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d 위상 높인 두 거목… 금융위기로 평가 엇갈려
[세기의 라이벌] 폴 볼커 vs 앨런 그린스펀
‘세계의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는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 98년의 Fed 역사가 배출한 역대 14명의 의장 가운데 12대 폴 볼커(84)와 13대 앨런 그린스펀(85)은 ‘전설’로 통한다. 이들이 활약하기 전에는 Fed 위상이 지금처럼 높지 않았다. 볼커의 전임자인 윌리엄 밀러는 ‘오락가락 통화정책’으로 17개월 만에 의장직에서 쫓겨났다. Fed의 체면도 함께 구겨졌다.

볼커와 그린스펀은 둘 다 장수 의장이었다. 볼커는 1979년 8월부터 1987년 8월까지 8년간 Fed를 이끌었다. 그린스펀은 볼커의 뒤를 이어 2006년 1월 벤 버냉키 현 의장에게 자리를 물려줄 때까지 무려 18년반 동안 자리를 지켰다. 세계 경제사에 남긴 발자취도 뚜렷했다. 볼커는 취임 초 10%대가 넘는 고물가를 잡아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명성을 날렸다. 그린스펀은 절묘한 통화정책으로 고성장, 저물가의 ‘골디락스 경제’를 구현해 ‘마에스트로(거장)’라는 찬사를 들었다. 볼커와 그린스펀을 거치면서 Fed 의장은 경제 분야에서 누구도 도전하기 힘든 권위를 갖게 됐다.

# 고금리 vs 저금리

볼커는 전형적인 ‘매파’였다. 인플레이션 퇴치를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볼커가 Fed 의장에 취임할 당시 미국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 상태였다. 오일쇼크로 물가가 뛰는 가운데 경기마저 나빴다. 물가를 잡으려면 금리를 올려야 하지만 경기를 생각하면 금리를 내려야 하는 딜레마였다. 볼커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물가를 잡는 데 집중했다. 1960~1970년대 초 1~4%에 불과하던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79년 11%에 달했고 1981년에는 13%까지 치솟았다. 볼커는 취임하자마자 인플레이션 진압에 나섰다. 취임 당시 연 11.2%였던 정책금리를 3개월 만에 연 14%대로 올렸다. 그래도 물가가 잡히지 않자 1981년에는 연 21%까지 끌어올렸다. 남북전쟁 이후 최고 수준이었다. 볼커의 확고한 물가 안정 의지가 효력을 발휘했다. 물가 상승률은 1983년 3.2%까지 드라마틱하게 떨어졌다.

볼커의 바통을 넘겨받은 그린스펀은 ‘비둘기파’에 가까웠다. 생산성 향상과 중국산 저가 제품 홍수로 물가가 안정세를 보이던 때였다.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는 볼커의 맹활약으로 확연히 꺾여 있었다. 자연스럽게 경기에 신경을 더 많이 썼다. 그린스펀의 특징은 선제적 통화정책을 구사하려고 애를 썼다는 점이다. 경제위기가 본격화하기 전 금리와 유동성을 조절해 경제를 안정적 성장 상태로 유지하는 전략이다. 1987년 미국 다우지수가 22%나 폭락하는 블랙먼데이가 연출되자 그린스펀은 곧바로 유동성 공급 방침을 밝혀 패닉을 진정시켰다. 1990년 걸프전으로 국제유가가 급등했을 때는 시장의 예상보다 앞서 금리를 올린 뒤 유가가 내리자마자 금리를 인하해 경기를 떠받쳤다. 위험한 도박이란 평가도 있었지만 결과는 성공이었다. 이후 아시아 외환위기, 러시아 디폴트(채무 불이행), 헤지펀드인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 파산 등 세계 경제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그린스펀은 금리를 과감히 낮췄다. 2000년 정보기술(IT) 붐이 무너진 닷컴버블 붕괴 때는 정책금리를 2년여에 걸쳐 연 6.5%에서 연 1%까지 끌어내렸다. 이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 경제의 호황으로 이어졌다. 그린스펀의 저금리 정책은 월가(미국 금융가)에서 ‘그린스펀 풋(put)’으로 통했다. 파생상품 시장의 풋옵션처럼 주가가 빠질 때마다 그린스펀이 어김없이 살려놓을 것이란 기대였다.

# 뒤바뀐 평가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처음과 끝이 극명하게 달랐다. 볼커는 재임 시절 거의 모든 곳에서 욕을 먹었다. 고금리 정책으로 기업들이 무더기로 도산했다. 볼커 취임 당시 6%대였던 실업률이 10%대로 악화됐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기침체였다. 워싱턴 Fed 청사에는 연일 시위대가 몰려들었다. 뉴욕에선 ‘멍청이 폴 볼커를 몰아내자’는 격문이 나붙었다. 괴한들의 살해 위협이 잇따랐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볼커는 호신용 권총을 몸에 지니고 다녀야 했다.

볼커를 Fed 의장으로 발탁한 민주당 지미 카터 대통령조차도 입이 쑥 튀어나왔다. 초고금리 정책으로 경기가 침체돼 재선 판세가 불리하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 후보는 경기침체를 카터의 실정으로 몰아붙였다. 1980년 대선에서 카터가 무릎을 꿇자 그의 참모는 “볼커는 인플레이션의 숨통을 끊었지만 카터 정권의 숨통도 함께 끊었다”며 땅을 쳤다. 볼커는 인플레이션 퇴치에 성공한 뒤 차츰 영웅으로 떠올랐다. “미국 경제의 장기호황 기반을 닦았다”는 재평가가 잇따랐다. 독일 경제학자 헨리 카우프만은 볼커를 “20세기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중앙은행장”이라고 극찬했다. 볼커의 통화긴축은 경제학사적으로 케인스학파에 대한 통화주의의 KO승으로도 해석된다. 통화주의는 인플레이션을 통화 증가의 결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시카고학파의 거두 밀턴 프리드먼이 주창했다. 그때까지 여전히 학계를 주름잡던 케인스학파는 실업과 인플레이션의 상충관계(필립스곡선)에 집착해 스태그플레이션에 제대로 된 처방전을 내놓지 못했다. 반면 프리드먼은 통화정책으로 실업을 해결할 수 없으며 중앙은행의 최대임무는 물가 안정이라고 설파했다. 볼커의 인플레이션 퇴치 이후 통화주의는 전 세계 중앙은행의 핵심 원칙으로 자리잡았다.

그린스펀은 재임 중 연예인을 능가하는 스타 대접을 받았다. 시의적절한 통화정책으로 미국 경제를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으로부터 해방시켰다는 호평이 이어졌다. Fed 의장에게 따라붙는 ‘세계의 경제 대통령’이란 수식어도 그린스펀으로부터 유래했다. 세계 경제는 늘 그의 입을 쳐다봤다. 그린스펀의 말투는 어눌하고 화법도 모호했다. 볼커가 직설적인 화법으로 카리스마를 발휘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경제에 대한 남다른 통찰력 덕분이었다. 텍사스주 출신 민주당 하원의원을 지낸 프랭크 이카드는 “그린스펀은 시보레 자동차에 얼마나 많은 나사못이 사용되고 있으며 그중에서 3개를 제거했을 경우 국가 경제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아는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는 골수 공화당원이었다. 하지만 민주당 클린턴 정부조차 그를 경제 사령탑으로 극진히 예우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1993년 의회에서 첫 연두교서를 발표할 때 부인 힐러리 옆에 그린스펀을 앉힌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러나 2008년 9월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그의 명성에 금이 갔다. 그린스펀의 저금리 정책이 미국 부동산 거품을 키웠고 그 결과 ‘100년 만의 위기’가 도래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미국의 재정적자 급증에 대해서도 비난의 화살이 날아왔다. 재임 중 감세 정책을 지지한 것이 재정적자를 악화시켰다는 지적이었다.

# 규제냐 탈규제냐

금융규제에 대한 두 사람의 시각은 더 분명하게 갈린다. 볼커는 금융시장에 대해서 만큼은 확실한 규제론자다. “은행권에서 혁신이라고 하는 것 중 쓸 만한 건 현금자동입출금기(ATM) 하나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레이건 정부가 금융규제 완화를 위해 글래스-스티걸법 폐지를 추진하는 데 반대하다 결국 임기를 10개월가량 남기고 짐을 싸야 했다. 글래스-스티걸법은 대출 중심의 상업은행과 기업금융 업무 중심의 투자은행을 확고하게 구분한 금융규제법으로 1930년대 대공황을 겪은 뒤 탄생했다.

그린스펀은 철저한 시장주의자였다. 금융시장에서도 탈규제를 옹호했다. 워런 버핏이 ‘금융시장의 대량살상무기’라고 부른 파생상품의 위험도 경계하지 않았다. 규제 당국보다 시장의 거래 당사자가 해당 상품의 위험을 잘 파악해 대처할 수 있을 것이란 신념에서였다. 1980년대 이후 정부의 규제를 줄이는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금융시장에서의 승자는 그린스펀이었다. 글래스-스티걸법은 오랜 논란 끝에 클린턴 정부 시절인 1999년 폐지됐다. 은행들은 부동산이나 주식 등을 자기 돈으로 매입하는 자기자본 거래와 파생상품 등 투기적 거래에 뛰어들었다. 볼커는 변방으로 밀려나 취미인 낚시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2008년 금융위기는 두 사람의 처지를 바꿔놨다. 볼커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자문역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월가 개혁에도 앞장서 은행의 자기자본 거래와 투기적 거래를 제한하는 볼커룰을 디자인했다. 지난해 의회를 통과한 80년 만의 월가 개혁법안인 도드-프랭크법은 볼커룰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린스펀은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신용경색의 한복판에서 의회 청문회에 불려 나왔다. “40년 이상 믿어온 경제이론에 허점이 있었다”며 고개를 떨궈야 했다.

주용석 한국경제신문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