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고영재 "빚보증·사업 실패…차로 팔당댐 돌진한 적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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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8주년 한경 특별기획
위기는 기회다 (5·끝)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길은 있다
빚더미에 인생 포기할 뻔 했던 연기자 독고영재 씨
자동차 나무에 걸려 구사일생
아이들에 죄 지을뻔…술 딱 끊어
동업자 배신…입점 백화점 부도
딸과 남산 주차장서 숙식하기도
내 갈 길은 배우…연기에 전념
"삶을 긍정해야 기회도 잡는다"
위기는 기회다 (5·끝)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길은 있다
빚더미에 인생 포기할 뻔 했던 연기자 독고영재 씨
자동차 나무에 걸려 구사일생
아이들에 죄 지을뻔…술 딱 끊어
동업자 배신…입점 백화점 부도
딸과 남산 주차장서 숙식하기도
내 갈 길은 배우…연기에 전념
"삶을 긍정해야 기회도 잡는다"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시청자를 사로잡는 중견 연기자 독고영재 씨(59). 연극배우 출신이며 1993년 드라마 ‘엄마의 바다’로 유명 배우의 반열에 올랐다. 독고씨는 빚이라면 진저리를 친다. 시기별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20여년을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는 “선생님 이야기를 신문에 싣고 싶다”는 기자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개인적으로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과정과 빚 문제를 다 정리하고 난 뒤에 깨달았던 자기성찰의 과정을 지금 이 순간 고통받고 있는 여러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1997년 어느 날 독고씨는 필리핀에서 영화 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서울에서 더 이상 촬영이 어렵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제작비가 모자란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평소 친형제처럼 지내던 제작자를 믿고 3억원을 대출받는 데 선뜻 보증을 서줬다. 하지만 영화 개봉과 동시에 제작자는 사라졌다. 영화도 흥행에 실패했다. 그리고 대신 갚아야할 돈은 4억7000여만원으로 불어났다. 제작자가 임의로 자신 명의의 대출보증을 추가로 늘려 놓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친동생처럼 생각해온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 너무 힘들었어요. 아내는 제가 그 친구를 믿고 아껴서 도와준 것이니까 우정의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하라 했죠.”
하지만 그냥 잊어버리기에는 대가가 너무 컸다. 당시 연간 1억원이 넘던 출연료와 각종 행사 출연비는 모두 은행에 차압을 당했다. 노후에 대비해 마련해둔 8만㎡의 강원도 평창 땅도 7000여만원이라는 헐값에 팔아야 했다. 지금 이 땅의 시가는 50억원 선이다.
그의 아버지는 1950~60년대 한국 영화계를 풍미했던 고(故) 독고성 씨다. 유명 배우였던 아버지 덕에 그는 풍족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아버지가 제작한 영화가 줄줄이 실패하면서 가세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그가 스무살 때인 1973년, 집에 차압 딱지가 붙었다. 빨리 자립해야겠다는 생각에 우유 배달, 구두닦이 등 닥치는 대로 돈벌이에 나섰다. 하지만 갑작스런 궁핍을 견디기에는 정신적으로 너무 어렸다. 결국 수면제를 다량 복용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독고씨의 시련은 이 시절로만 끝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배우 직업으로는 생활을 꾸려 나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예대 재학 시절인 1971년 연극 ‘제17 포로수용소’로 무대에 처음으로 섰고 1973년 영화 ‘빗방울’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영화 ‘빗방울’로는 청룡영화제 신인남우상을 받으며 단번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하지만 연극무대에 집중했던 탓에 돈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그래서 1975년 처음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석유난로, 정수기 등을 수입해서 파는 무역업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시기가 혼돈기였어요. 연기를 하자니 돈이 안 되고, 돈을 벌자니 좋아하는 연기를 못하고….”
1979년엔 서울 명동에 노아기획이라는 광고회사를 차렸다. 이듬해에는 가구 사업에 뛰어들어 주문형 가구를 팔았다. 당시 비디오테크 맞춤형 가구는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1985년 동업자가 연기 생활을 병행하던 독고씨를 속여 회사 돈을 계속 빼돌렸고 입점한 태릉백화점이 부도가 나면서 사업을 접어야 했다. 당시 그는 첫 부인과 헤어지고 두 아이를 홀로 키우고 있었다. 처참했다. 수중에 돈은 바닥이 나고 아이들과 함께 살 집도 없었다. 어느 날 남은 전 재산을 세어봤더니 32만원. “여덟 살짜리 딸아이가 저와 떨어지려 하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여관에서 같이 잠을 잤는데 나중에는 돈이 떨어져 남산 주차장에서 밤을 새웠죠.”
독고씨는 술을 마신 뒤 차를 몰고 팔당댐으로 뛰어들었다. 다행히 차는 나무에 걸렸다. “아이들도 있었는데 부모로서 너무 감상적이고 무책임한 행동이었어요. 나중에 후회를 많이 했죠.”
그 길로 술을 끊었다. 결국 자신이 갈 길은 연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드라마 ‘엄마의 바다’로 스타덤에 올랐다. 1992년 영화 ‘하얀전쟁’으로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을 타며 연기력도 인정받았다. 출연 요청이 밀려들어왔고 영화와 드라마를 분주하게 오가는 생활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몇몇 사업에 손을 대 고초를 겪었지만 연기 인생 자체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독고씨는 이제 다시 사업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물론 많은 비용을 치러 건진 것도 있다고 했다. “모든 괴로움은 머릿속에서 나온다”는 나름의 통찰이다. 번민이 괴로움을 만들고 괴로움이 현실을 비관하게 하는 만큼 머릿속을 비우고 계속 움직이는 것만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얘기다.
“골똘히 생각만 한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잖아요.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특히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는 게 중요해요.”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
1997년 어느 날 독고씨는 필리핀에서 영화 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서울에서 더 이상 촬영이 어렵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제작비가 모자란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평소 친형제처럼 지내던 제작자를 믿고 3억원을 대출받는 데 선뜻 보증을 서줬다. 하지만 영화 개봉과 동시에 제작자는 사라졌다. 영화도 흥행에 실패했다. 그리고 대신 갚아야할 돈은 4억7000여만원으로 불어났다. 제작자가 임의로 자신 명의의 대출보증을 추가로 늘려 놓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친동생처럼 생각해온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 너무 힘들었어요. 아내는 제가 그 친구를 믿고 아껴서 도와준 것이니까 우정의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하라 했죠.”
하지만 그냥 잊어버리기에는 대가가 너무 컸다. 당시 연간 1억원이 넘던 출연료와 각종 행사 출연비는 모두 은행에 차압을 당했다. 노후에 대비해 마련해둔 8만㎡의 강원도 평창 땅도 7000여만원이라는 헐값에 팔아야 했다. 지금 이 땅의 시가는 50억원 선이다.
그의 아버지는 1950~60년대 한국 영화계를 풍미했던 고(故) 독고성 씨다. 유명 배우였던 아버지 덕에 그는 풍족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아버지가 제작한 영화가 줄줄이 실패하면서 가세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그가 스무살 때인 1973년, 집에 차압 딱지가 붙었다. 빨리 자립해야겠다는 생각에 우유 배달, 구두닦이 등 닥치는 대로 돈벌이에 나섰다. 하지만 갑작스런 궁핍을 견디기에는 정신적으로 너무 어렸다. 결국 수면제를 다량 복용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독고씨의 시련은 이 시절로만 끝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배우 직업으로는 생활을 꾸려 나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예대 재학 시절인 1971년 연극 ‘제17 포로수용소’로 무대에 처음으로 섰고 1973년 영화 ‘빗방울’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영화 ‘빗방울’로는 청룡영화제 신인남우상을 받으며 단번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하지만 연극무대에 집중했던 탓에 돈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그래서 1975년 처음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석유난로, 정수기 등을 수입해서 파는 무역업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시기가 혼돈기였어요. 연기를 하자니 돈이 안 되고, 돈을 벌자니 좋아하는 연기를 못하고….”
1979년엔 서울 명동에 노아기획이라는 광고회사를 차렸다. 이듬해에는 가구 사업에 뛰어들어 주문형 가구를 팔았다. 당시 비디오테크 맞춤형 가구는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1985년 동업자가 연기 생활을 병행하던 독고씨를 속여 회사 돈을 계속 빼돌렸고 입점한 태릉백화점이 부도가 나면서 사업을 접어야 했다. 당시 그는 첫 부인과 헤어지고 두 아이를 홀로 키우고 있었다. 처참했다. 수중에 돈은 바닥이 나고 아이들과 함께 살 집도 없었다. 어느 날 남은 전 재산을 세어봤더니 32만원. “여덟 살짜리 딸아이가 저와 떨어지려 하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여관에서 같이 잠을 잤는데 나중에는 돈이 떨어져 남산 주차장에서 밤을 새웠죠.”
독고씨는 술을 마신 뒤 차를 몰고 팔당댐으로 뛰어들었다. 다행히 차는 나무에 걸렸다. “아이들도 있었는데 부모로서 너무 감상적이고 무책임한 행동이었어요. 나중에 후회를 많이 했죠.”
그 길로 술을 끊었다. 결국 자신이 갈 길은 연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드라마 ‘엄마의 바다’로 스타덤에 올랐다. 1992년 영화 ‘하얀전쟁’으로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을 타며 연기력도 인정받았다. 출연 요청이 밀려들어왔고 영화와 드라마를 분주하게 오가는 생활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몇몇 사업에 손을 대 고초를 겪었지만 연기 인생 자체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독고씨는 이제 다시 사업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물론 많은 비용을 치러 건진 것도 있다고 했다. “모든 괴로움은 머릿속에서 나온다”는 나름의 통찰이다. 번민이 괴로움을 만들고 괴로움이 현실을 비관하게 하는 만큼 머릿속을 비우고 계속 움직이는 것만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얘기다.
“골똘히 생각만 한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잖아요.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특히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는 게 중요해요.”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