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에서 국민으로…3·1 운동, '정신적 국민' 탄생 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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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탄생》송호근 포스텍 석좌교수
《인민의 탄생》《시민의 탄생》이어 '탄생 3부작' 완결
사회학자로서 '한국의 근대' 흔적 찾아
"고종 서거, 3·1 운동 통해 '정신적 국민의식' 생겨
문예·종교·사회 공론장이 정치 공동체 역할
임시정부는 '정신적 국민국가'…'현실 국가'는 1948년 건국"
《인민의 탄생》《시민의 탄생》이어 '탄생 3부작' 완결
사회학자로서 '한국의 근대' 흔적 찾아
"고종 서거, 3·1 운동 통해 '정신적 국민의식' 생겨
문예·종교·사회 공론장이 정치 공동체 역할
임시정부는 '정신적 국민국가'…'현실 국가'는 1948년 건국"
“한국의 근대 형성 과정은 상당히 독특합니다. 개항도 동아시아에서 가장 늦었고, 일제강점기 기간도 36년이나 됩니다. 그런데도 백성에서 국민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분명 존재해요. 사회학자로서 그 흐름을 찾아보고 싶었어요.”
《국민의 탄생》(민음사)의 저자 송호근 포스텍 석좌교수(64·사진)은 지난 26일 서울 삼성동 포스코타워에서 인터뷰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인민의 탄생》《시민의 탄생》에 이어 ‘탄생 3부작’ 시리즈의 완결편이다. ‘인민의 탄생’은 조선시대부터 동학운동이 일어난 1894년, ‘시민의 탄생’은 1894년부터 1910년 경술국치, ‘국민의 탄생’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부터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까지 다뤘다.
송 교수는 “1919년은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정신적 국민’이 출현한 가장 중요한 시기”라며 “그 해 1월 고종이 서거했고, 3·1 운동이 일어났고, 4월에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고 말했다. “3·1 운동은 고종의 서거 후 ‘고아가 된 백성’이 ‘주체 의식을 가진 정신적 국민’이 된 대사건이었습니다. 군주와 국가가 분리됐죠.”
‘탄생 3부작’에선 한국의 근대국가와 근대 국민의 탄생을 논하기 위해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을 틀로 삼았다. “암울한 식민지 시대에도 공론장은 있었다”는 게 송 교수의 설명이다. “전체주의 국가에서도 숨을 다 못 쉬었을까요. 그 엄혹한 일제강점기에도 존재론적 자각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걸 종교와 문예, 사회 운동이라는 공론장을 통해 살펴봤습니다.”
다음은 송 교수와 1문 1답이다.
▷인민과 시민, 국민은 지금도 혼용되고 있는 용어입니다. 어떤 의미로 이 세 가지 용어를 쓰셨습니까.
▶“아무래도 사회학의 주요 이론들이 유럽에서 온 것이라 번역 과정에서 뒤섞여 쓰일 때가 많은 건 사실입니다. 저는 이번 시리즈를 쓰면서 한글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문해(文解) 인민, 평민 공론장에서 자아를 자각하기 시작하는 시민, 정신적 국가의 국민이란 뜻으로 썼습니다.”
▷일제강점기에서 국민이란 개념이 어떻게 등장할 수 있었나요.
▶“3·1 운동 전까지만 해도 국민, 한국 등의 용어는 지식인 계층에서만 쓰였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어지고 일제 치하 식민지가 됐기 때문에 국가 개념에 대한 명확한 단어를 쓸 수 없었죠. 하지만 3·1 운동은 일반 ‘백성’들에게 ‘정신적인 국민 의식’을 폭발시킨 계기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독특한 면을 발견할 수 있어요.”
▷어떤 점입니까.
▶“눈에 보이는 특정 주도 세력이 없다는 겁니다. 매우 산발적으로 나타나요. 분명 국민이란 개념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신호는 보이는데 이걸 엮고, 조망할 방도를 찾기 힘들어요. 자료는 많은데 실체를 딱 정의하기가 애매하죠. 이 부분은 앞으로 연구가 더 많이 필요해요. 사학과 사회학, 국문학, 정치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가 협력해야 합니다.”
▷한반도의 역사만큼 역동적이고 복잡한 사례는 보기 힘들 겁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국내 사회학계에선 이 시기 연구가 별로 없다고 보십니까.
▶“서양의 사회학 이론 연구에 너무 기울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한국을 만들게 한 뿌리를 단순히 시간의 흐름으로만 치부하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한국의 사회학’이 없단 게 현실이죠. 저도 이 책을 쓰기 위해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을 끌고 올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공론화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910년대의 공론장은 한마디로 암흑입니다. 총독부의 식민 통치는 역사상 유례 없이 폭력적이고 억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예와 종교, 사회 운동은 살아있었어요. 예를 들어 이광수의 소설 ‘무정’에선 당시 지식층의 의식을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죠. 천도교나 기독교는 교리와 조직, 신자를 갖춘 유형의 존재였고요. 해외 독립운동 조직이 사회 운동 역할을 합니다. 저는 이 조직을 ‘환상형(環狀形) 공화 네트워크’라고 부릅니다.”
▷환상형 공화 네트워크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 부탁드립니다.
▶“도산 안창호를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해외에 망명해 있으면서 한반도 내 인사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합니다. 3·1 운동 이후 이 조직은 세계 각국에 각종 선언서, 통고문, 호소문을 보내면서 일제 치하의 현실을 알리고자 하죠. 이들이 국민의 탄생에 큰 영향을 미쳤고,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가 됩니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헌법이 ‘정신적인 국민국가’를 선언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건국 시점에 대한 논란이 많은데 어떻게 보십니까.
▶“임시정부가 현실의 국가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무형의 의식 속 정신적 국민국가였어요. 현실 국가는 1948년 건국됐죠. 이런 의미에서 1919년을 건국절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이번 책은 사회학자로서 내셨습니다. 칼럼니스트, 작가로서의 송호근은 어떤 인물입니까.
▶“어느 시대든 지식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 제목처럼 ‘오만과 편견’으로 나타나요. 저는 좌우를 좀 왔다갔다 하는 편입니다. 칼럼을 쓸 때 ‘정권과 반대로 간다’는 게 제 원칙입니다. 거리를 항상 유지하기 위해서요. 책과 칼럼을 쓰기 위해선 저만의 입장을 고수하기 어려우니까요. 항상 공부하고, 항상 경계하고, 항상 저의 위치를 파악해야죠. 제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열린 마음도 있어야 하고요.”
▷이 시리즈의 후속작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아이고, 혼자서는 더 이상 못해요. 너무 힘들어요. 한국의 근대란 주제는 쓰면 쓸수록 물음표만 커져요. 결국 어떤 실마리나 해답은 내놓지 못했잖아요.”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국민의 탄생》(민음사)의 저자 송호근 포스텍 석좌교수(64·사진)은 지난 26일 서울 삼성동 포스코타워에서 인터뷰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인민의 탄생》《시민의 탄생》에 이어 ‘탄생 3부작’ 시리즈의 완결편이다. ‘인민의 탄생’은 조선시대부터 동학운동이 일어난 1894년, ‘시민의 탄생’은 1894년부터 1910년 경술국치, ‘국민의 탄생’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부터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까지 다뤘다.
송 교수는 “1919년은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정신적 국민’이 출현한 가장 중요한 시기”라며 “그 해 1월 고종이 서거했고, 3·1 운동이 일어났고, 4월에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고 말했다. “3·1 운동은 고종의 서거 후 ‘고아가 된 백성’이 ‘주체 의식을 가진 정신적 국민’이 된 대사건이었습니다. 군주와 국가가 분리됐죠.”
‘탄생 3부작’에선 한국의 근대국가와 근대 국민의 탄생을 논하기 위해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을 틀로 삼았다. “암울한 식민지 시대에도 공론장은 있었다”는 게 송 교수의 설명이다. “전체주의 국가에서도 숨을 다 못 쉬었을까요. 그 엄혹한 일제강점기에도 존재론적 자각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걸 종교와 문예, 사회 운동이라는 공론장을 통해 살펴봤습니다.”
다음은 송 교수와 1문 1답이다.
▷인민과 시민, 국민은 지금도 혼용되고 있는 용어입니다. 어떤 의미로 이 세 가지 용어를 쓰셨습니까.
▶“아무래도 사회학의 주요 이론들이 유럽에서 온 것이라 번역 과정에서 뒤섞여 쓰일 때가 많은 건 사실입니다. 저는 이번 시리즈를 쓰면서 한글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문해(文解) 인민, 평민 공론장에서 자아를 자각하기 시작하는 시민, 정신적 국가의 국민이란 뜻으로 썼습니다.”
▷일제강점기에서 국민이란 개념이 어떻게 등장할 수 있었나요.
▶“3·1 운동 전까지만 해도 국민, 한국 등의 용어는 지식인 계층에서만 쓰였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어지고 일제 치하 식민지가 됐기 때문에 국가 개념에 대한 명확한 단어를 쓸 수 없었죠. 하지만 3·1 운동은 일반 ‘백성’들에게 ‘정신적인 국민 의식’을 폭발시킨 계기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독특한 면을 발견할 수 있어요.”
▷어떤 점입니까.
▶“눈에 보이는 특정 주도 세력이 없다는 겁니다. 매우 산발적으로 나타나요. 분명 국민이란 개념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신호는 보이는데 이걸 엮고, 조망할 방도를 찾기 힘들어요. 자료는 많은데 실체를 딱 정의하기가 애매하죠. 이 부분은 앞으로 연구가 더 많이 필요해요. 사학과 사회학, 국문학, 정치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가 협력해야 합니다.”
▷한반도의 역사만큼 역동적이고 복잡한 사례는 보기 힘들 겁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국내 사회학계에선 이 시기 연구가 별로 없다고 보십니까.
▶“서양의 사회학 이론 연구에 너무 기울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한국을 만들게 한 뿌리를 단순히 시간의 흐름으로만 치부하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한국의 사회학’이 없단 게 현실이죠. 저도 이 책을 쓰기 위해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을 끌고 올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공론화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910년대의 공론장은 한마디로 암흑입니다. 총독부의 식민 통치는 역사상 유례 없이 폭력적이고 억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예와 종교, 사회 운동은 살아있었어요. 예를 들어 이광수의 소설 ‘무정’에선 당시 지식층의 의식을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죠. 천도교나 기독교는 교리와 조직, 신자를 갖춘 유형의 존재였고요. 해외 독립운동 조직이 사회 운동 역할을 합니다. 저는 이 조직을 ‘환상형(環狀形) 공화 네트워크’라고 부릅니다.”
▷환상형 공화 네트워크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 부탁드립니다.
▶“도산 안창호를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해외에 망명해 있으면서 한반도 내 인사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합니다. 3·1 운동 이후 이 조직은 세계 각국에 각종 선언서, 통고문, 호소문을 보내면서 일제 치하의 현실을 알리고자 하죠. 이들이 국민의 탄생에 큰 영향을 미쳤고,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가 됩니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헌법이 ‘정신적인 국민국가’를 선언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건국 시점에 대한 논란이 많은데 어떻게 보십니까.
▶“임시정부가 현실의 국가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무형의 의식 속 정신적 국민국가였어요. 현실 국가는 1948년 건국됐죠. 이런 의미에서 1919년을 건국절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이번 책은 사회학자로서 내셨습니다. 칼럼니스트, 작가로서의 송호근은 어떤 인물입니까.
▶“어느 시대든 지식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 제목처럼 ‘오만과 편견’으로 나타나요. 저는 좌우를 좀 왔다갔다 하는 편입니다. 칼럼을 쓸 때 ‘정권과 반대로 간다’는 게 제 원칙입니다. 거리를 항상 유지하기 위해서요. 책과 칼럼을 쓰기 위해선 저만의 입장을 고수하기 어려우니까요. 항상 공부하고, 항상 경계하고, 항상 저의 위치를 파악해야죠. 제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열린 마음도 있어야 하고요.”
▷이 시리즈의 후속작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아이고, 혼자서는 더 이상 못해요. 너무 힘들어요. 한국의 근대란 주제는 쓰면 쓸수록 물음표만 커져요. 결국 어떤 실마리나 해답은 내놓지 못했잖아요.”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