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아 둘 딸린 헤픈 이혼녀를"…'공공의 적' 된 男 결국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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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출신 화가 제임스 티소
39세에 만난 '인생의 사랑'
그의 아름다운 사랑과 작품
39세에 만난 '인생의 사랑'
그의 아름다운 사랑과 작품
1878년 영국 런던의 한 무도회장. 떠들썩하게 웃고 떠드는 사교계 사람들 사이, 오직 한 남자만 엉거주춤하게 홀로 서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들으라는 듯 수군댑니다. “이혼녀에게 홀딱 반했다지? 그것도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애가 둘이나 딸린.” “가만히라도 있을 것이지, 뻔뻔하게 그 여자를 모델로 그림까지 그려? 그것도 그렇게 요조숙녀처럼. 내가 다 부끄럽네. 쯧쯧쯧….”
그러던 중 한 신사가 남자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넵니다. 반가움도 잠시뿐. “저기, 미안하지만…. 다음 모임부터는 나오지 말아 줬으면 하네. 그리고 나도 자네에게 실망했네.” 이런 치욕과 수모, 보통 사람이라면 견디기 힘들겠지요. 그런데도 집에 돌아가는 남자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뭐래도 그는 여인을 사랑했고,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그녀를 이제 곧 볼 수 있거든요.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향하는 이 ‘사랑꾼’. 화가 제임스 티소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와 아름다운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17살이 되던 해, 티소는 부모님께 “화가가 될 거니 그림 공부를 시켜 달라”고 말을 꺼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 입에서 “예술 하겠다”는 소리가 나오면 부모 가슴은 덜컥 내려앉는 법. “그림 공부 따위 시간 낭비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마라!”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 역시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20세의 나이로 티소는 파리로 그림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파리 살롱과 런던의 왕립예술원 등 주요 전시장에 그림을 선보이면서 그럭저럭 괜찮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저 그런 화가’에서 ‘스타’가 된 건 1863년, 티소가 여성의 초상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사실 초상화야말로 그의 적성에 딱 맞는 일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패션 센스 덕분에 얼굴은 물론 각종 장식과 옷 주름까지 섬세하고 스타일리시하게 그릴 수 있었거든요. 돈이 별로 안 되는 ‘순수예술’과 달리 초상화는 수입도 짭짤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사업 감각도 한몫을 해서, 그는 곧 가장 인기 있는 초상화가 중 한 명으로 떠오릅니다. 잘 나가던 그의 커리어는 파리 미술시장이 무너지면서 위기를 겪습니다. 프로이센과의 전쟁, 혁명 등으로 인해 도시가 극심한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티소는 영국 런던으로 향합니다. 1871년 6월 거의 무일푼으로 런던에 도착한 티소는 잡지 삽화 등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실력이 워낙 출중했던지라 런던 사람들은 티소를 금방 알아봤습니다. 곧이어 그는 런던 최고의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리게 됐고,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벌어서 런던 시내 금싸라기 땅에 큰 집을 샀습니다. 적지 않은 평론가들과 동료 화가들은 그가 지나치게 상업적이라며 비판했습니다. 그중 상당수가 질투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티소의 인기가 끝없이 치솟으면서, 이런 악평도 점점 사라져 갔습니다.
기나긴 항해 도중 캐슬린은 한 남자와 뜨거운 사랑에 빠졌습니다. 미래의 남편을 생각하면 용서받지 못할 일. 하지만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던 그녀에겐 이성보다 감정이 앞섰습니다. 남편 될 사람의 얼굴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죄책감도 덜어졌습니다. 어찌어찌 도착한 인도에서 결혼식까지 올렸지만, 누군가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캐슬린은 남편에게 진실을 고백했습니다. 바로 이혼 절차가 시작돼 이듬해 이혼이 확정됐습니다. 그리고 캐슬린은 언니 집에 얹혀살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런 과거 따위는 티소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혼했든 애가 딸렸든, 티소는 지금의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둘은 1876년부터 같이 살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결혼은 하지 못했습니다. 티소가 이혼과 재혼을 사실상 금지하는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보는 세상의 시선은 곱지 않았습니다. 캐슬린은 물론이고 티소도 당시 영국 사회에서는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캐슬린은 혼외자를 둘이나 낳은 헤픈 여자. 미혼인 티소가 그런 여자와 공개적으로 ‘연애질’을 하고 동거까지 하는 데다, 뻔뻔하게도 그녀를 모델로 그림을 그려 공개적으로 전시했고, 더군다나 그녀를 그토록 우아하게 묘사했습니다. 이건 당시 사람들에게 불륜보다 더 끔찍한 죄악이었습니다. 그래서 티소는 사교계에서 ‘왕따’가 됐고, 사업적으로도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티소는 캐슬린을 사랑했습니다. 캐슬린의 아이들도 티소의 집을 자유롭게 드나들었습니다. 캐슬린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녀를 그릴 수만 있다면 티소는 더 바랄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길지 않았습니다. 캐슬린이 당시로서는 불치병이었던 폐결핵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1882년 캐슬린은 불과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둘이 함께한 시간은 고작 6년.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받더라도 반드시 지키고 싶었던 단 하나의 사랑이 그렇게 허무하게 티소를 떠나갔습니다. 그녀와 함께 걸었던 길, 점심을 먹었던 정원, 추억이 가득한 집 모두가 이제는 그를 견딜 수 없이 괴롭게 했습니다. 캐슬린이 죽은 지 일주일이 지난 후, 티소는 집과 그림 도구, 미완성 작품을 남겨두고 고국인 프랑스로 훌쩍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런던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1880년대 말부터 그는 종교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성경을 소재로 한 그림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그는 인간사 따위엔 관심 없다는 듯 쭉 종교화만 그렸습니다. 그러다 1902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는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떠난 뒤 티소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잊혔습니다. 그림을 무척 잘 그렸습니다만, ‘이래서 이 작가가 중요하다’고 강조하기는 여러 모로 애매했기 때문입니다. 전통을 계승하는 예술가로 보기에는 대중적인 성격이 강했던 반면, 인상주의 등 새로운 사조에 동참한 것도 아니고, 고전적 스타일을 쭉 고수해서 시대별로 구분하기도 어려웠거든요. 다행히도 1980년대 이후 작품의 높은 완성도, 생활·패션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재조명되면서 다시 티소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티소를 연구한 학자들은 그가 죽는 날까지 캐슬린을 간절히 그리워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 작품은 캐슬린이 살아있을 때 그리기 시작해 그녀가 세상을 떠난 이후 완성된 작품입니다. 그림 속 건강한 시절의 캐슬린은 아름다운 정원에서 두 아이, 조카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찰나처럼 짧게 느껴졌던 6년간의 행복, 그리고 비극적인 결말. 그 모든 걸 몇번이고 다시 머릿속에서 떠올리며 티소는 끝없이 눈물을 흘렸을 겁니다.
작품을 완성한 티소. 20년간 늘 이 그림을 곁에 두고 캐슬린을 추억했습니다. 전시에는 몇 번 내놨지만, 결코 팔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인생 66년을 통틀어 진정으로 행복했던 시기는 오직 캐슬린과 함께 한 6년뿐이었을 것입니다. 이후 티소는 20년을 슬퍼하며 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는 후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은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로 영원히 남았습니다.
따져보면, 우리의 인생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6년보다 길든 짧든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모두 시간이 흐르면 내 곁을 떠나갑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시인 G.K. 체스터턴의 싯구를 떠올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건 쉽다. 그것이 사라질 때를 상상할 수 있다면.”
꽃 피는 봄날입니다. 모처럼 사랑하는 이들과 나들이를 나서보는 건 어떨까요. 우리에겐 티소만한 그림 실력이 없지만 스마트폰 카메라가 있잖아요. 예쁜 사진들도 찍을 수 있겠지요. 아름다운 추억과 작품으로, 언제까지나 남을 겁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번 기사에 포함된 정보는 영문 서적 Tissot(Christopher Wood, 1986), The Hammock(Lucy Paquette)을 참조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신사가 남자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넵니다. 반가움도 잠시뿐. “저기, 미안하지만…. 다음 모임부터는 나오지 말아 줬으면 하네. 그리고 나도 자네에게 실망했네.” 이런 치욕과 수모, 보통 사람이라면 견디기 힘들겠지요. 그런데도 집에 돌아가는 남자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뭐래도 그는 여인을 사랑했고,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그녀를 이제 곧 볼 수 있거든요.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향하는 이 ‘사랑꾼’. 화가 제임스 티소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와 아름다운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잘나가는 ‘런던의 파리지앵’
티소는 1836년 프랑스의 항구도시 낭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옷감을 거래하는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모자를 디자인했습니다. 장사는 꽤 잘 됐습니다. 티소는 아버지의 사업 감각과 어머니의 패션 감각을 모두 물려받았습니다.17살이 되던 해, 티소는 부모님께 “화가가 될 거니 그림 공부를 시켜 달라”고 말을 꺼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 입에서 “예술 하겠다”는 소리가 나오면 부모 가슴은 덜컥 내려앉는 법. “그림 공부 따위 시간 낭비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마라!”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 역시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20세의 나이로 티소는 파리로 그림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파리 살롱과 런던의 왕립예술원 등 주요 전시장에 그림을 선보이면서 그럭저럭 괜찮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저 그런 화가’에서 ‘스타’가 된 건 1863년, 티소가 여성의 초상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사실 초상화야말로 그의 적성에 딱 맞는 일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패션 센스 덕분에 얼굴은 물론 각종 장식과 옷 주름까지 섬세하고 스타일리시하게 그릴 수 있었거든요. 돈이 별로 안 되는 ‘순수예술’과 달리 초상화는 수입도 짭짤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사업 감각도 한몫을 해서, 그는 곧 가장 인기 있는 초상화가 중 한 명으로 떠오릅니다. 잘 나가던 그의 커리어는 파리 미술시장이 무너지면서 위기를 겪습니다. 프로이센과의 전쟁, 혁명 등으로 인해 도시가 극심한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티소는 영국 런던으로 향합니다. 1871년 6월 거의 무일푼으로 런던에 도착한 티소는 잡지 삽화 등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실력이 워낙 출중했던지라 런던 사람들은 티소를 금방 알아봤습니다. 곧이어 그는 런던 최고의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리게 됐고,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벌어서 런던 시내 금싸라기 땅에 큰 집을 샀습니다. 적지 않은 평론가들과 동료 화가들은 그가 지나치게 상업적이라며 비판했습니다. 그중 상당수가 질투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티소의 인기가 끝없이 치솟으면서, 이런 악평도 점점 사라져 갔습니다.
모든 걸 버리고 택한 그녀
상업적 성공을 이어가던 그는 39세가 되던 1875년 ‘운명의 여인’ 캐슬린 뉴턴(캐슬린)을 만났습니다. 둘은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푹 빠졌습니다. 캐슬린의 나이가 21살에 불과하다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진짜 문제는 캐슬린이 이혼녀인데다, 아빠가 누구인지 모르는 애가 둘이나 딸려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캐슬린에게도 나름의 사연이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4년 전(18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인도(영국 동인도회사)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다 현지에서 영국 출신의 괜찮은 외과 의사를 만나게 됐고, 사윗감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아일랜드에서 수도원 학교를 갓 졸업한 17세의 캐슬린을 인도로 불러들였습니다. “결혼 상대가 정해졌으니 알아서 배 타고 잘 오렴.” 엄격한 생활에서 처음으로 해방된 예쁜 사춘기 소녀가, 보호자도 없이 남자가 득실거리는 배에 홀로 올라탄 겁니다.기나긴 항해 도중 캐슬린은 한 남자와 뜨거운 사랑에 빠졌습니다. 미래의 남편을 생각하면 용서받지 못할 일. 하지만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던 그녀에겐 이성보다 감정이 앞섰습니다. 남편 될 사람의 얼굴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죄책감도 덜어졌습니다. 어찌어찌 도착한 인도에서 결혼식까지 올렸지만, 누군가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캐슬린은 남편에게 진실을 고백했습니다. 바로 이혼 절차가 시작돼 이듬해 이혼이 확정됐습니다. 그리고 캐슬린은 언니 집에 얹혀살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런 과거 따위는 티소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혼했든 애가 딸렸든, 티소는 지금의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둘은 1876년부터 같이 살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결혼은 하지 못했습니다. 티소가 이혼과 재혼을 사실상 금지하는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보는 세상의 시선은 곱지 않았습니다. 캐슬린은 물론이고 티소도 당시 영국 사회에서는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캐슬린은 혼외자를 둘이나 낳은 헤픈 여자. 미혼인 티소가 그런 여자와 공개적으로 ‘연애질’을 하고 동거까지 하는 데다, 뻔뻔하게도 그녀를 모델로 그림을 그려 공개적으로 전시했고, 더군다나 그녀를 그토록 우아하게 묘사했습니다. 이건 당시 사람들에게 불륜보다 더 끔찍한 죄악이었습니다. 그래서 티소는 사교계에서 ‘왕따’가 됐고, 사업적으로도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티소는 캐슬린을 사랑했습니다. 캐슬린의 아이들도 티소의 집을 자유롭게 드나들었습니다. 캐슬린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녀를 그릴 수만 있다면 티소는 더 바랄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길지 않았습니다. 캐슬린이 당시로서는 불치병이었던 폐결핵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1882년 캐슬린은 불과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둘이 함께한 시간은 고작 6년.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받더라도 반드시 지키고 싶었던 단 하나의 사랑이 그렇게 허무하게 티소를 떠나갔습니다. 그녀와 함께 걸었던 길, 점심을 먹었던 정원, 추억이 가득한 집 모두가 이제는 그를 견딜 수 없이 괴롭게 했습니다. 캐슬린이 죽은 지 일주일이 지난 후, 티소는 집과 그림 도구, 미완성 작품을 남겨두고 고국인 프랑스로 훌쩍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런던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슬픔, 그리고 20년
그래도 삶은 계속돼야 합니다. 파리로 돌아간 티소는 다시 작품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에겐 ‘영국적’이란 수식어가 조롱처럼 따라다녔습니다. 프랑스 평론가들은 자신의 나라를 떠나 라이벌 국가에서 명성을 떨쳤던 티소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한 비평가는 말했습니다. “런던의 파리지앵이 이제 파리의 런더너가 됐구먼.” 파리로 돌아온 티소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이 됐단 사실을 잘 보여주는 글입니다. 그런데도 티소는 작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캐슬린을 잃은 슬픔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얼마나 그리움이 컸던지 티소는 그녀의 영혼을 불러내 준다는 심령술사들을 만나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사기죄로 감옥까지 갔는데도, 티소는 캐슬린의 영혼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그러던 중 1880년대 말부터 그는 종교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성경을 소재로 한 그림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그는 인간사 따위엔 관심 없다는 듯 쭉 종교화만 그렸습니다. 그러다 1902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는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떠난 뒤 티소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잊혔습니다. 그림을 무척 잘 그렸습니다만, ‘이래서 이 작가가 중요하다’고 강조하기는 여러 모로 애매했기 때문입니다. 전통을 계승하는 예술가로 보기에는 대중적인 성격이 강했던 반면, 인상주의 등 새로운 사조에 동참한 것도 아니고, 고전적 스타일을 쭉 고수해서 시대별로 구분하기도 어려웠거든요. 다행히도 1980년대 이후 작품의 높은 완성도, 생활·패션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재조명되면서 다시 티소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티소를 연구한 학자들은 그가 죽는 날까지 캐슬린을 간절히 그리워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 작품은 캐슬린이 살아있을 때 그리기 시작해 그녀가 세상을 떠난 이후 완성된 작품입니다. 그림 속 건강한 시절의 캐슬린은 아름다운 정원에서 두 아이, 조카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찰나처럼 짧게 느껴졌던 6년간의 행복, 그리고 비극적인 결말. 그 모든 걸 몇번이고 다시 머릿속에서 떠올리며 티소는 끝없이 눈물을 흘렸을 겁니다.
작품을 완성한 티소. 20년간 늘 이 그림을 곁에 두고 캐슬린을 추억했습니다. 전시에는 몇 번 내놨지만, 결코 팔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인생 66년을 통틀어 진정으로 행복했던 시기는 오직 캐슬린과 함께 한 6년뿐이었을 것입니다. 이후 티소는 20년을 슬퍼하며 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는 후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은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로 영원히 남았습니다.
따져보면, 우리의 인생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6년보다 길든 짧든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모두 시간이 흐르면 내 곁을 떠나갑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시인 G.K. 체스터턴의 싯구를 떠올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건 쉽다. 그것이 사라질 때를 상상할 수 있다면.”
꽃 피는 봄날입니다. 모처럼 사랑하는 이들과 나들이를 나서보는 건 어떨까요. 우리에겐 티소만한 그림 실력이 없지만 스마트폰 카메라가 있잖아요. 예쁜 사진들도 찍을 수 있겠지요. 아름다운 추억과 작품으로, 언제까지나 남을 겁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번 기사에 포함된 정보는 영문 서적 Tissot(Christopher Wood, 1986), The Hammock(Lucy Paquette)을 참조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