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픽사 좀 살려줘"…잡스가 매달린 이 남자
“저는 스티브 잡스라고 합니다.”

[책마을] "픽사 좀 살려줘"…잡스가 매달린 이 남자
1994년 11월 어느 날 디지털 인쇄 기술 기업인 일렉트로닉스 포 이미징에서 최고재무책임자(CFO)를 맡고 있던 로렌스 레비(사진)에게 스티브 잡스가 전화를 걸어 왔다. 픽사라는 회사의 CFO를 맡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1985년 애플에서 쫓겨난 스티브 잡스는 그해 새로운 컴퓨터 회사 넥스트를 세웠다. 이듬해엔 500만달러를 내고 루카스필름으로부터 픽사를 사들였다.

미국에서 2016년 출간됐고, 최근 국내에 번역된 <픽사, 위대한 도약>은 1995년부터 1999년까지 5년 동안 픽사 CFO로, 2006년까지 픽사 이사회 멤버로 활동했던 레비의 회고록이다. 픽사에 관한 책은 많다. 월터 아이작슨이 쓴 <스티브 잡스>, 픽사 공동창업자인 에드 캣멀이 쓴 <창의성을 지휘하라> 같은 유명한 책들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픽사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가 남아있을까’하는 의구심을 간단히 깨부순다. 명목상 최고경영자(CEO)였던 잡스를 대신해 픽사의 살림을 도맡았던 레비는 기업 경영의 관점에서 픽사의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잡스의 전화를 받은 레비는 망설였다. 잡스는 개인용 컴퓨터 혁명을 주도한 불세출의 천재였지만, 변덕스러운 독재자로 악명도 높았다. 게다가 픽사란 회사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잡스를 대면한 레비는 그의 인간적 매력과 비전, 그리고 픽사를 둘러보며 느꼈던 흥분에 이끌려 CFO를 맡기로 수락한다.

[책마을] "픽사 좀 살려줘"…잡스가 매달린 이 남자
1995년 2월 첫 출근을 하고 며칠을 지낸 레비는 이렇게 회상했다. “픽사의 누구도 나와 가깝게 지내려 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알고 보니 픽사 사람들은 잡스를 싫어했다. 레비 역시 ‘잡스의 사람’이라 여겨 거리를 둔 것이었다. 잡스에게 픽사는 골칫거리였다. 픽사의 기술이 마음에 들어 인수했지만, 생각보다 사업성이 없었다. 회사 운영비는 잡스의 개인 돈으로 충당되고 있었다. 픽사 사람들은 자신들이 제대로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잘 안되는 조직은 무작정 일을 벌여 놓는다. 어떻게 하다 보면 그중 하나가 잘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기 때문이다. 픽사도 그랬다. ‘렌더맨’이란 컴퓨터 그래픽 소프트웨어를 팔았다. 애니메이션으로 광고를 만들어주는 사업도 했다. 레비가 보기에 실익이 없었다. 렌더맨의 판매가는 약 3000달러였지만 이를 사주는 스튜디오는 50여 곳에 불과했다. 렌더맨을 판매하고 고객을 지원하는 데 픽사의 자원을 쓰는 건 낭비였다.

광고 역시 30초짜리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데 3~4명이 3개월은 매달려야 했다. 그런데도 비용을 제하면 이익은 미미했다. 견적이 잘못되거나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면 오히려 손해를 봤다. 단편 영화 사업도 작품에 대한 평가는 좋았지만 돈이 안 됐다. 남은 길은 오직 장편 영화였다. 흥행에 따라 회사의 존망이 결정되는 위험한 길이었지만, 픽사는 그렇게 첫 번째 장편 ‘토이 스토리’에 모든 것을 걸기로 한다.

픽사는 1991년 9월 디즈니와 계약을 맺고 토이 스토리를 제작하고 있었다. 계약에 따라 픽사가 가져갈 수익은 영화 매출의 10%도 되지 않았다. 영화 3개는 무조건 디즈니를 통해서만 배급할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은 제작 기간이 길기 때문에 2004년은 돼야 종속에서 풀려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노예 계약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당시 픽사는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인 회사였다. 잡스는 직원들에게 스톡옵션을 주기 싫다고 버텼고, 기업공개(IPO)를 시도할 땐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가 주관사를 맡기를 꺼렸다. 디즈니와의 재협상도 시급했다. 젊은 CFO의 고군분투기인 이 책은 기업 경영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를 담았다.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도 흥미로울 이야기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