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데르트 호베마의 1689년작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길’. /영국 내셔널갤러리 소장
마인데르트 호베마의 1689년작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길’. /영국 내셔널갤러리 소장
15세기 이탈리아 예술이론가이자 건축가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1435년 집필한 <회화론>은 수학의 원리를 회화에 접목해 과학적 근거를 제시한 르네상스 최고의 미술 이론서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회화론>에서 회화의 정의와 화가의 목표를 이렇게 적었다.

“화가의 임무는 물체를 실제 대상과 똑같이 그리는 것이다. 선을 그리고 색을 칠할 때는 대상과의 거리와 위치를 감안해 화면에서 입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중략)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어떤 방식과 배열이 가장 아름다울지 무엇보다 세심하게 고려해야 한다.”

알베르티는 <회화론>을 통해 르네상스 시대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정립한 선원근법과 투시도법 이론을 체계화하고 미학적 기준을 세웠다는 업적을 남겼다. 시각 현상의 원리를 활용한 선원근법은 3차원의 대상물을 2차원 평면 위에 옮길 때 거리감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는 기법이다. 화면에 소실점(물체의 연장선을 그었을 때 생기는 선과 선이 만나는 점)을 설정하고 거리에 비례해 대상의 크기가 줄어드는 수학적 개념을 적용해 공간감과 입체감, 통일감을 강조해 표현한다.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 길’은 선원근법을 사용해 3차원적 깊이감과 공간감을 구현한 ‘원근법의 교과서‘로 불린다.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 길’은 선원근법을 사용해 3차원적 깊이감과 공간감을 구현한 ‘원근법의 교과서‘로 불린다.
선원근법은 르네상스 미술의 가장 중요한 발견이었다. 원근법을 활용하면 평면적 한계를 극복하고 3차원 공간에 실제로 대상물이 있는 것처럼 그릴 수 있었다. 2차원 화폭에 3차원적 환영을 표현하는 수단인 원근법의 원리는 미술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르네상스 이후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양미술의 근간이 됐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마인데르트 호베마의 대표작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길’(1689)은 선원근법을 사용해 3차원적 깊이감과 공간감을 구현한 걸작으로 ‘원근법의 교과서’로 불린다.

그림의 배경은 네덜란드 남부 마스강 인근 섬에 있는 해안마을 미델하르니스. 가로수 길을 중심으로 화면 오른편에서는 농부가 밭에서 묘목을 손질하고, 그 위쪽 농가에서 두 남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멀리 지평선 위에는 그 지역의 특색을 갖춘 집들과 둥근 첨탑의 교회, 농가 뒤편으로 배의 돛대와 삼각대를 지지하는 표지가 보인다.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품인 이 그림은 한적한 시골마을의 가로수 길과 농가 풍경을 그린 소박한 풍경화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림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기하학적 원리가 숨겨져 있다.

예를 들자면 마차 수레바퀴가 지나간 흔적이 선명한 흙길 양쪽에는 키가 큰 가로수들이 줄지어 서 있다. 오리나무들의 높이는 똑같은 데도 가까이 있는 나무는 크게, 멀리 있는 나무는 작게 보이도록 수학적 비례에 따라 정확하게 배치됐다. 선원근법을 적용한 결과 가로수길이 점점 좁아져 아스라이 멀리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이 나타난다.

대조되는 두 요소인 수직으로 길게 뻗은 가로수와 수평인 드넓은 들판의 지평선이 만나도록 소실점을 설정했다. 감상자의 시선을 화면 중앙으로 집중시켜 거리감과 공간의 깊이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다. 도로 양쪽의 물도랑과 키가 큰 나무들의 꼭대기, 가로수의 밑동을 연결하는 선들이 소실점을 향해 모이게 한 기법으로 감상자의 시선이 가로수길로 깊숙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놀라운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길고 가는 키 큰 나무들을 선택하고 X자 형태의 구도를 취한 의도가 무엇인지도 살펴보자. 가로수는 언뜻 하늘을 가로막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구름이 떠다니는 광대한 하늘과 드넓은 땅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한다. 하늘이 화면의 3분의 2 정도 할애됐고 지평선 위치는 3분의 1지점을 차지한 것에 주목하라. 나무들의 꼭대기를 연결하면 감상하는 사람의 시점이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각도가 형성된다. 즉 광대한 하늘과 낮은 지평선을 대비시켜 지대가 낮고 평평한 네덜란드의 지형적 특징을 드러냈다는 뜻이다.

소실점 부근에서는 총을 어깨에 메고 사냥용 가방을 든 사냥꾼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개와 함께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장면을 연출했다. 아스라이 먼 거리감을 강조하는 동시에 감상자가 길에서 사냥꾼을 만날 것 같은 심리적 효과를 계산한 것이다.

선원근법을 독창적으로 구현한 이 풍경화에 학자들의 찬사가 이어졌다. 네덜란드 미술사학자인 코르넬리스 홉스테드 데 흐로트는 “네덜란드에서 그려진 작품 중 렘브란트의 ‘직물조합 이사회’ 다음으로 가장 훌륭한 그림”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의 미술사학자 세이무어 슬라이브는 “17세기 네덜란드 위대한 풍경화 시대의 백조의 노래”라고 극찬했다.

가로수길로 빨려드는 시선…화폭에 구현한 '원근법의 교과서'
인상주의 화가 시슬리와 피사로, 후기 인상주의 화가 반 고흐, 생존 작가 중 가장 작품값이 비싼 예술가인 데이비드 호크니를 포함한 많은 예술가에게도 영감을 줬다. 영국 소설가 토머스 하디는 이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소설 <캐스터브리지의 시장> 도입부에 주인공 마이클 헨처드 부부가 한적한 시골길을 걸어가는 장면을 묘사했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