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해적왕' 잡으려다 열린 대영제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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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모두의 적
스티븐 존슨 지음
한국경제신문
380쪽 | 1만6800원
스티븐 존슨 지음
한국경제신문
380쪽 | 1만6800원
우연한 일로 한 시대의 역사가 바뀌었다면? 그것도 한 사람의 해적에 의해 대영제국 시대를 여는 방아쇠가 당겨졌다면? 저자가 ‘천재 이야기꾼’ 스티븐 존슨이니 쉽게 눈치챌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이 얼마나 흥미진진하게 전개될지를.
1695년 9월 11일, 해적왕 헨리 에브리와 그를 따르는 일당은 인도 북서부 수라트 근처 바다에서 어마어마한 보물선 ‘건스웨이호’를 탈취한다. 작은 배들은 10노트 이상의 빠른 속도로 덩치 큰 배에 접근해 순식간에 80문의 대포와 수백 정의 머스킷총으로 중무장한 배를 무력화한다. 사실 그 배는 무굴제국 황제의 배였다. 황제의 직계 가족이 성지순례를 다녀오는 길이었으며, 황제의 손녀로 추정되는 공주도 타고 있었다. 해적들은 다른 배에 그랬던 것처럼 갑판에 오르자마자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강간·폭행을 자행했다. 자신들의 행위가 훗날 역사의 연대표에 굵은 글씨를 남길 거라곤 상상도 못 하면서…. 소식을 들은 무굴제국 황제 아우랑제브의 분노는 영국과 동인도회사로 향했다. 해적왕이 영국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영국과의 무역은 즉각 중단됐고 일련의 보복 조치도 준비했다.
무굴제국과의 무역으로 큰 이익을 보던 동인도회사와 영국은 재빨리 수습에 나섰다. 영국 정부는 지금까지 어느 정도 뒤를 봐주던 에브리 일당을 ‘인류 모두의 적’으로 규정하고 막대한 현상금을 걸어 공개수배했다. 에브리 한 사람의 목에 걸린 현상금만 해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1억3500만원, 매우 파격적인 금액이었다. 최초의 ‘1억원 현상금’이 공표되자 전 세계 현상수배범 사냥꾼들이 해적왕 에브리의 추격에 나섰다.
동인도회사에도 중대한 전환점이 됐다. 에브리와 국적이 같다는 이유로 회사가 해적과 한패로 몰리자 동인도회사는 황제에게 새로운 거래를 제안한다. 인도 앞바다를 해적으로부터 지켜줄 테니 공식적으로 법적 권한을 달라고 한 것이다. 영국과의 무역으로 인한 여러 정황을 살펴본 황제가 이 요청을 수락하면서 동인도회사는 인도 지역에서 처음으로 법적 지위를 얻게 됐다. 그렇게 얻은 권력은 점점 막강해져 훗날 대영제국이 인도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결정적 토대가 됐는데, 당시에는 양측의 이해관계가 일치해 급히 마무리된 사건이었다.
여기서 잠깐, 1650년대를 두 화면으로 돌려보자. 한 아이는 영국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해군으로 복무하다 해적이 됐고, 8000㎞ 떨어진 곳에서 한 왕조의 새로운 계승자는 무굴제국의 황제가 된다. 지리와 문화, 계급, 종교와 언어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서, 이들이 조우할 거라는 상상은 확률적으로 망상에 가까웠다. 그러나 무굴제국 황제 아우랑제브와 해적왕 헨리 에브리는 역사의 길목에서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된 것이다.
역사에는 수많은 우연이 존재하지만, 만약 에브리가 해적이 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가 그날 황제의 보물선을 약탈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대영제국은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기업이나 국가 같은 큰 조직이 인류를 이끌어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을 면밀히 살펴보면 거기엔 크고 작은 다양한 주체들의 복잡한 관계망이 존재한다. 역사는 그 주체들이 설계해놓은 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형성된 작은 충격들에 의해 결정된다.
이 사건 역시 그렇다. 한 명의 해적과 무굴제국의 막대한 부, 영국의 제국주의적 야심, 타지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동인도회사의 절박함, 점점 중요해졌던 세계의 무역망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었다. 해적왕 에브리는 이 관계망에 최초로 불을 붙인 사람이었다. 한 해적의 ‘건스웨이호 약탈’이라는 작은 불씨는 ‘근대적 제국주의’라는 큰 화재로 번져갔다. 이렇듯 오늘 당신도 자신도 모르게 인류의 미래를 결정짓는 성냥불을 긋고 있는지도 모른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는 그렇게 역사의 수레바퀴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로 우리에게 익숙한 저자 스티븐 존슨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대영제국과 동인도회사라는 묵직한 근대사를 해적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이렇듯 술술 풀어놓는다. 박학다식함과 재치 있는 문장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가 어쩌면 진정한 해적이 아닐까.
전장석 기자 saka@hankyung.com
1695년 9월 11일, 해적왕 헨리 에브리와 그를 따르는 일당은 인도 북서부 수라트 근처 바다에서 어마어마한 보물선 ‘건스웨이호’를 탈취한다. 작은 배들은 10노트 이상의 빠른 속도로 덩치 큰 배에 접근해 순식간에 80문의 대포와 수백 정의 머스킷총으로 중무장한 배를 무력화한다. 사실 그 배는 무굴제국 황제의 배였다. 황제의 직계 가족이 성지순례를 다녀오는 길이었으며, 황제의 손녀로 추정되는 공주도 타고 있었다. 해적들은 다른 배에 그랬던 것처럼 갑판에 오르자마자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강간·폭행을 자행했다. 자신들의 행위가 훗날 역사의 연대표에 굵은 글씨를 남길 거라곤 상상도 못 하면서…. 소식을 들은 무굴제국 황제 아우랑제브의 분노는 영국과 동인도회사로 향했다. 해적왕이 영국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영국과의 무역은 즉각 중단됐고 일련의 보복 조치도 준비했다.
무굴제국과의 무역으로 큰 이익을 보던 동인도회사와 영국은 재빨리 수습에 나섰다. 영국 정부는 지금까지 어느 정도 뒤를 봐주던 에브리 일당을 ‘인류 모두의 적’으로 규정하고 막대한 현상금을 걸어 공개수배했다. 에브리 한 사람의 목에 걸린 현상금만 해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1억3500만원, 매우 파격적인 금액이었다. 최초의 ‘1억원 현상금’이 공표되자 전 세계 현상수배범 사냥꾼들이 해적왕 에브리의 추격에 나섰다.
동인도회사에도 중대한 전환점이 됐다. 에브리와 국적이 같다는 이유로 회사가 해적과 한패로 몰리자 동인도회사는 황제에게 새로운 거래를 제안한다. 인도 앞바다를 해적으로부터 지켜줄 테니 공식적으로 법적 권한을 달라고 한 것이다. 영국과의 무역으로 인한 여러 정황을 살펴본 황제가 이 요청을 수락하면서 동인도회사는 인도 지역에서 처음으로 법적 지위를 얻게 됐다. 그렇게 얻은 권력은 점점 막강해져 훗날 대영제국이 인도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결정적 토대가 됐는데, 당시에는 양측의 이해관계가 일치해 급히 마무리된 사건이었다.
여기서 잠깐, 1650년대를 두 화면으로 돌려보자. 한 아이는 영국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해군으로 복무하다 해적이 됐고, 8000㎞ 떨어진 곳에서 한 왕조의 새로운 계승자는 무굴제국의 황제가 된다. 지리와 문화, 계급, 종교와 언어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서, 이들이 조우할 거라는 상상은 확률적으로 망상에 가까웠다. 그러나 무굴제국 황제 아우랑제브와 해적왕 헨리 에브리는 역사의 길목에서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된 것이다.
역사에는 수많은 우연이 존재하지만, 만약 에브리가 해적이 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가 그날 황제의 보물선을 약탈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대영제국은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기업이나 국가 같은 큰 조직이 인류를 이끌어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을 면밀히 살펴보면 거기엔 크고 작은 다양한 주체들의 복잡한 관계망이 존재한다. 역사는 그 주체들이 설계해놓은 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형성된 작은 충격들에 의해 결정된다.
이 사건 역시 그렇다. 한 명의 해적과 무굴제국의 막대한 부, 영국의 제국주의적 야심, 타지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동인도회사의 절박함, 점점 중요해졌던 세계의 무역망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었다. 해적왕 에브리는 이 관계망에 최초로 불을 붙인 사람이었다. 한 해적의 ‘건스웨이호 약탈’이라는 작은 불씨는 ‘근대적 제국주의’라는 큰 화재로 번져갔다. 이렇듯 오늘 당신도 자신도 모르게 인류의 미래를 결정짓는 성냥불을 긋고 있는지도 모른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는 그렇게 역사의 수레바퀴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로 우리에게 익숙한 저자 스티븐 존슨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대영제국과 동인도회사라는 묵직한 근대사를 해적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이렇듯 술술 풀어놓는다. 박학다식함과 재치 있는 문장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가 어쩌면 진정한 해적이 아닐까.
전장석 기자 sak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