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립스틱서 영감받은 딱풀…풀과 메모지가 만난 포스트잇
1967년 독일 헨켈사에서 접착제 연구원으로 일하던 볼프강 디리히는 비행기를 타고 출장을 떠났다. 그는 비행 도중 앞좌석의 한 여성이 립스틱을 꼼꼼하게 바르는 모습을 봤다. 립스틱 형태를 접착제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그는 출장에서 돌아와 뚜껑을 열고 비틀어 사용할 수 있는 딱풀을 개발했다.

《문구의 모험》은 볼펜 스테이플러 클립 형광펜 등 친숙한 문구들의 탄생 비화와 이에 얽힌 사람 이야기, 제조 기법과 과학적 작동 원리 등을 조명한 책이다. 우연히 발명된 쓸모없는 풀이 메모지와 만나 포스트잇이 탄생했고, 낙담한 디자이너가 모형을 뭉개버리는 바람에 납작한 형광펜 디자인이 나왔다. 오타에 시달리던 비서가 수정액을 발명해 큰돈을 벌기도 했다.

저자는 도구적 인간이 만든 작지만 위대한 물건들의 세계를 통해 중요한 사고의 전환이 이뤄졌다고 강조한다. 지우개의 발명으로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가 없었더라면 과학과 사회, 문화와 윤리의 발전도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형광펜은 메모하고 표시하고 공부하는 새로운 방식을 가져왔다. 색인 카드는 자료를 정리하고 업데이트하는 정보처리 방식에 혁명을 불러온 도구다.

문구는 위대한 예술가에게 창조적 영감을 주기도 했다. 소설 ‘분노의 포도’를 쓴 존 스타인벡은 작가 생활 내내 완벽한 연필을 찾아 헤맨 끝에 ‘블랙윙 602’의 팬이 됐다. 세계적인 음악 프로듀서 퀸시 존스는 작업할 때 항상 주머니에 연필을 한 자루 꽂아뒀다. 저자는 “전구가 발명된 이후에도 양초가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디지털 기반의 생활이 강고해질수록 문구의 아날로그적 감각과 기억은 더 소중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최종석 기자 ellisic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