부 창고의 상량문을 지으면서 공전의 수조율이 10분의 1이라고 했다. 고려왕조가 수조율을 일부러 낮추지는 않았다. 10∼12세기만 하더라도 1년 1작의 상등전보다 2년 1작의 중등전이나 3년 1작의 하등전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휴한(休閑)농법이 13∼14세기에 걸쳐 1년 1작의 연작(連作)농법으로 진보했다. 그 과정에서 4분의 1 수조율은 수조량이 고정된 가운데 자연스럽게 10분의 1로 낮아졌다.
1257년의 녹과전 지급은 10분의 1 수조율을 전제했다. 중서령에게 지급된 녹과전 300결의 수입은 30결의 소출에 해당했다. 10∼12세기 중서령에게 지급된 사전 100결의 수입은 수조율이 2분의 1이므로 50결의 소출에 해당했다. 그 사이 토지의 소출이 1.7배 증가했다면 사전 100결과 녹과전 300결의 수입은 동일하다. 녹과전의 지급은 이 같은 농업 생산력 발전과 그에 따른 수조율 저하를 전제했다.
민전의 고양
토지의 소출이 증가함에도 수조량이 고정된 것은 토지에 대한 농민의 권리가 강화됐기 때문이다. 토지는 농민의 사실상의 소유인 민전(民田)으로 바뀌었다. 직접생산자의 자기 노동에 기초한 근로적 소유였다. 1375년께 이후 조선왕조를 창건하는 주역의 한 사람인 정도전은 전라도 나주의 거평 부곡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정도전이 교제한 이웃 농민은 향리 신분이 아님에도 철 따라 술 빚기를 빼먹지 않을 정도로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힘써 농사를 지은 결과라고 했다. 정도전은 나주의 일반 촌민에 대해 “자기 땅 농사짓고 자기 집 살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휴식해 그 인생을 즐긴다고 했다. 14세기 후반 나주 농촌사회의 넉넉한 분위기는 전국의 토지가 고려왕조의 국전(國田)에서 일반 농민의 민전으로 바뀌는 13세기 이래의 역사적 추세를 대변했다.
인구의 증가와 농장의 개간
팍스 몽골리카의 번성한 국제 교류는 고려의 경제 발전을 자극했다. 그에 따라 인구가 증가했다. 12세기의 인구는 250만∼300만 명이었다. 14세기 말의 인구는 대략 600만 명이었다. 13세기는 대전란의 시기이므로 인구 증가는 주로 14세기의 일이었다. 짧은 기간에 인구가 2배 이상 증가한 것은 14세기가 경제적으로 일대 고양기였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구 증가는 농업의 발전을 촉구했다. 휴한농법이 극복되고 연작농법이 정착했다. 토지의 연작을 위해서는 지력을 보충하는 비료의 투여가 필수적이었다. 농사는 보다 과학적으로 조직될 필요가 있었다. 1372년 원의 농서 《농상집요(農桑輯要)》가 간행된 것은 그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였다. 비록 수입 농서지만 한국사에서 최초로 발간된 농서였다.
경제 발전과 인구 증가는 토지의 활발한 개간을 불렀다. 관련해서는 안씨가의 사례가 잘 알려져 있다. 안향(1243∼1306)의 손자 안목(?∼1360)은 개경 부근 파주의 서쪽 들을 개간했다. 안목의 손자 안원(1346∼1411)에 이르러 개간지 규모는 수만 결에 달하고 경작 노비는 수백 호나 됐다. 안씨가의 농장은 수조지 녹과전으로 이뤄진 권문세족의 농장과 달랐다. 그것은 농장주의 개인적 소유였다. 농장을 경작한 것은 노비들이었다. 노비노동에 기초한 새로운 생산양식(生産樣式)이었다. 그 점에서 안씨가의 농장은 조선왕조 15∼16세기의 농촌에서 일반화하는 양반가 농장의 선구를 이뤘다.
지방세력의 이동
13∼14세기에 걸쳐 군현의 지배세력인 호장(戶長)을 위시한 토성(土姓) 집단이 해체되거나 다른 지방으로 이동했다. 몽골과의 전쟁에 따른 농촌의 황폐, 새로운 토지제도로서 녹과전의 시행, 뒤이은 귀족·관료의 농촌 침투, 대외교역의 활성화, 농촌경제의 부흥과 같은 격동의 역사가 그 역사적 배경을 이뤘다. 지방세력의 해체와 이동에 관해서는 15세기 전반의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린 전국 334개 군현의 토성(土姓), 망성(亡姓), 속성(續姓)의 실태에서 그 정보를 구할 수 있다. 망성은 13세기 후반과 15세기 전반 사이에 유망해 그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된 토성 집단이다. 속성은 같은 기간 다른 군현으로 이동한 토성 집단인데, 이동 후에도 호장 직을 수행한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으로 구분된다.
전국의 2281개 토성 가운데 망성은 542개로서 24%다. 망성은 주로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발생했다. 이 두 도에서 새롭게 이동해온 속성의 수는 망성의 수에 미치지 못했다. 그것은 아무래도 개경에 가까워 중앙의 착취나 압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13세기 후반 이후 경기도와 충청도의 지방세력은 크게 위축됐다. 대조적으로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토성 집단은 안정적이었다. 이 두 도에서 망성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을뿐더러 속성의 수가 훨씬 더 많았다. 속성의 3분의 2는 이동 후에도 여전히 호장 직을 수행했다. 이로부터 이 두 도에서 지방세력의 이동은 족세가 번창한 호장층의 일부가 다른 군현으로 이동해 그곳의 지배세력에 편입되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속성 가운데 호장을 내지 않은 집단은 대개 지방세력이 약한 속현이나 부곡으로 이동해 주민을 노비로 잡고 농장을 개척하는 등 품관(品官) 신분으로 정착했다. 그렇게 지역마다 양상을 달리하면서 조선왕조 이후에 펼쳐질 농촌사회의 구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국인 집단의 해체
1390년 12월 고려왕조는 위화도 회군으로 공신이 된 이성계에게 식실봉(食實封) 300호와 노비 20명을 하사했다. 그때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호적의 일부가 전하는데, 국보로 지정돼 있다. 그 호적에 개경에 거주하는 관료, 학생, 군인 신분 25호의 가계(家系)가 밝혀져 있다. 이성계에게 식실봉으로 지급된 자들이었다. 호주와 처의 본관과 성씨를 살피면 모두 52종이다. 그중의 26종은 본관 군현의 토성 출신이다. 이들은 비교적 오래전에 개경으로 유입한 자들이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한 뒤 개경이 재건될 무렵이었을 것이다. 나머지 26종은 본관 군현의 속성 출신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오래전에 원거 군현에서 본관 군현으로 이동했다가 비교적 최근에 개경으로 유입한 자들이다. 거꾸로 원래의 국인이 지방 군현으로 내려가 지방세력의 일원으로 정착하는 흐름도 있었다. 그렇게 개경의 인구 구성은 14세기에 걸쳐 심하게 유동했다. 이전에 강조한 대로 고려왕조는 국인(國人)의 공동체였다. 개경을 장악한 이성계는 국인이 아니었다. 호적에 적힌 그의 주소는 삭방도 화령부 동면 덕흥부였다. 고려는 더 이상 국인의 나라가 아니었다. 그 종국은 조선왕조를 연 역성혁명이었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