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 조선, 대외무역 크게 늘어…3대 수출 품목은 '쌀·콩·소가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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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32) 대외무역과 전통경제의 재편
대외무역 비중 GDP의 20%로
제1 수출입 상대국은 일본…英 등 세계중심부와 교역은 없어
그럴만한 산업자체 보유 못한 탓
신흥 지주계급 등장
무역·고리대로 가산 일군 향리들, 대토지 취득 신흥지주로 급부상
전통 고집한 양반지주들은 침잠
연안무역도 동반 활성화
수출입 업무 서툰 조선 상인들, 개항장·내륙 중개 객주로 활동
대부분 일본상인들 지배 받아
(32) 대외무역과 전통경제의 재편
대외무역 비중 GDP의 20%로
제1 수출입 상대국은 일본…英 등 세계중심부와 교역은 없어
그럴만한 산업자체 보유 못한 탓
신흥 지주계급 등장
무역·고리대로 가산 일군 향리들, 대토지 취득 신흥지주로 급부상
전통 고집한 양반지주들은 침잠
연안무역도 동반 활성화
수출입 업무 서툰 조선 상인들, 개항장·내륙 중개 객주로 활동
대부분 일본상인들 지배 받아
수출입의 구조
개항 이전 조선의 대외무역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2%에 불과했다. 그랬던 것이 1911년까지 20%로 커졌다. 1876∼1911년 수출과 수입의 실질 규모는 각각 연평균 9%와 15%의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조선은 폐쇄경제에서 개방경제로 바뀌어 갔다. 수출입 무역의 주요 대상은 일본과 중국이었다. 영국 등 세계 중심부와의 교역은 거의 없었다. 조선 경제는 그럴 만한 산업을 갖지 못했다. 수출의 90% 이상은 대일(對日) 수출이었다. 수입에서도 제1의 상대는 일본이었다. 1905년까지 수입의 60∼70%는 대일 수입이었다.
수출품의 주종은 쌀, 콩, 우피(牛皮)였다. 1880년대까지 가장 큰 수출품은 콩이었다. 콩은 작황이 안정적이고 일본에서 식료품공업의 원료로 수요가 컸다. 쌀의 수출은 작황이 불안정해 해마다 기복이 심했다. 흉년이 들면 조선왕조는 방곡령(防穀令)을 내려 쌀의 대일 수출을 제한했다. 우피가 제1의 수출품인 해도 몇 차례 있었다. 우피의 수출은 가방, 구두, 군수품과 같은 피혁공업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쌀의 수출이 급증하는 것은 1890년대부터다. 산업혁명에 접어든 일본에서 도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조선 쌀에 대한 수요가 대량 발생했기 때문이다.
수입품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직물인데 대부분 면포였다. 1880년대까지 수입 직물의 80% 이상은 영국산이었다. 개항 초기 조선의 수입 무역은 일본과 중국이 영국산 제품을 중개하는 구조였다. 일본이 산업혁명에 진입함에 따라 그 같은 무역 구조가 바뀌었다. 1896년 수입 직물의 90% 이상은 일본산이었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과 일본의 무역은 농산품 쌀과 공산품 면포가 교환되는 종속적 관계로 정착했다. 농업생산의 회복
여러 지방에서 수집된 추수기에서 확인되는 논의 두락(1두락=600㎡)당 생산량과 지대량(地代量)은 18세기 중반 이래 줄곧 감소 추세였다. 그 장기간의 하강 추세가 바닥을 찍고 증가 추세로 반전하는 것은 1890년대부터다. 1840년대 전남 영암군 장암리에서 두락당 지대량은 벼 8∼10두였다. 그것이 1880년대까지 4두 전후로 하락했다. 맨 아래 바닥은 1888년이었다. 그 해를 넘기면서 두락당 지대량은 뚜렷이 회복돼 갔다. 인접한 목포는 원래 한산한 어촌이었다. 그런 곳이 개항장으로 지정되고 원근의 상인들이 모여드는 것은 1897년의 일이었다.
위기의 시대를 마감한 것은 쌀의 수출시장이었다. 소득 증대의 기회가 주어지자 농민들은 개간에 힘쓰고, 김매기 횟수를 늘리고, 수리시설을 보수하고, 비료를 더 많이 줬다. 1894년 동학 농민봉기 이후 민란의 물결이 잦아든 것도 다른 한편의 원인이었다. 1890년대 후반이 되면 오랫동안 이 땅의 인간들을 절망의 늪에 빠뜨렸던 위기의 시대가 물러가고 증산의 시대가 열리는 조짐이 뚜렷해졌다. 개방에 따른 시장 확대는 인류사의 모든 시대와 지역에서 경제생활의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 평범한 상식이 오랫동안 폐쇄경제에 갇혔던 한국사에서 어렵사리 재확인되는 국면이었다.
전통 면직업의 해체
반면 면포의 대량 수입은 전통 면직업을 해체했다. 콩의 수출이 증대하자 면작(棉作)을 포기하고 두작(豆作)을 확대하는 현상이 개항장의 배후 농촌을 중심으로 광범하게 일었다. 전통 면직업이 쇠퇴하는 것은 청일전쟁 이후다. 그 이전 면포의 연간 수입량은 국내 총소비량의 20∼25%였다. 수입 면포는 주로 영국산으로 사치품에 가까웠다. 전통 면직업에 가해진 충격은 아직 제한적이었다.
조선의 면포시장을 공략한 것은 일본산 면포였다. 오사카와 고베 지역에서 발흥한 일본의 방직공업은 조선 면포의 품질을 면밀하게 조사해 조선인의 기호에 맞는 면포를 생산했다. 그에 대응해 일본산 면사를 수입해 면포를 짜는 공업이 성립하긴 했으나 그리 떨치지는 못했다. 1908~1910년 전국의 면포 시장은 주로 일본산인 외국산 면포가 62%, 수입 면사를 이용한 면직업이 26~28%, 전통 면직업이 10% 안팎의 구성비를 보였다. 전통 면직업은 사실상 해체되고 말았다.
개항 이후 일본과 중국에서도 영국산 면포의 압력을 받아 전통 면직업이 크게 해체됐다. 그럼에도 생산시설을 근대화해 자국의 면직업을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은 생사(生絲)와 같은 전통공업이 건재해 외화를 벌어들였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그런 전략적 공업이 부재했다. 조선왕조는 오랫동안 중국산 비단에 탐닉해 무방비로 수입했다. 전통 견직업은 개항 이전에 벌써 괴멸했다. 일본과의 무역에서 조선의 비교우위는 쌀과 콩이었다. 수입 면포에 대비된 수출 미두(米豆)의 상대가격은 상승 추세였다. 미두의 증산은 더 많은 소득을 보장했다. 면작과 직포에 투여된 농가의 노동력은 신속하게 미두의 증산으로 이동했다. 지주계급의 발흥
20세기 전반 일제하의 조선 사회는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지주(地主)를 지배계급으로 했다. 지주는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다. 전통 조선어에서 그런 말은 없었다. 여기서는 그에 구애되지 않고 개항기의 조선인 대토지 소유자를 지주라고 부른다. 1930년 현재 충남에서 100정보 이상을 소유한 대지주 89명 가운데 42명이 개항기에, 23명이 1910년대에 지주로 성장했다. 나머지 21명의 성장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역시 개항기였다고 짐작된다. 지주의 대부분은 새롭게 펼쳐진 수출입 시장에서 성공해 대규모 토지재산을 조성했다. 그 점에서 그들은 신분적 특권에 기초해 재산을 모으고 경영한 구래(舊來)의 양반 농장주와 달랐다.
개항 이전에도 상업적 경로로 재산을 축적한 사람이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회경제의 제약이 너무 커서 지배세력으로 발흥하기는 힘들었다. 농업의 기반은 취약했으며, 시장은 위축하는 추세였다. 무엇보다 서민의 재산에 대한 양반 신분의 공공연한 수탈이 심각했다. 1890년대에 들어 이런 제약 조건이 해소돼 갔다. 그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지배세력으로서 지주들이 발흥했다. 신흥 지주는 시세에 밝은 향리(鄕吏)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역농(力農)과 절약과 상업과 고리대로 가산을 일군 공통의 배경을 지녔다. 대조적으로 구래의 지배계급 양반은 전통적인 경제윤리와 생활방식을 고집했으며, 그 속에서 조용히 침잠했다.
객주와 상권
대외무역 증가는 국내 시장의 확대를 자극했다. 개항장을 포함해 주요 항구를 연결하는 정기항로의 개설은 국내 연안무역을 활성화했다. 1886~1903년 함경도 원산항이 국내 다른 항구로 이출(移出)한 마포(麻布)는 가액 기준으로 11배나 증가했다. 명태의 이출 증가도 11배였다. 1885~1905년 원산항으로 이입(移入)하는 쌀은 11배, 면포는 7배 증가했다. 일본으로 쌀과 콩을 수출함에 따른 소득 증가가 함경도 마포와 명태에 대한 수요의 증가를 유발한 것이다.
국내외 시장 확대와 더불어 상인들의 활동도 활발해졌다. 조선 상인은 수출입 상무에 서툴러서 대외무역에 종사할 수 없었다. 그들은 개항장과 내륙시장을 중개하는 객주(客主)로 활동했다. 1889년 부산항에는 44명의 객주가 있었는데, 1897년까지 237명으로 증가했다. 인천항에서 객주의 활동은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중국 상인이 내륙시장으로 활발하게 진출했기 때문이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청군을 따라 650여 명의 중국 상인이 들어왔다. 그들은 주로 한성 이남의 경기도와 충청도를 활동 무대로 했다. 청과의 조약에 따라 수도 한성이 개방되자 중국 상인은 재빨리 한성으로 들어와 상권을 확보했다. 1896년 조선에서 활동 중인 중국 상인은 5000여 명에 달했다.
반면 일본 상인의 내륙 진출은 활발하지 못했다. 일본인의 내륙 여행은 조선인의 전통적인 반일(反日) 감정 때문에 위험했다. 그들은 개항장에 머물면서 조선인 객주의 중개를 받아 쌀과 콩을 매집했다. 부산 등 개항장에는 제일은행을 비롯한 일본의 유수 은행이 지점을 개설했다. 일본계 은행은 일본 상인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일본 상인은 우월한 자금력으로 조선인 객주를 지배했다. 그럼에도 내륙시장의 상권은 전반적으로 조선 상인의 지배하에 있었다. 일본 상인이 객주의 중개를 뿌리치고 내륙으로 들어가 상권을 장악하는 것은 경부선과 경의선 철도가 부설된 1904년 이후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개항 이전 조선의 대외무역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2%에 불과했다. 그랬던 것이 1911년까지 20%로 커졌다. 1876∼1911년 수출과 수입의 실질 규모는 각각 연평균 9%와 15%의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조선은 폐쇄경제에서 개방경제로 바뀌어 갔다. 수출입 무역의 주요 대상은 일본과 중국이었다. 영국 등 세계 중심부와의 교역은 거의 없었다. 조선 경제는 그럴 만한 산업을 갖지 못했다. 수출의 90% 이상은 대일(對日) 수출이었다. 수입에서도 제1의 상대는 일본이었다. 1905년까지 수입의 60∼70%는 대일 수입이었다.
수출품의 주종은 쌀, 콩, 우피(牛皮)였다. 1880년대까지 가장 큰 수출품은 콩이었다. 콩은 작황이 안정적이고 일본에서 식료품공업의 원료로 수요가 컸다. 쌀의 수출은 작황이 불안정해 해마다 기복이 심했다. 흉년이 들면 조선왕조는 방곡령(防穀令)을 내려 쌀의 대일 수출을 제한했다. 우피가 제1의 수출품인 해도 몇 차례 있었다. 우피의 수출은 가방, 구두, 군수품과 같은 피혁공업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쌀의 수출이 급증하는 것은 1890년대부터다. 산업혁명에 접어든 일본에서 도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조선 쌀에 대한 수요가 대량 발생했기 때문이다.
수입품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직물인데 대부분 면포였다. 1880년대까지 수입 직물의 80% 이상은 영국산이었다. 개항 초기 조선의 수입 무역은 일본과 중국이 영국산 제품을 중개하는 구조였다. 일본이 산업혁명에 진입함에 따라 그 같은 무역 구조가 바뀌었다. 1896년 수입 직물의 90% 이상은 일본산이었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과 일본의 무역은 농산품 쌀과 공산품 면포가 교환되는 종속적 관계로 정착했다. 농업생산의 회복
여러 지방에서 수집된 추수기에서 확인되는 논의 두락(1두락=600㎡)당 생산량과 지대량(地代量)은 18세기 중반 이래 줄곧 감소 추세였다. 그 장기간의 하강 추세가 바닥을 찍고 증가 추세로 반전하는 것은 1890년대부터다. 1840년대 전남 영암군 장암리에서 두락당 지대량은 벼 8∼10두였다. 그것이 1880년대까지 4두 전후로 하락했다. 맨 아래 바닥은 1888년이었다. 그 해를 넘기면서 두락당 지대량은 뚜렷이 회복돼 갔다. 인접한 목포는 원래 한산한 어촌이었다. 그런 곳이 개항장으로 지정되고 원근의 상인들이 모여드는 것은 1897년의 일이었다.
위기의 시대를 마감한 것은 쌀의 수출시장이었다. 소득 증대의 기회가 주어지자 농민들은 개간에 힘쓰고, 김매기 횟수를 늘리고, 수리시설을 보수하고, 비료를 더 많이 줬다. 1894년 동학 농민봉기 이후 민란의 물결이 잦아든 것도 다른 한편의 원인이었다. 1890년대 후반이 되면 오랫동안 이 땅의 인간들을 절망의 늪에 빠뜨렸던 위기의 시대가 물러가고 증산의 시대가 열리는 조짐이 뚜렷해졌다. 개방에 따른 시장 확대는 인류사의 모든 시대와 지역에서 경제생활의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 평범한 상식이 오랫동안 폐쇄경제에 갇혔던 한국사에서 어렵사리 재확인되는 국면이었다.
전통 면직업의 해체
반면 면포의 대량 수입은 전통 면직업을 해체했다. 콩의 수출이 증대하자 면작(棉作)을 포기하고 두작(豆作)을 확대하는 현상이 개항장의 배후 농촌을 중심으로 광범하게 일었다. 전통 면직업이 쇠퇴하는 것은 청일전쟁 이후다. 그 이전 면포의 연간 수입량은 국내 총소비량의 20∼25%였다. 수입 면포는 주로 영국산으로 사치품에 가까웠다. 전통 면직업에 가해진 충격은 아직 제한적이었다.
조선의 면포시장을 공략한 것은 일본산 면포였다. 오사카와 고베 지역에서 발흥한 일본의 방직공업은 조선 면포의 품질을 면밀하게 조사해 조선인의 기호에 맞는 면포를 생산했다. 그에 대응해 일본산 면사를 수입해 면포를 짜는 공업이 성립하긴 했으나 그리 떨치지는 못했다. 1908~1910년 전국의 면포 시장은 주로 일본산인 외국산 면포가 62%, 수입 면사를 이용한 면직업이 26~28%, 전통 면직업이 10% 안팎의 구성비를 보였다. 전통 면직업은 사실상 해체되고 말았다.
개항 이후 일본과 중국에서도 영국산 면포의 압력을 받아 전통 면직업이 크게 해체됐다. 그럼에도 생산시설을 근대화해 자국의 면직업을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은 생사(生絲)와 같은 전통공업이 건재해 외화를 벌어들였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그런 전략적 공업이 부재했다. 조선왕조는 오랫동안 중국산 비단에 탐닉해 무방비로 수입했다. 전통 견직업은 개항 이전에 벌써 괴멸했다. 일본과의 무역에서 조선의 비교우위는 쌀과 콩이었다. 수입 면포에 대비된 수출 미두(米豆)의 상대가격은 상승 추세였다. 미두의 증산은 더 많은 소득을 보장했다. 면작과 직포에 투여된 농가의 노동력은 신속하게 미두의 증산으로 이동했다. 지주계급의 발흥
20세기 전반 일제하의 조선 사회는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지주(地主)를 지배계급으로 했다. 지주는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다. 전통 조선어에서 그런 말은 없었다. 여기서는 그에 구애되지 않고 개항기의 조선인 대토지 소유자를 지주라고 부른다. 1930년 현재 충남에서 100정보 이상을 소유한 대지주 89명 가운데 42명이 개항기에, 23명이 1910년대에 지주로 성장했다. 나머지 21명의 성장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역시 개항기였다고 짐작된다. 지주의 대부분은 새롭게 펼쳐진 수출입 시장에서 성공해 대규모 토지재산을 조성했다. 그 점에서 그들은 신분적 특권에 기초해 재산을 모으고 경영한 구래(舊來)의 양반 농장주와 달랐다.
개항 이전에도 상업적 경로로 재산을 축적한 사람이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회경제의 제약이 너무 커서 지배세력으로 발흥하기는 힘들었다. 농업의 기반은 취약했으며, 시장은 위축하는 추세였다. 무엇보다 서민의 재산에 대한 양반 신분의 공공연한 수탈이 심각했다. 1890년대에 들어 이런 제약 조건이 해소돼 갔다. 그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지배세력으로서 지주들이 발흥했다. 신흥 지주는 시세에 밝은 향리(鄕吏)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역농(力農)과 절약과 상업과 고리대로 가산을 일군 공통의 배경을 지녔다. 대조적으로 구래의 지배계급 양반은 전통적인 경제윤리와 생활방식을 고집했으며, 그 속에서 조용히 침잠했다.
객주와 상권
대외무역 증가는 국내 시장의 확대를 자극했다. 개항장을 포함해 주요 항구를 연결하는 정기항로의 개설은 국내 연안무역을 활성화했다. 1886~1903년 함경도 원산항이 국내 다른 항구로 이출(移出)한 마포(麻布)는 가액 기준으로 11배나 증가했다. 명태의 이출 증가도 11배였다. 1885~1905년 원산항으로 이입(移入)하는 쌀은 11배, 면포는 7배 증가했다. 일본으로 쌀과 콩을 수출함에 따른 소득 증가가 함경도 마포와 명태에 대한 수요의 증가를 유발한 것이다.
국내외 시장 확대와 더불어 상인들의 활동도 활발해졌다. 조선 상인은 수출입 상무에 서툴러서 대외무역에 종사할 수 없었다. 그들은 개항장과 내륙시장을 중개하는 객주(客主)로 활동했다. 1889년 부산항에는 44명의 객주가 있었는데, 1897년까지 237명으로 증가했다. 인천항에서 객주의 활동은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중국 상인이 내륙시장으로 활발하게 진출했기 때문이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청군을 따라 650여 명의 중국 상인이 들어왔다. 그들은 주로 한성 이남의 경기도와 충청도를 활동 무대로 했다. 청과의 조약에 따라 수도 한성이 개방되자 중국 상인은 재빨리 한성으로 들어와 상권을 확보했다. 1896년 조선에서 활동 중인 중국 상인은 5000여 명에 달했다.
반면 일본 상인의 내륙 진출은 활발하지 못했다. 일본인의 내륙 여행은 조선인의 전통적인 반일(反日) 감정 때문에 위험했다. 그들은 개항장에 머물면서 조선인 객주의 중개를 받아 쌀과 콩을 매집했다. 부산 등 개항장에는 제일은행을 비롯한 일본의 유수 은행이 지점을 개설했다. 일본계 은행은 일본 상인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일본 상인은 우월한 자금력으로 조선인 객주를 지배했다. 그럼에도 내륙시장의 상권은 전반적으로 조선 상인의 지배하에 있었다. 일본 상인이 객주의 중개를 뿌리치고 내륙으로 들어가 상권을 장악하는 것은 경부선과 경의선 철도가 부설된 1904년 이후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