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광역 경제권에 포섭된 조선…병참기지화로 공업화 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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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38) 조선 경제의 성장
산업혁명으로 초고속 성장한 日, 관세 폐지해 조선 단일시장 통합
1910~1940년 조선 年3.7% 성장
1920년대 후반 日 대규모 자본, 조선에 종업원 수백명 공장 건설
일본,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조선의 군수공업화로 투자 가속…소규모 공장 소유 조선인 늘어
틈새시장 노린 조선인 자본가, 신제품 만들어 만주 공략하기도
(38) 조선 경제의 성장
산업혁명으로 초고속 성장한 日, 관세 폐지해 조선 단일시장 통합
1910~1940년 조선 年3.7% 성장
1920년대 후반 日 대규모 자본, 조선에 종업원 수백명 공장 건설
일본,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조선의 군수공업화로 투자 가속…소규모 공장 소유 조선인 늘어
틈새시장 노린 조선인 자본가, 신제품 만들어 만주 공략하기도
동아시아경제권
일본 경제는 1880년대 중반부터 1910년까지 산업혁명을 이룩했다. 이후 1940년까지 일본 경제는 세계 주요 국가 중 가장 높은 성장세를 구가했다. 1913년의 1인당 실질소득을 100이라 할 때 1938년 일본의 그것은 176이었다. 반면 미국, 영국, 독일은 각각 115, 127, 136에 머물렀다.
성장의 주요 동력은 수출의 급속한 증가였다. 일본은 면제품 등의 경공업에서 높은 수준의 국제경쟁력을 발휘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 대만, 관동주(關東州), 만주에 걸친 광역 경제권을 구축했다. 1930년대 일본 경제의 고성장은 동 경제권 내의 분업 관계에 기초했다. 일본은 권내 지역에 공산품을 팔고 그로부터 식량과 원료를 구했다. 활발한 무역과 투자는 권내 모든 지역의 성장을 자극했다. 그와 더불어 공업화의 물결이 권내 여러 지역으로 퍼졌다. 조선도 그에 포섭돼 일본에 선철, 알루미늄, 섬유, 종이 등의 공산품을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근대적 경제성장
조선총독부는 각종 생산, 재정, 무역에 관해 방대한 분량의 통계를 남겼다. 그것으로부터 한국은행이 1953년의 것부터 작성해온 국민계정(國民計定)을 1910년까지 소급해 작성할 수 있다. 2006년 낙성대경제연구소의 경제사 연구자들이 그 작업을 수행했다. 그에 의하면 1910~1940년 조선 경제는 연평균 3.7%의 성장률을 보였다. 동 기간 인구는 연평균 1.33% 증가했다. 그에 따라 1인당 실질소득은 연평균 2.37% 증가했다.
총소득 증가율이 총인구 증가율을 능가해 1인당 실질소득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근대적 경제성장’은 영국에서 최초로 발흥한 산업혁명 이후의 현상이다. 그 이전 수만 년에 걸친 인류의 경제생활은 소득이 증가하면 인구가 따라 증가해 1인당 실질소득에 개선이 없는 ‘맬서스의 덫’에 걸려 있었다. 한국인이 그 덫에서 벗어난 것은 1910년 이후였다. 그 실질적인 출발은 이전 연재에서 소개한 대로 농업생산이 오랫동안 정체하다가 증가 추세로 돌아선 1890년대부터라고 짐작된다.
성장요인
지속적인 경제성장은 조선의 산업구조를 근대적 형태로 바꾸었다. 1910~1940년 1차산업 농림어업 비중이 71%에서 43%로 줄고, 2차산업 광공업 비중이 8%에서 29%로, 3차산업 서비스업 비중이 22%에서 28%로 늘었다. 가장 중요한 성장 요인은 수출입 무역이었다. 1920년까지 일본과의 무역에서 일부 사치품을 제외한 대부분 관세가 폐지됐다. 두 지역은 단일 시장으로 완벽하게 통합됐다. 총소득에서 수출입 비중, 곧 대외의존도는 1912년의 18%에서 1940년 56%로 증가했다. 조선 경제는 일제하에서 급속히 개방 구조로 변모했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성장요인은 일본의 투자였다. 투자는 1920년대 전반까지는 별다른 증가세를 보이지 않다가 후반부터 늘어나기 시작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진 이후 일본은 조선의 병참기지화, 곧 군수공업화를 추진했다. 그에 따라 일본 기업이 활발하게 조선으로 건너와 공장을 건설했다. 1939년 이후 무역은 전시통제(戰時統制)에 따라 감소한 반면 투자가 활발히 이뤄져 성장세를 이어갔다.
수출입 내역
수출품에서는 쌀 등의 곡물류가 지배적 비중을 차지했다. 쌀의 비중은 1920년대까지 전체 수출의 50% 이상이었다. 이후 곡물류의 비중은 점차 줄고 석탄 등 광물류의 수출이 증가했다. 조선 경제는 ‘중심’ 일본에 식량과 원료를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 위에 1920년대 이후 공업화가 이뤄져 공산품 수출이 증가했다. 조선이 만주로 수출한 각종 섬유제품과 화학제품은 1939년 총수출의 30% 이상을 점했다.
수입품에서는 면제품 등의 섬유직물류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은 일본산 면제품 시장으로 전락했다. 1920년대 이후 조선에서 근대적인 면방직공업이 들어섬에 따라 섬유직물류의 수입 비중이 줄었다. 그 대신 금속기계류, 광물류, 화학제품류 수입이 증가했는데 공업화에 따른 연료 및 중간재 수요에 기인한 것이었다. 일제하 조선 경제는 대일 종속이 심화하는 가운데 공업화 효과로 동아시아경제권 내에서 제2의 중심으로 올라서는 변화를 보였다.
대외수지
조선 경제의 무역수지는 수입이 수출을 계속 능가해 적자 기조를 면치 못했다. 적자를 메운 것은 일본으로부터의 이전수입(移轉收入)과 투자였다. 이전수입은 크게 총독부 재정에 대한 일본 정부의 보조금과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의 군사비를 위한 일본 정부의 지출로 이뤄졌다. 조선에 대한 일본 투자는 1920년대까지만 해도 농업개발을 위한 정부와 민간 자금이 식산은행, 동양척식과 같은 특수금융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 주류였다. 그러다가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의 대기업이 조선에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선 군수공업화 정책에 따라 상당수의 중화학 및 금속기계 대기업이 조선으로 넘어왔다. 이 같은 조선 경제의 대외수지는 지배 본국에 식량과 원료를 수출하고, 거기서 발생한 잉여자금마저 본국의 금융기구가 재량으로 처분했던 인도 등 다른 식민지의 그것과는 자못 상이했다. 공업화의 양상
조선 경제의 성장을 주도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일본인 자본가, 지주, 상인이었다. 1917년 일본 미쓰이(三井) 재벌계의 자본이 부산에 조선방직(朝鮮紡織)을 설립했다. 조선방직은 영국산 최신식 방적기와 광폭직기를 갖춘 조선 최초의 대규모 근대적 공장이었다. 1926년 일본의 신흥재벌인 일본질소비료(日本窒素肥料)가 조선에 진출했다. 그 직접적 유인은 조선 북부지방에서 발견된 대규모 전력자원에 있었다. 일본질소비료는 수력발전회사와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29년 두 회사는 부전강 제1발전소와 흥남공장 제1기공사를 완공했으며, 여기서의 수익을 재투자해 사업 규모와 범위를 비약적으로 확대했다. 조선질소비료는 다각적인 소재 연관을 통해 유지(油脂), 화약, 석탄화학, 금속정련 등을 포괄한 전기화학콤비나트를 흥남 일대에 건설했다. 1936년 동 회사의 질소고정 능력은 연산 10만t으로 세계 5위였다. 일본질소비료에 이어 일본의 다른 대자본도 값싸고 풍부한 원료, 노동력, 시장을 찾아 조선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1925~1929년 14개의 대규모 자본이 조선으로 건너와 공장을 건설했다. 조선에서 종업원 수백 명의 대규모 공장이 건설된 것은 1920년대 후반부터였다. 조선인 자본가의 성장
1940년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은 75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3%였다. 경제성장 과실이 온통 소수 일본인의 차지였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그것은 패배주의적 발상이다. 일본인의 소득 수준은 조선인보다 높았으며, 그 격차는 벌어졌을 수 있다. 그렇지만 조선인의 소득 수준도 높아지는 추세였다. 나아가 경제성장에 능동적으로 참여해 상공업자로 또는 자본가로 성공한 조선인 수가 적지 않았다. 조선인 소유의 공장은 1915년만 해도 207개로 일본인 공장 559개에 비해 크게 모자랐다. 그렇지만 1920년대 후반에 그 관계가 역전해 1938년이면 일본인 공장 2627개에 비해 조선인 공장은 3963개나 됐다.
조선인 공장은 종업원 50명 미만의 소규모가 대부분이었다. 종업원 200명 이상의 대규모 공장은 압도적으로 일본인 소유였다. 조선인 공장은 조선인 고유의 기호에 기초한 직뉴업(織紐業), 메리야스업, 고무신업, 제지업, 양조업이나 기술 수준이 낮은 정미업, 착유업(搾油業) 등에 종사했다.
그렇다고 조선인 자본가들이 일본인과의 경쟁을 피해 틈새시장에서 웅크렸던 것만은 아니다. 평양의 고무공업은 1930년대 고무신에다 방한포를 입힌 신제품을 개발해 만주시장으로 출하했다. 메리야스 공업에서는 1920년대 중반 이후 공업용 전기가 보급되자 상당수 공장이 수직기(手織機)에서 자동직기로 전환했다. 제품도 양말 일변도에서 모자, 타월, 내의로 다변화했으며, 그 역시 만주시장 개척에 나섰다. 일정기 35년은 해방 후 한국 경제를 이끈 자본가 계층이 발흥하는 기간이었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일본 경제는 1880년대 중반부터 1910년까지 산업혁명을 이룩했다. 이후 1940년까지 일본 경제는 세계 주요 국가 중 가장 높은 성장세를 구가했다. 1913년의 1인당 실질소득을 100이라 할 때 1938년 일본의 그것은 176이었다. 반면 미국, 영국, 독일은 각각 115, 127, 136에 머물렀다.
성장의 주요 동력은 수출의 급속한 증가였다. 일본은 면제품 등의 경공업에서 높은 수준의 국제경쟁력을 발휘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 대만, 관동주(關東州), 만주에 걸친 광역 경제권을 구축했다. 1930년대 일본 경제의 고성장은 동 경제권 내의 분업 관계에 기초했다. 일본은 권내 지역에 공산품을 팔고 그로부터 식량과 원료를 구했다. 활발한 무역과 투자는 권내 모든 지역의 성장을 자극했다. 그와 더불어 공업화의 물결이 권내 여러 지역으로 퍼졌다. 조선도 그에 포섭돼 일본에 선철, 알루미늄, 섬유, 종이 등의 공산품을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근대적 경제성장
조선총독부는 각종 생산, 재정, 무역에 관해 방대한 분량의 통계를 남겼다. 그것으로부터 한국은행이 1953년의 것부터 작성해온 국민계정(國民計定)을 1910년까지 소급해 작성할 수 있다. 2006년 낙성대경제연구소의 경제사 연구자들이 그 작업을 수행했다. 그에 의하면 1910~1940년 조선 경제는 연평균 3.7%의 성장률을 보였다. 동 기간 인구는 연평균 1.33% 증가했다. 그에 따라 1인당 실질소득은 연평균 2.37% 증가했다.
총소득 증가율이 총인구 증가율을 능가해 1인당 실질소득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근대적 경제성장’은 영국에서 최초로 발흥한 산업혁명 이후의 현상이다. 그 이전 수만 년에 걸친 인류의 경제생활은 소득이 증가하면 인구가 따라 증가해 1인당 실질소득에 개선이 없는 ‘맬서스의 덫’에 걸려 있었다. 한국인이 그 덫에서 벗어난 것은 1910년 이후였다. 그 실질적인 출발은 이전 연재에서 소개한 대로 농업생산이 오랫동안 정체하다가 증가 추세로 돌아선 1890년대부터라고 짐작된다.
성장요인
지속적인 경제성장은 조선의 산업구조를 근대적 형태로 바꾸었다. 1910~1940년 1차산업 농림어업 비중이 71%에서 43%로 줄고, 2차산업 광공업 비중이 8%에서 29%로, 3차산업 서비스업 비중이 22%에서 28%로 늘었다. 가장 중요한 성장 요인은 수출입 무역이었다. 1920년까지 일본과의 무역에서 일부 사치품을 제외한 대부분 관세가 폐지됐다. 두 지역은 단일 시장으로 완벽하게 통합됐다. 총소득에서 수출입 비중, 곧 대외의존도는 1912년의 18%에서 1940년 56%로 증가했다. 조선 경제는 일제하에서 급속히 개방 구조로 변모했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성장요인은 일본의 투자였다. 투자는 1920년대 전반까지는 별다른 증가세를 보이지 않다가 후반부터 늘어나기 시작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진 이후 일본은 조선의 병참기지화, 곧 군수공업화를 추진했다. 그에 따라 일본 기업이 활발하게 조선으로 건너와 공장을 건설했다. 1939년 이후 무역은 전시통제(戰時統制)에 따라 감소한 반면 투자가 활발히 이뤄져 성장세를 이어갔다.
수출입 내역
수출품에서는 쌀 등의 곡물류가 지배적 비중을 차지했다. 쌀의 비중은 1920년대까지 전체 수출의 50% 이상이었다. 이후 곡물류의 비중은 점차 줄고 석탄 등 광물류의 수출이 증가했다. 조선 경제는 ‘중심’ 일본에 식량과 원료를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 위에 1920년대 이후 공업화가 이뤄져 공산품 수출이 증가했다. 조선이 만주로 수출한 각종 섬유제품과 화학제품은 1939년 총수출의 30% 이상을 점했다.
수입품에서는 면제품 등의 섬유직물류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은 일본산 면제품 시장으로 전락했다. 1920년대 이후 조선에서 근대적인 면방직공업이 들어섬에 따라 섬유직물류의 수입 비중이 줄었다. 그 대신 금속기계류, 광물류, 화학제품류 수입이 증가했는데 공업화에 따른 연료 및 중간재 수요에 기인한 것이었다. 일제하 조선 경제는 대일 종속이 심화하는 가운데 공업화 효과로 동아시아경제권 내에서 제2의 중심으로 올라서는 변화를 보였다.
대외수지
조선 경제의 무역수지는 수입이 수출을 계속 능가해 적자 기조를 면치 못했다. 적자를 메운 것은 일본으로부터의 이전수입(移轉收入)과 투자였다. 이전수입은 크게 총독부 재정에 대한 일본 정부의 보조금과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의 군사비를 위한 일본 정부의 지출로 이뤄졌다. 조선에 대한 일본 투자는 1920년대까지만 해도 농업개발을 위한 정부와 민간 자금이 식산은행, 동양척식과 같은 특수금융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 주류였다. 그러다가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의 대기업이 조선에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선 군수공업화 정책에 따라 상당수의 중화학 및 금속기계 대기업이 조선으로 넘어왔다. 이 같은 조선 경제의 대외수지는 지배 본국에 식량과 원료를 수출하고, 거기서 발생한 잉여자금마저 본국의 금융기구가 재량으로 처분했던 인도 등 다른 식민지의 그것과는 자못 상이했다. 공업화의 양상
조선 경제의 성장을 주도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일본인 자본가, 지주, 상인이었다. 1917년 일본 미쓰이(三井) 재벌계의 자본이 부산에 조선방직(朝鮮紡織)을 설립했다. 조선방직은 영국산 최신식 방적기와 광폭직기를 갖춘 조선 최초의 대규모 근대적 공장이었다. 1926년 일본의 신흥재벌인 일본질소비료(日本窒素肥料)가 조선에 진출했다. 그 직접적 유인은 조선 북부지방에서 발견된 대규모 전력자원에 있었다. 일본질소비료는 수력발전회사와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29년 두 회사는 부전강 제1발전소와 흥남공장 제1기공사를 완공했으며, 여기서의 수익을 재투자해 사업 규모와 범위를 비약적으로 확대했다. 조선질소비료는 다각적인 소재 연관을 통해 유지(油脂), 화약, 석탄화학, 금속정련 등을 포괄한 전기화학콤비나트를 흥남 일대에 건설했다. 1936년 동 회사의 질소고정 능력은 연산 10만t으로 세계 5위였다. 일본질소비료에 이어 일본의 다른 대자본도 값싸고 풍부한 원료, 노동력, 시장을 찾아 조선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1925~1929년 14개의 대규모 자본이 조선으로 건너와 공장을 건설했다. 조선에서 종업원 수백 명의 대규모 공장이 건설된 것은 1920년대 후반부터였다. 조선인 자본가의 성장
1940년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은 75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3%였다. 경제성장 과실이 온통 소수 일본인의 차지였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그것은 패배주의적 발상이다. 일본인의 소득 수준은 조선인보다 높았으며, 그 격차는 벌어졌을 수 있다. 그렇지만 조선인의 소득 수준도 높아지는 추세였다. 나아가 경제성장에 능동적으로 참여해 상공업자로 또는 자본가로 성공한 조선인 수가 적지 않았다. 조선인 소유의 공장은 1915년만 해도 207개로 일본인 공장 559개에 비해 크게 모자랐다. 그렇지만 1920년대 후반에 그 관계가 역전해 1938년이면 일본인 공장 2627개에 비해 조선인 공장은 3963개나 됐다.
조선인 공장은 종업원 50명 미만의 소규모가 대부분이었다. 종업원 200명 이상의 대규모 공장은 압도적으로 일본인 소유였다. 조선인 공장은 조선인 고유의 기호에 기초한 직뉴업(織紐業), 메리야스업, 고무신업, 제지업, 양조업이나 기술 수준이 낮은 정미업, 착유업(搾油業) 등에 종사했다.
그렇다고 조선인 자본가들이 일본인과의 경쟁을 피해 틈새시장에서 웅크렸던 것만은 아니다. 평양의 고무공업은 1930년대 고무신에다 방한포를 입힌 신제품을 개발해 만주시장으로 출하했다. 메리야스 공업에서는 1920년대 중반 이후 공업용 전기가 보급되자 상당수 공장이 수직기(手織機)에서 자동직기로 전환했다. 제품도 양말 일변도에서 모자, 타월, 내의로 다변화했으며, 그 역시 만주시장 개척에 나섰다. 일정기 35년은 해방 후 한국 경제를 이끈 자본가 계층이 발흥하는 기간이었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