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프랑스 와인 최고 등급인 ‘그랑 크뤼 클라세’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 벌어졌다. 유대계 로스차일드 가문이 만든 ‘샤토 무통 로칠드’가 그랑 크뤼 2등급에서 1등급으로 승격되며 최고의 와인 리스트에 올랐다.

1855년 나폴레옹 3세의 지시로 그랑 크뤼 클라세가 만들어진 지 118년 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어난 변화다. 그 뒤로 지금까지 그랑 크뤼 1등급은 최초 선정된 샤토 라피트·라투르·마고·오브리옹에 무통까지 단 다섯 개로 유지되고 있다.

철옹성 같은 그랑 크뤼 클라세를 깨뜨린 로스차일드 가문은 그해를 기념하기 위해 1973년 빈티지 와인의 라벨을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에게 맡겼다. 이것은 피카소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만든 와인 라벨이 됐다. 1973년 빈티지 샤토 무통 로칠드가 와인 수집가와 미술 수집가 모두에게 최고의 컬렉션으로 꼽히는 배경이다.

‘회화 걸작선’ 샤토 무통 로칠드의 혁명

샤토 무통 로칠드는 예술가의 작품을 와인 라벨에 입힌 ‘아트 와인’의 시조다. 1945년부터 와인 라벨을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에게 맡긴 무통의 마케팅은 당시 혁명과도 같았다.

살바도르 달리, 세자르 발디치니, 호앙 미로, 마르크 샤갈, 바실리 칸딘스키, 앤디 워홀, 키스 해링, 데이비드 호크니 등 현대 회화의 거장들이 매년 무통의 라벨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야말로 무통 와인 컬렉션 자체가 현대 회화 걸작선이다.

한국 예술가도 무통 라벨을 작업했다. 2013년 빈티지의 주인공은 이우환 화백. 이 화백은 자줏빛의 ‘점’ 하나로 무통의 격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와인이 오크통 안에서 서서히 무르익듯, 자줏빛 점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차 깊어진다. 라벨 상단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이미지는 ‘와인을 마실 때의 붕 뜨는 기분’을 표현한 것이라고 이 화백은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작업에 참여한 모든 거장이 별도의 보수 없이 와인을 받는 것만으로 기꺼이 라벨 작품을 그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무통의 명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무통 라벨에 예술가의 작품을 담기 시작한 필립 드 로칠드 남작은 이것을 “예술을 위한 와인, 와인을 위한 예술”이라고 표현했다.

클림트·르누아르…명작을 마신다

키 작은 풀꽃이 만발한 언덕. 한 남자가 여자의 볼에 입을 맞추고, 그들은 세상과 단절이라도 된 듯 황금빛 아우라에 둘러싸여 서로에게 황홀히 취해 있다. 20세기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더 키스’다.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궁전에 가지 않더라도 클림트의 키스를 가까이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라벨에 키스가 새겨진 스파클링 와인 ‘클림트 키스 뀌베브뤼’를 통해서다.
이 와인은 오스트리아가 낳은 최고의 화가인 클림트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2013년 출시됐다. 오스트리아의 최고 와이너리로 손꼽히는 슐럼베르거에서 만들었다. 최고와 최고가 만난 이 와인 한 병 자체가 마스터 피스다.

‘행복을 그리는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대표작 ‘도시에서의 무도회’도 샴페인 한 병으로 가질 수 있다. 르누아르 재단에서 공식 인증한 샴페인 ‘뀌베 르누아르’다. 르누아르의 연인 알린 샤리고의 고향이 프랑스 샹파뉴 지역에 있는 에소이 마을이었던 덕분에 에소이에서 만든 ‘뀌베 르누아르’ 샴페인(샹파뉴의 영어식 발음)이 탄생할 수 있었다.

발포성 와인은 지역마다 불리는 이름이 다르다. 샴페인은 샹파뉴에서 생산한 것만 해당한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선 ‘젝트’라 불린다. ‘클림트 키스 뀌베브뤼’도 젝트다. 스페인에선 ‘카바’, 이탈리아에선 ‘스푸만테’로 불린다.

팝아트 애호가라면 ‘케니 샤프’ 쇼블

팝아트 애호가라면 뉴질랜드 와인 ‘케니 샤프 웨일본베이 쇼비뇽블랑’을 추천한다. 케니 샤프는 키스 해링, 장 미셸 바스키아와 함께 앤디 워홀 다음 세대의 팝아트 전성기를 이끄는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뉴질랜드 말보로 와인의 선구자 ‘세인트 클레어’와 컬래버레이션한 이 한정판 화이트 와인 한 병이면 케이 샤프의 익살스러운 캐릭터를 맘껏 즐길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서거 500주년을 기념해 명화 ‘수태고지’를 라벨에 입힌 ‘칸티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인상주의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가 라벨에 그대로 들어간 컵 와인 ‘르 쁘띠 피크니크 레드 블렌드’ 등도 명화가 담긴 와인이다.

이번 주말 열리는 세계 3대 아트페어 ‘프리즈서울’을 고대하며 잠을 설치고 있다면, 영화 ‘러빙 빈센트’를 보고 한동안 마음 한쪽이 아려왔던 경험이 있다면, 분명 당신은 명화가 입혀진 와인 한 병으로 짜릿한 전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하수정 기자 agatha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