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바나나
16~17세기 유럽 사람들은 바나나를 ‘아담의 무화과’ ‘천국의 무화과’라고 불렀다. 하와가 따 먹은 선악과도 바나나이며, 몸을 가린 것도 여린 무화과잎이 아니라 넉넉한 바나나잎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희한한 열대 과일에 온갖 상상과 전설을 갖다붙였을 만하다.

바나나 하나는 감자 하나와 거의 같은 열량을 갖는데 당분과 비타민 A, C가 풍부하다고 한다. 영양 흡수가 빨라 프로골프 선수들이 라운드 중 즐겨 먹기도 한다. 크기가 절반인 몽키바나나에도 칼륨과 섬유소가 많다. 바나나 가루나 바나나 식초는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인기다.

바나나라는 말은 아랍어로 손가락을 뜻하는 ‘바난(banan)’에서 유래했다. 예나 지금이나 모양에 따라 이름 짓는 게 많다. 축구공을 휘어지게 차는 바나나 킥이나 활 모양으로 구두굽을 휘게 만든 바나나 힐도 그렇다.

따뜻한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과일이어서 바나나 분쟁도 많았다. 1990년대 유럽연합과 미국의 무역 분쟁은 항공기 영공 통과 금지 등의 극한 대결로 치달았다. 유럽이 옛 식민지에서 수입하는 바나나와 미국에서 수입하는 중남미산 바나나에 차별관세를 매긴 게 문제였다.

미국은 한때 중남미 바나나 재배 국가에 군대를 보내 바나나 전쟁까지 벌였다. 1차산품을 수출하는 저개발 국가들을 ‘바나나 공화국’이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오 헨리가 소설 속에 처음 써서 더 유명해졌다.

어쨌든 바나나를 둘러싼 역사의 진폭은 꽤나 넓다. 우리나라에는 필리핀산이 95% 이상 들어온다. 지난해 태풍으로 바나나 가격이 뛰어 시장에 비상이 걸렸는데, 다행히 값이 20~30% 싼 아프리카산이 들어와 4000원이면 한 송이를 살 수 있다고 한다. 옛날엔 특별한 날에나 먹던 바나나를 지구 반대편에서 금방 수입해 아무 때나 즐길 수 있게 됐으니 이야말로 자유무역과 시장경제 덕분이다.

대부분의 과일은 시원한 곳에 보관할수록 달지만, 바나나는 냉장고에 넣지 말고 식탁 위나 선반에 그냥 두는 게 좋다고 한다. 더운 날씨에서 자란 식물이라 추우면 까맣게 변색되는데 이를 갈변현상이라고 한다. 가장 잘 익은 것은 속살에 검은 점이 박혀 있다. 이게 슈거 포인트(당분이 모여 있는 곳)다.

단맛이 커지면 칼로리가 높아질까 걱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분이 당으로 변하면서 작은 단위로 쪼개질 뿐 탄수화물 함량에는 변화가 없어 칼로리 또한 높아지지 않는다고 한다. 살찔 염려도 없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