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반도체 패권 전쟁 80년…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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칩 워
크리스 밀러 지음
노정태 옮김 / 부키
656쪽|2만8000원
역사학자가 기록한 '반도체 전쟁'
100여명 직접 인터뷰해 작성
소련 실패·대만 성공사례로
반도체 양산의 중요성 강조
미국-일본의 견제·경쟁 조명
한국 기업이 가야할 길 제시
크리스 밀러 지음
노정태 옮김 / 부키
656쪽|2만8000원
역사학자가 기록한 '반도체 전쟁'
100여명 직접 인터뷰해 작성
소련 실패·대만 성공사례로
반도체 양산의 중요성 강조
미국-일본의 견제·경쟁 조명
한국 기업이 가야할 길 제시
역사는 반복된다. 반도체도 마찬가지다. 첨단 반도체 기술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다투고 있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다. 미국과 소련, 미국과 일본이 그랬다. 그 결과 현재의 반도체 산업 지형이 만들어졌다.
<칩 워>는 바로 그 역사를 다룬 책이다. 저자 크리스 밀러는 미국 터프츠대 플레처스쿨 교수다. 하버드대와 예일대에서 역사를 전공한 그는 기술과 지정학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연구를 하고 있다. 교수가 썼지만 생생함이 살아있다. 저자가 역사 기록을 참고한 것은 물론 100여 명의 사람과 인터뷰하며 직접 이야기를 들은 덕분이다. 54개 장(章)으로 이야기를 쪼개 간결함도 살렸다.
반도체의 역사는 1940년대에 시작됐다. 미국 벨연구소에서 일하던 윌리엄 쇼클리가 1945년 최초로 이론화했고, 동료였던 월터 브래튼과 존 바딘이 실험을 통해 실제로 가능함을 입증했다. 나중에 이들은 모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쇼클리는 거만하고 야망이 큰 인물이었다. 반도체 회사를 차려 부자가 되려고 했다. 하지만 양산은 또 다른 문제였다. 판매용 반도체를 만들기 시작한 건 훗날 인텔을 창업한 밥 노이스가 몸담았던 페어차일드반도체와 석유 탐사 장비 업체로 시작한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였다.
‘반도체 양산’의 중요성은 책에서 계속 되풀이된다. 반도체 대량 생산은 페어차일드의 앤디 그로브, TI의 모리스 창과 같은 걸출한 생산 엔지니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훗날 대만으로 돌아가 TSMC를 창업한 창은 TI에서 일하던 시절 0%에 가까웠던 트랜지스터 생산 수율을 몇 달 만에 25%로 끌어올렸고, 곧 TI의 집적회로 사업 전체를 총괄하는 자리에 올라섰다.
냉전 시절 소련이 반도체 산업 육성에 실패한 것도 양산 때문이었다. 소련은 모스크바 인근에 반도체 연구·제조를 위한 과학도시인 젤레노그라드까지 만들었다. 공산권 수출이 금지된 최첨단 칩을 가져와 베끼기에 나섰다. 하지만 칩을 들여다본다고 그걸 만들어낸 방법까지 알 순 없었다. 어떤 화학 물질을 얼마의 온도로 맞춰야 하는지, 포토레지스트를 얼마나 오래 빛에 노출해야 하는지 등의 지식은 칩이 아니라 현장에 있었다.
미국의 동맹이던 일본은 미국 회사들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아 반도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후발 주자인 까닭에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는데, 1976년 일본 정부 주도로 발족한 ‘VLSI 프로젝트’가 결정적이었다. 후지쓰, 히타치, 미쓰비시전기, NEC, 도시바를 한데 모아놓고 협력하라고 했다. 연구개발비도 댔다.
하지만 미국 반도체 산업을 궁지로 몰아넣는 등 너무 잘나간 게 문제였다. 반도체는 군사력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다. 미 중앙정보부(CIA) 분석가들은 일본이 반도체 우위를 등에 업고 미국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일본 반도체 산업이 미국의 견제를 받는 빌미가 됐다.
미국은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을 네덜란드 ASML에 몰아줬다. 이 분야 1·2위 기업이던 일본 니콘과 캐논도 EUV 개발에 나섰지만 경쟁에 밀리고 말았다. 한국이 D램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미국의 일본 견제 덕분이었다. 부도 위기에 몰렸던 마이크론은 삼성에 64K D램의 설계를 제공하고 라이선스 생산을 허용했다. 인텔도 삼성전자에 투자했다. 책은 AMD 최고경영자(CEO)였던 제리 샌더스의 말을 빌려 당시 상황을 이렇게 요약한다. “적의 적은 친구다.”
한국 기업의 선전은 응원해야겠지만 ‘한국이 최고’라는 국수주의적 태도는 현실을 왜곡한다. 이 책은 더 넓은 시야로 반도체 산업을 조망하게 돕는다. 지금의 반도체 공급망은 미국이 만들어냈고 여전히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다.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시놉시스와 케이던스, 반도체 장비를 생산하는 램리서치와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 같은 미국 기업도 건재하다. ASML의 EUV에도 미국 기술이 들어간다. 미래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만 반도체의 역사는 이런 메시지를 전한다. 반도체 산업의 번영을 원한다면 미국 편에 서라고.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칩 워>는 바로 그 역사를 다룬 책이다. 저자 크리스 밀러는 미국 터프츠대 플레처스쿨 교수다. 하버드대와 예일대에서 역사를 전공한 그는 기술과 지정학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연구를 하고 있다. 교수가 썼지만 생생함이 살아있다. 저자가 역사 기록을 참고한 것은 물론 100여 명의 사람과 인터뷰하며 직접 이야기를 들은 덕분이다. 54개 장(章)으로 이야기를 쪼개 간결함도 살렸다.
반도체의 역사는 1940년대에 시작됐다. 미국 벨연구소에서 일하던 윌리엄 쇼클리가 1945년 최초로 이론화했고, 동료였던 월터 브래튼과 존 바딘이 실험을 통해 실제로 가능함을 입증했다. 나중에 이들은 모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쇼클리는 거만하고 야망이 큰 인물이었다. 반도체 회사를 차려 부자가 되려고 했다. 하지만 양산은 또 다른 문제였다. 판매용 반도체를 만들기 시작한 건 훗날 인텔을 창업한 밥 노이스가 몸담았던 페어차일드반도체와 석유 탐사 장비 업체로 시작한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였다.
‘반도체 양산’의 중요성은 책에서 계속 되풀이된다. 반도체 대량 생산은 페어차일드의 앤디 그로브, TI의 모리스 창과 같은 걸출한 생산 엔지니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훗날 대만으로 돌아가 TSMC를 창업한 창은 TI에서 일하던 시절 0%에 가까웠던 트랜지스터 생산 수율을 몇 달 만에 25%로 끌어올렸고, 곧 TI의 집적회로 사업 전체를 총괄하는 자리에 올라섰다.
냉전 시절 소련이 반도체 산업 육성에 실패한 것도 양산 때문이었다. 소련은 모스크바 인근에 반도체 연구·제조를 위한 과학도시인 젤레노그라드까지 만들었다. 공산권 수출이 금지된 최첨단 칩을 가져와 베끼기에 나섰다. 하지만 칩을 들여다본다고 그걸 만들어낸 방법까지 알 순 없었다. 어떤 화학 물질을 얼마의 온도로 맞춰야 하는지, 포토레지스트를 얼마나 오래 빛에 노출해야 하는지 등의 지식은 칩이 아니라 현장에 있었다.
미국의 동맹이던 일본은 미국 회사들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아 반도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후발 주자인 까닭에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는데, 1976년 일본 정부 주도로 발족한 ‘VLSI 프로젝트’가 결정적이었다. 후지쓰, 히타치, 미쓰비시전기, NEC, 도시바를 한데 모아놓고 협력하라고 했다. 연구개발비도 댔다.
하지만 미국 반도체 산업을 궁지로 몰아넣는 등 너무 잘나간 게 문제였다. 반도체는 군사력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다. 미 중앙정보부(CIA) 분석가들은 일본이 반도체 우위를 등에 업고 미국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일본 반도체 산업이 미국의 견제를 받는 빌미가 됐다.
미국은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을 네덜란드 ASML에 몰아줬다. 이 분야 1·2위 기업이던 일본 니콘과 캐논도 EUV 개발에 나섰지만 경쟁에 밀리고 말았다. 한국이 D램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미국의 일본 견제 덕분이었다. 부도 위기에 몰렸던 마이크론은 삼성에 64K D램의 설계를 제공하고 라이선스 생산을 허용했다. 인텔도 삼성전자에 투자했다. 책은 AMD 최고경영자(CEO)였던 제리 샌더스의 말을 빌려 당시 상황을 이렇게 요약한다. “적의 적은 친구다.”
한국 기업의 선전은 응원해야겠지만 ‘한국이 최고’라는 국수주의적 태도는 현실을 왜곡한다. 이 책은 더 넓은 시야로 반도체 산업을 조망하게 돕는다. 지금의 반도체 공급망은 미국이 만들어냈고 여전히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다.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시놉시스와 케이던스, 반도체 장비를 생산하는 램리서치와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 같은 미국 기업도 건재하다. ASML의 EUV에도 미국 기술이 들어간다. 미래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만 반도체의 역사는 이런 메시지를 전한다. 반도체 산업의 번영을 원한다면 미국 편에 서라고.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