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의 딸' 이후 32년 만의 장편 '아버지의 해방일지' 출간
정지아 작가 "빨갱이가 아닌, 아버지를 알아가는 여행이었죠"
"아버지가 2008년 돌아가신 뒤 빨치산이 아닌 누군가의 형, 동생, 이웃으로서 아버지의 삶은 어땠을지 쭉 생각해왔던 것 같아요.

"
정지아(57) 작가가 32년 만에 낸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에서 다시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남로당 출신 부모의 삶을 기록한 '빨치산의 딸'로 1990년 문단에 등장한 그는 이번엔 결이 다른 방식으로 아버지의 삶에 시선을 맞췄다.

최근 연합뉴스와 전화로 만난 정 작가는 "'빨치산의 딸'이 부모에게 감정을 이입해 드러나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옮긴 실록이었다면,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누군가의 형, 동생, 이웃이던 아버지의 삶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라고 소개했다.

이 소설은 정 작가가 홀로 된 고령의 어머니를 모시고자 2011년 고향인 전남 구례로 다시 내려가며 비롯됐다.

정 작가는 "구례로 내려오지 않았다면 못 썼을 것 같다"며 "아버지와 연을 맺은 분들 속에 살다 보니, 그 연이 제게 이어져 아버지를 조금 더 가깝게, 새롭게 해석할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정지아 작가 "빨갱이가 아닌, 아버지를 알아가는 여행이었죠"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란 문장으로 시작한다.

첫 챕터는 이미 10년 전에 써뒀다고 한다.

전직 빨치산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3일간의 이야기다.

화자인 딸 아리는 아버지의 기억을 촘촘히 떠올리고, 빈소를 찾은 친척과 이웃 등이 들려준 일화를 통해 아버지의 다른 얼굴과 마주한다.

소설 속 아버지는 평생을 사회주의자이자 유물론자로 살았다.

작은아버지는 집안이 망한 것도, 할아버지가 군인 손에 죽은 것도 아버지 탓이라 여기며 반목했다.

아버지는 오랜 옥고에 생활력이 없으면서도 먼 친척 보증을 서고, 자기 집 농사를 제쳐두고 남 일에 앞장섰다.

그래서 어머니의 핀잔을 들을 때면 아버지 '십팔 번'은 "사람이 오죽하면 그러겠느냐"였다.

'빨갱이 딸'이 멍에였던 아리는 이념이 다른 동창과 깊이 마음을 나누고, 17살 소녀와 허물없는 친구가 되고, 생판 초면인 이들의 어려움을 살핀 아버지를 알아가며 한껏 껴안게 된다.

정 작가는 ""이 소설은 이데올로기에 덧씌워진 아버지의 내면으로의 여행이었다"며 "빨갱이가 아닌 자연인으로서의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고 돌아봤다.

그 역시 소설 속 아리처럼 선택하지 않은 삶에 대한 원망이 깊었던 시절도 있었다.

초등학교 때 구례에서 서울로 이사한 것도 부모의 존재가 알려져서였다.

아리의 이름이 부모가 활동한 백아산의 '아', 지리산의 '리'를 조합했듯이 정 작가 이름도 이들 산에서 따왔다.

그는 "가난의 상처는 없었는데 빨갱이는 감당할 수 없는 오명이었다"며 "어린 시절엔 당연히 원망했고, 대학에 가 역사를 이해하면서 화해했다.

엄청난 무게였고 세상을 보는 시선,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 등 모든 것에 영향을 미쳤다"고 떠올렸다.

정지아 작가 "빨갱이가 아닌, 아버지를 알아가는 여행이었죠"
소설은 실재와 허구가 뒤섞였다.

아버지의 캐릭터는 꽤 투영됐지만, 작은아버지 등 일부 등장인물과 에피소드는 상당 부분 만들어냈다.

자칫 무거워질 이야기를 정 작가는 특유의 생생한 필체와 구수한 남도 사투리로 유쾌하게 풀어냈다.

딸은 아버지의 이데올로기적 허상과 현실과 동떨어진 장광설에 유머 섞인 냉소적 어투로 제삼자적 시각을 유지한다.

"여전히 이데올로기가 불편한 사람들이 있고 사회주의란 말만 꺼내도 괴로워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현실의 시선을 끌어들이려 했죠."
정 작가는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 소설집 '행복', '봄빛', '자본주의의 적'과 청소년 소설을 펴냈다.

김유정문학상, 심훈문학대상, 이효석문학상, 노근리평화문학상 등을 받았다.

'빨치산의 딸'을 내고 판매금지 등을 겪은 그에게 지금 세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정 작가는 "이데올로기 문제는 희미해졌다.

세상의 불합리함과 불평등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며 "다만, 아버지가 '우파' 친구와도 친하게 지냈듯이, 싸우더라도 돌아서면 누구나 아름다운 한 개인이지 않나.

요즘은 너무 적대적이어서 세상이 조금 무섭긴 하다"고 했다.

이 소설은 지난 세월에 대한 작가의 통렬한 반성이기도 하다.

그는 "(나를 막아서는 것이) 부모와 사상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세상 때문이라 여겼는데, 제 욕망이 컸던 것"이라며 "모든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에서 비롯된다.

그 욕심이 성장을 막았던 것"이라고 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