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화가 존경"…고흐도 추앙한 노인 정체 알고보니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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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유명한 동양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
서양 인상주의 화가·작곡가들에 큰 영향
19세기 대량 생산 판화로 큰 인기
'만화'란 단어 처음으로 쓰기도
서양 인상주의 화가·작곡가들에 큰 영향
19세기 대량 생산 판화로 큰 인기
'만화'란 단어 처음으로 쓰기도
오늘 이야기는 빈센트 반 고흐의 이 그림으로 시작해 볼까요. 작품의 제목은 ‘탕기 영감의 초상’(1887). 탕기 영감은 프랑스 파리에서 물감과 캔버스 등을 파는 화방을 운영하며 고흐처럼 ‘안 팔리는 화가’들을 도와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물 뒤의 배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미지들이 눈에 띄지요. 일본풍이 진한 판화(우키요에)들이 걸려있는데요. 당시 고흐를 비롯한 파리 미술계 화가들은 일본 그림에 푹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은인의 초상화 뒤에도 그려 넣을 정도로요.
일본 화가 중에서도 고흐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던 인물이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입니다. 고흐가 1888년 9월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호쿠사이의 작품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에 어떤 찬사를 보냈는지 한번 살펴보시지요. “…이 파도는 발톱이고, 배는 그 발톱에 잡힌 거야. 호쿠사이의 그림을 보면 누구나 저절로 느낄 수 있지. (서양화가들이 그리듯이) 모양과 색을 정확하게만 그리면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없어.”
세계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역대 최고의 일본 화가. ‘만화’라는 단어를 처음 쓴 사람이자 과거 1000년 새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에 꼽힌 유일한 일본인(라이프지, 1998년). 자신을 ‘그림에 미친 노인’이라 부르며 평생 3만점 이상의 작품을 그렸고, 한편으로는 기행을 일삼았던 괴짜.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호쿠사이의 삶과 작품을 풀어 봤습니다.
아무튼 이 도쿠가와 가문이 일본을 실질 통치한 1603~1868년을 ‘에도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시기 일본은 급격한 상업화를 겪었습니다. 도자기와 판화, 각종 귀금속을 유럽에 수출하고 네덜란드 등지에서 새로운 문화를 들여온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도시에는 사람이 몰렸고, 문화가 꽃을 피웠습니다. 중산층들은 극장에도 가고(가부키) 스포츠 경기도 보고(스모) 레저도 즐겼습니다(뱃놀이). 이때 에도의 인구는 무려 100만명에 달했습니다. 문화가 발전하면서 그림에 대한 수요도 급증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판화를 자주 사 봤습니다. 주제는 주로 유명 배우나 스포츠 선수, 풍경화였는데요.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의 화보, 집이나 상점에 붙이는 포스터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지요. 가격도 국수 한 그릇 정도라서 큰 부담이 없었습니다. 호쿠사이 같은 전업 화가가 여럿 등장할 수 있었던 건 이 덕분이었습니다.
1760년 에도의 장인 가문에서 태어난 호쿠사이는 6살 때부터 화가의 재능을 보였습니다. 덕분에 19살 때 에도시대 중기를 대표하는 화가 가쓰카와 순쇼(1726~1793)의 제자로 들어갈 수 있었고요. 이때부터 가부키 배우(지금으로 치면 뮤지컬이나 드라마 배우) 등의 초상화를 그렸고, 상인에게 벽보를 그려주며 명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호쿠사이는 다른 유파는 물론이고 중국 등 외국의 그림 그리는 방식까지 가리지 않고 흡수했습니다. “스승에게 배운 근본을 지키지 않는다”면서 파문당했지만 상관없었습니다. 그에겐 ‘더 잘 그리는 것’만이 중요했거든요.
실력과 스타성을 겸비한 호쿠사이는 금세 유명해졌습니다. 1817년 축제에서 붓 대신 빗자루를 써서 길이 100m에 달하는 달마도를 그리는 등 ‘끼’를 뽐내기도 했고요. 같은 해 인기 소설가였던 쿄쿠테이 바킨과 함께 같이 책을 내면서 명성은 계속 높아져만 갔습니다. 다만 소설가가 시키는 대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그려서 서로 엄청나게 싸웠다고 합니다. 결국 둘은 출판사에 달려가 묻습니다. “우리 둘 중에 누구랑 일할지 한명만 빨리 고르시오.” 출판사가 택한 건 호쿠사이였습니다. 자연스럽게 그의 집에는 “제자로 받아달라”는 후배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내 그림 그릴 시간도 없는데…. 옳지, 이러면 되겠다.” 그는 만화적 표현을 가미한 일종의 그림 교과서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총 15편 출판된 이 시리즈에는 재미있는 그림이 아주 많아서, 그림 그리는 사람은 물론이고 일반인들에게까지 불티나게 팔려나갔습니다. 시리즈 제목은 ‘호쿠사이 만화’. 우리가 지금 쓰는 만화라는 말이 이때 생겼습니다. 그림에서는 이렇게 천재적이었지만, 다른 분야에서 호쿠사이는 그야말로 바보였습니다. 제자가 그린 집안 꼴을 한번 보시지요. 그래도 스승이니 실제보다 훨씬 깨끗하게 그려줬을 텐데, 어수선한 기운이 풍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식사는 무조건 배달시켜 먹었다고 하고요. 배달 온 그릇에 대충 먹다가 그대로 방치했다고 합니다. 어쩌다 좋은 생선을 받아도 요리하기 귀찮아서 남에게 그냥 줘 버렸고요. 술과 담배 선물도 마찬가지로 주변에 나눠줬습니다. 다만 과자는 기뻐하면서 받았다고 합니다.
돈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보통 화가들보다 작품값을 비싸게 받았지만, 그림값이 와도 돈 봉투(돈주머니)를 열어서 돈을 세보지도 않았습니다. 책상 밑에 놔뒀다가 음식점에서 배달이 오면 음식값으로 대충 꾸러미째 던져 줬지요. “돈 셀 시간 있으면 그림이나 그려야지!” 덕분에 음식점 주인만 횡재했습니다. 돈이 많으면 그대로 받고, 적으면 더 달라고 하면 됐으니까요. 그래서 호쿠사이는 가난했습니다. 이렇게 호쿠사이는 자신을 똑 닮은 화가 막내딸과 함께 쓰레기 더미에 앉아 매일 그림을 그렸습니다. 피곤하면 잠깐 잤고요. 일어나면 다시 그렸습니다. 청소와 세탁을 안 하니 이불은 이로 들끓었습니다. 학계 일각에서 호쿠사이가 93회나 이사를 했던 이유로 ‘청소가 귀찮아서’를 꼽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지금은 30억원에도 팔리는데, 당시에는 워낙 저렴해서 도자기 포장지 등으로도 쓰였다고 하네요. 서양에 우키요에가 전해진 것도 이런 포장지를 통해서라는 얘기까지 있습니다. 어찌됐든 이 작품들은 서양으로 흘러가 인상주의 화가들을 비롯한 다양한 서양 예술 사조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그는 계속 공부와 그림그리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인물을 그릴 때는 골격을 알아야 한다”면서 접골원을 찾아가 해부학을 연구했고요. 새로운 기법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자연과 사물을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 그림, “저런 모양과 크기의 파도가 어디 있냐”며 비웃는 사람도 있었지만 훗날 해양 연구와 초고속 카메라 촬영을 통해 실제 모양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1834년에는 ‘부악백경’이란 그림책을 냅니다. 책 말미에 쓴 작가 멘트가 걸작입니다. “나는 여섯살 때부터 여러 가지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지금 보니 70살 전에 그린 건 다 변변찮네. 일흔셋인 지금 간신히 온갖 동식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됐지. 그러니 여든 여섯살엔 지금보다 더 잘 그릴 거고, 아흔살, 백 살엔 더더욱 잘 그릴 거야. 시간이 더 흐르면 내가 그린 그림에선 점 하나, 선 하나가 모두 살아 움직이겠지. 장수의 신이여, 나를 오래 살게 해주면 이 말을 증명하겠다. 그림에 환장한 늙은이 씀.” 장수의 신이 호쿠사이의 말을 들어줬던 걸까요? 호쿠사이는 89세까지 살았습니다. 당시 기준으로는 어마어마한 장수였습니다. 하지만 호쿠사이에게는 예술을 하기에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말. “하늘이 내 목숨을 10년 늘려준다면! 아니, 5년만 늘려준다면, 나는 진짜 그림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텐데….” 국적과 분야를 막론하고 인간이 한 분야에 삶을 바쳐 헌신하는 모습은 언제나 감동을 줍니다. 그 중에서도 호쿠사이가 특별한 건, 죽을 때까지 시간을 아껴 가며 공부와 노력을 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호쿠사이가 말년에 위대한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건 그 덕분일 겁니다. 호쿠사이의 삶과 작품이 시공간을 넘어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영감을 주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모여 일생이 된다”(톨스토이)는 말이 있지요. 너무 늦었다는 생각 따위 하지 않고, 그날그날을 충실히 살다 보면 결국 보답을 받는 게 인생이란 생각이 듭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군가를 기억할 때 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곤 하니까요. 막을 내릴 때까지 가장 멋진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지요. 이번 기사에 나온 그의 작품 대부분이 만년의 작품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번 기사의 내용은 <호쿠사이, 그림에 미친 노인>(프랑수아 플라스 지음) <호쿠사이 부악백경>(호쿠사이 지음, 김동근 옮김)을 참조했습니다.
세계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역대 최고의 일본 화가. ‘만화’라는 단어를 처음 쓴 사람이자 과거 1000년 새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에 꼽힌 유일한 일본인(라이프지, 1998년). 자신을 ‘그림에 미친 노인’이라 부르며 평생 3만점 이상의 작품을 그렸고, 한편으로는 기행을 일삼았던 괴짜.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호쿠사이의 삶과 작품을 풀어 봤습니다.
문화 꽃 필 때 나타난 ‘괴짜 천재 화가’
일본 얘기를 하기 전에 우리에게 익숙한 얘기부터 해 보겠습니다. 성웅 이순신 장군이 노량 해전에서 목숨을 바쳐 일본군을 격퇴하고 임진왜란을 끝낸 게 1598년. 이 해, 조선 침략을 주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마침 사망합니다. 그리고 불과 5년 뒤인 1603년 도요토미 가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에 권력을 모두 빼앗깁니다. 도요토미 가문은 임진왜란에 ‘올인’해 역량이 크게 저하됐지만, 도쿠가와는 조선에 병사를 한 명도 보내지 않고 힘을 아꼈거든요.아무튼 이 도쿠가와 가문이 일본을 실질 통치한 1603~1868년을 ‘에도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시기 일본은 급격한 상업화를 겪었습니다. 도자기와 판화, 각종 귀금속을 유럽에 수출하고 네덜란드 등지에서 새로운 문화를 들여온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도시에는 사람이 몰렸고, 문화가 꽃을 피웠습니다. 중산층들은 극장에도 가고(가부키) 스포츠 경기도 보고(스모) 레저도 즐겼습니다(뱃놀이). 이때 에도의 인구는 무려 100만명에 달했습니다. 문화가 발전하면서 그림에 대한 수요도 급증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판화를 자주 사 봤습니다. 주제는 주로 유명 배우나 스포츠 선수, 풍경화였는데요.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의 화보, 집이나 상점에 붙이는 포스터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지요. 가격도 국수 한 그릇 정도라서 큰 부담이 없었습니다. 호쿠사이 같은 전업 화가가 여럿 등장할 수 있었던 건 이 덕분이었습니다.
1760년 에도의 장인 가문에서 태어난 호쿠사이는 6살 때부터 화가의 재능을 보였습니다. 덕분에 19살 때 에도시대 중기를 대표하는 화가 가쓰카와 순쇼(1726~1793)의 제자로 들어갈 수 있었고요. 이때부터 가부키 배우(지금으로 치면 뮤지컬이나 드라마 배우) 등의 초상화를 그렸고, 상인에게 벽보를 그려주며 명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호쿠사이는 다른 유파는 물론이고 중국 등 외국의 그림 그리는 방식까지 가리지 않고 흡수했습니다. “스승에게 배운 근본을 지키지 않는다”면서 파문당했지만 상관없었습니다. 그에겐 ‘더 잘 그리는 것’만이 중요했거든요.
그림밖에 모르는 바보
그의 파격을 보여주는 일화 중엔 이런 게 있습니다. 쇼군(최고 권력자, 지금으로 치면 일본 총리)이 연 그림 대회에 참석한 호쿠사이. 종이 위에 큰 붓으로 푸른 선을 굵게 긋고 나서, “닭 한 마리를 가져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저 양반이 이번에 뭘 할까’ 지켜보던 관중들. 곧이어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호쿠사이가 닭의 발에 붉은 물감을 바른 뒤 그림 위를 걸어가게 했거든요. “완성입니다. 작품 이름은 ‘다츠마 강의 가을 낙엽’입니다.” 작품은 남아있지 않습니다만 쇼군이 1등 상을 줬다니, 그림이 보기에도 꽤 좋았나 봅니다.실력과 스타성을 겸비한 호쿠사이는 금세 유명해졌습니다. 1817년 축제에서 붓 대신 빗자루를 써서 길이 100m에 달하는 달마도를 그리는 등 ‘끼’를 뽐내기도 했고요. 같은 해 인기 소설가였던 쿄쿠테이 바킨과 함께 같이 책을 내면서 명성은 계속 높아져만 갔습니다. 다만 소설가가 시키는 대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그려서 서로 엄청나게 싸웠다고 합니다. 결국 둘은 출판사에 달려가 묻습니다. “우리 둘 중에 누구랑 일할지 한명만 빨리 고르시오.” 출판사가 택한 건 호쿠사이였습니다. 자연스럽게 그의 집에는 “제자로 받아달라”는 후배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내 그림 그릴 시간도 없는데…. 옳지, 이러면 되겠다.” 그는 만화적 표현을 가미한 일종의 그림 교과서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총 15편 출판된 이 시리즈에는 재미있는 그림이 아주 많아서, 그림 그리는 사람은 물론이고 일반인들에게까지 불티나게 팔려나갔습니다. 시리즈 제목은 ‘호쿠사이 만화’. 우리가 지금 쓰는 만화라는 말이 이때 생겼습니다. 그림에서는 이렇게 천재적이었지만, 다른 분야에서 호쿠사이는 그야말로 바보였습니다. 제자가 그린 집안 꼴을 한번 보시지요. 그래도 스승이니 실제보다 훨씬 깨끗하게 그려줬을 텐데, 어수선한 기운이 풍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식사는 무조건 배달시켜 먹었다고 하고요. 배달 온 그릇에 대충 먹다가 그대로 방치했다고 합니다. 어쩌다 좋은 생선을 받아도 요리하기 귀찮아서 남에게 그냥 줘 버렸고요. 술과 담배 선물도 마찬가지로 주변에 나눠줬습니다. 다만 과자는 기뻐하면서 받았다고 합니다.
돈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보통 화가들보다 작품값을 비싸게 받았지만, 그림값이 와도 돈 봉투(돈주머니)를 열어서 돈을 세보지도 않았습니다. 책상 밑에 놔뒀다가 음식점에서 배달이 오면 음식값으로 대충 꾸러미째 던져 줬지요. “돈 셀 시간 있으면 그림이나 그려야지!” 덕분에 음식점 주인만 횡재했습니다. 돈이 많으면 그대로 받고, 적으면 더 달라고 하면 됐으니까요. 그래서 호쿠사이는 가난했습니다. 이렇게 호쿠사이는 자신을 똑 닮은 화가 막내딸과 함께 쓰레기 더미에 앉아 매일 그림을 그렸습니다. 피곤하면 잠깐 잤고요. 일어나면 다시 그렸습니다. 청소와 세탁을 안 하니 이불은 이로 들끓었습니다. 학계 일각에서 호쿠사이가 93회나 이사를 했던 이유로 ‘청소가 귀찮아서’를 꼽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죽는 날까지 그리다
호쿠사이의 대표작 대부분은 60세 이후 그린 그림들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은 1826년에서 1833년 사이에 제작된 우키요에 시리즈인 ‘후지산 삼십육경’인데요. 기사에 실린 그림 대부분이 이 시리즈입니다. 원래 36개로 기획됐지만,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10개가 더 추가됐습니다.지금은 30억원에도 팔리는데, 당시에는 워낙 저렴해서 도자기 포장지 등으로도 쓰였다고 하네요. 서양에 우키요에가 전해진 것도 이런 포장지를 통해서라는 얘기까지 있습니다. 어찌됐든 이 작품들은 서양으로 흘러가 인상주의 화가들을 비롯한 다양한 서양 예술 사조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그는 계속 공부와 그림그리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인물을 그릴 때는 골격을 알아야 한다”면서 접골원을 찾아가 해부학을 연구했고요. 새로운 기법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자연과 사물을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 그림, “저런 모양과 크기의 파도가 어디 있냐”며 비웃는 사람도 있었지만 훗날 해양 연구와 초고속 카메라 촬영을 통해 실제 모양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1834년에는 ‘부악백경’이란 그림책을 냅니다. 책 말미에 쓴 작가 멘트가 걸작입니다. “나는 여섯살 때부터 여러 가지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지금 보니 70살 전에 그린 건 다 변변찮네. 일흔셋인 지금 간신히 온갖 동식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됐지. 그러니 여든 여섯살엔 지금보다 더 잘 그릴 거고, 아흔살, 백 살엔 더더욱 잘 그릴 거야. 시간이 더 흐르면 내가 그린 그림에선 점 하나, 선 하나가 모두 살아 움직이겠지. 장수의 신이여, 나를 오래 살게 해주면 이 말을 증명하겠다. 그림에 환장한 늙은이 씀.” 장수의 신이 호쿠사이의 말을 들어줬던 걸까요? 호쿠사이는 89세까지 살았습니다. 당시 기준으로는 어마어마한 장수였습니다. 하지만 호쿠사이에게는 예술을 하기에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말. “하늘이 내 목숨을 10년 늘려준다면! 아니, 5년만 늘려준다면, 나는 진짜 그림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텐데….” 국적과 분야를 막론하고 인간이 한 분야에 삶을 바쳐 헌신하는 모습은 언제나 감동을 줍니다. 그 중에서도 호쿠사이가 특별한 건, 죽을 때까지 시간을 아껴 가며 공부와 노력을 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호쿠사이가 말년에 위대한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건 그 덕분일 겁니다. 호쿠사이의 삶과 작품이 시공간을 넘어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영감을 주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모여 일생이 된다”(톨스토이)는 말이 있지요. 너무 늦었다는 생각 따위 하지 않고, 그날그날을 충실히 살다 보면 결국 보답을 받는 게 인생이란 생각이 듭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군가를 기억할 때 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곤 하니까요. 막을 내릴 때까지 가장 멋진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지요. 이번 기사에 나온 그의 작품 대부분이 만년의 작품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번 기사의 내용은 <호쿠사이, 그림에 미친 노인>(프랑수아 플라스 지음) <호쿠사이 부악백경>(호쿠사이 지음, 김동근 옮김)을 참조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