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성인남녀 절반 이상이 '세컨드 잡'을 꿈꾸는 시대입니다. 많은 이들이 '부캐(부캐릭터)'를 희망하며 자기 계발에 열중하고 새로운 미래를 꿈꿉니다. 이럴 때 먼저 도전에 나선 이들의 경험담은 좋은 정보가 되곤 합니다. 본캐(본 캐릭터)와 부캐 두 마리 토끼를 잡았거나 본캐에서 벗어나 부캐로 변신에 성공한 스타들의 잡다(JOB多)한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편집자주>
아나운서 출신 손미나가 지난해 약 42일간의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마쳤다. /사진=우쥬록스 제공
아나운서 출신 손미나가 지난해 약 42일간의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마쳤다. /사진=우쥬록스 제공
"엄청난 경험을 하고 왔어요. 죽을 때까지 한 번쯤은 해볼 법한 체험이죠. 발이 잔뜩 부어서 원래 신던 신발에 들어가기까지 한 달이 걸렸고, 머리나 피부도 전부 탔어요. 몸은 힘들지만 내면의 힐링을 받았습니다. 그 전과 후 제 삶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근황을 묻자 손미나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회상하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해 봄 그녀는 짐을 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많은 이들이 부침을 겪던 시기였다. 당시 손미나 역시 강한 감정의 동요를 느꼈다고 한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멀리해야 하는 게 현실이었잖아요. 그런 걸 보면서 인간은 혼자 살 수 없고, 연결되어 있는 동물이라는 걸 절실히 느꼈어요. 모든 걸 떠나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했고요. 늘 산티아고 순례길은 '지금이다!'라는 때가 오면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딱 그때였죠."

3~4개월의 준비 기간을 거쳐 총 42일 동안 800km를 걸었다고 했다. 걷고 또 걷는 고행 끝에 얻는 숭고한 가치.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마주치며 결과적으로 '진정한 나'를 찾게 되는 과정이 바로 전 세계인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르는 이유일 테다. 손미나는 '이 길을 걷기 전과 후의 내가 같을 수 없다'고 표현했다.

그는 "사람들이 많은 걸 밖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냐. 근데 그것들은 이미 다 내가 가진 거라는 걸 깨닫게 됐다. 동시에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하는 것 또한 없다는 걸 알게 됐다"면서 "마지막 3km 정도 남았을 땐 가기 싫고 슬프더라. 걷는 것에 대한 매력을 크게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연이 주는 힐링의 힘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아나운서 그만둔지 16년…'손미나'의 3번째 직업은 [본캐부캐]
'도전 골든벨', '가족 오락관'에 9시 뉴스까지 남부러울 것 없던 삶을 살았던 손미나였다. 하지만 화려함으로 대변되던 과거와 달리, 화장기 없는 얼굴에 머리를 하나로 대충 질끈 묶고 운동복 차림으로 나타나 "요즘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닌다"며 미소 지었다.

KBS에 사표를 던지고 나온 지 벌써 16년이 흘렀다. 당시 탄탄대로를 걷던 그의 선택을 많은 이들이 만류했다. 하지만 손미나는 "갑자기 그만둔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일을 열심히, 그리고 할 만큼 많이 했다는 생각이었다.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정말 좋아했지만 유리천장도 존재했고, 방송국 시스템 안에서 크리에이션할 수 없었다. 마이크 앞에만 있는 게 답답했다"고 털어놨다.

이어 "세상이 변하는 게 보였다. 흐르는 물이 아닌 수족관에 있는 물고기가 발전할 수 있을까 싶더라"면서 "난 무대가 화려하든 초라하든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그걸 믿고 회사를 나왔다. 정말 좋아하는 일(글쓰기)에 승부를 걸어보기로 한 거다. 퇴사를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며 웃었다.

퇴사 직전 1년간의 스페인 유학 경험을 담은 책 '스페인 너는 자유다'를 펴내 40만부 이상을 팔았다. 당시 판매량이 좋지 않았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냐는 물음에 손미나는 "조금 더 두려웠을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했을 것 같다"고 답했다. 그는 "책의 성공이 도화선이 된 건 맞지만 이미 넓은 세상을 보고 온 상태였다. 회사가 거북이의 등과 같아서 없이는 못 살 것 같았는데 유학 가서 보니 아니었다. 나 자체로 괜찮고 멀쩡했다. 생각이 바뀌어서 왔기 때문에 그대로 갇혀 있기엔 답답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회사를 나온 뒤 손미나는 파리 3년을 포함해 해외에서 6~7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렇게 '여행작가'라는 직업을 새로 얻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로는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알랭 드 보통이 세운 '인생학교' 교장, 손미나앤컴퍼니 대표, 강연자 등으로 바쁘게 살았다. 번아웃이 올 때면 과감하게 쉼표를 찍기도 했다. 역경과 성장, 경험의 과정을 글로 옮기니 어느덧 14권의 책이 쌓였다.

손미나는 "글 쓰는 일은 자기 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정말 좋은 직업"이라면서 "독자가 시청자만큼 많지 않아도 한 명 한 명과 깊이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고, 그들의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독자에게 받는 피드백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이고 보람차다"고 전했다.
아나운서 그만둔지 16년…'손미나'의 3번째 직업은 [본캐부캐]
그런 그가 이번에는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에 도전한다. 29일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담은 영화 '엘 카미노' 개봉을 앞두고 있다. 손미나는 "부의 축적보다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자연을 걷고, 전 세계인을 만날 수 있고, 스페인어 전공자인 내 특기도 살리고, 재능을 나눌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어봤다"고 밝혔다.

아나운서 시절 손미나는 담배 냄새가 자욱한 지하 편집실을 들락거리곤 했다. 그때부터 차곡차곡 쌓은 경험은 자산이 됐다.

"1년 차 때부터 녹화 끝나고 그냥 집에 가질 않았어요. 방송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관심이 많았고 그 생리를 잘 알아야 발전하고 좋은 진행자가 될 거라 생각했죠. 막내 PD가 편집하는 걸 보면서 이해하려고 하니 정말 진행도 더 잘 되더라고요."

이후 스페인 유학 시절 바르셀로나대학교 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 과정을 밟으며 습득한 실무 경험,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으로 일하며 배운 뉴미디어 크리에이션 등이 큰 도움이 됐다.

손미나는 "이제는 엄청난 규모의 조명과 카메라, 스튜디오가 있어야만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휴대전화 하나만으로도 복잡한 과정 없이 효과적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며 미디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신기술을 배워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게 좋다. 아나운서로 10년간 방송을 했고, 이후 10년 넘게 글을 썼다. 이제는 크리에이터로서의 10년을 보내지 않을까 싶다"고 전했다.

민간 외교관 역할도 지속할 예정이다.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르 클레지오가 강연자로 나선 세종학당 파리 개원 기념식에서 모더레이터를 맡았고,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에서도 약 30여개의 식당에 한국어 메뉴 QR을 부착했다. 주요 관광지에 한국어 서비스를 위한 목소리 재능기부도 이어나갈 계획이다.

최근 스페인 국가 훈장인 시민십자훈장을 받은 손미나는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할 때 부모님께서 '남보다 더 빛나는 활동을 할 수 있을 거다'라고 말씀하셨지만 국왕에게 훈장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가문의 영광"이라면서 "앞으로 (재능을 활용한 일을) 더 열심히 잘하고 싶은 의지가 생겼다. 이걸 많은 방법으로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아나운서 그만둔지 16년…'손미나'의 3번째 직업은 [본캐부캐]
여전히 그녀는 삶을 여행하고 있었다. 4월 첫째 주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담은 책 '괜찮아, 그 길 끝에 행복이 기다릴 거야'를 발간한 후, 중순부터는 스페인의 섬 이비자, 프로멘테라에서 한 달 살기에 돌입한다. 이를 시작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한 달 살기에 도전할 계획이라고 했다. 요즘엔 북유럽의 매력에 푹 빠져있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이 또 어떤 손미나 표 콘텐츠로 재탄생하게 될지 기대된다.

"다들 제게 직업이 뭐냐고 물어봐요. 장황하게 설명하게 되더라고요. 누군가 전단지 같다면서 명함을 파지 말라고도 했어요.(웃음) 글쎄요… 꼭 규정지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전 사실 그래서 더 좋은 것 같아요."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