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를 달리는 전기자동차, 가만히 서 있어도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움직이는 도로, 소형TV가 달린 전화기. 학생잡지에 만화를 그리던 이정문 화백(74·사진)이 1965년 그린 ‘서기 2000년대의 생활의 이모저모라는 그림’이다. 그림에 등장한 미래 기술은 태양열 주택이나 전기자동차, DMB 스마트폰, 원격 교육 등으로 대부분 현실이 됐다.

이 그림은 오는 14일 출범 20년을 맞는 한국공학한림원 국제심포지엄 행사의 초청장 표지 그림으로 등장하면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1959년 18세에 신인만화가 공모전에 입선하며 직업만화가의 길을 걷게 된 이 화백은 “신문에서 과학자들이 설명하는 과학기술의 발전상을 듣고 상상에 의지해 우연히 35년 뒤의 미래 삶을 그리게 됐다”고 말했다. 이 화백이 그림을 그릴 당시만 해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5달러에 머물렀다. 나라에 변변한 연구소 하나 없던 시절이지만 그의 상상은 거침이 없었다.

6·25전쟁 때 피난을 떠나지 못한 그에게 전쟁은 고된 삶을 안겼지만 한편으로는 풍부한 소재거리를 선사했다. “국군과 유엔군 군인들이 무전기를 이용해 열심히 무전 교신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 각자 전화기를 들고 다니면서 누구나 원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 시대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 가지고 놀았던 돋보기도 마찬가지다. 그는 돋보기로 초점을 맞춰 종이 위에 태양 빛을 모으면 불이 붙는 걸 보고 태양광이 언젠가 에너지로 쓰일 시대가 올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본인 생각을 가감 없이 스케치북에 옮겼다고 했다.

1950년대를 전후해 등장한 영국의 ‘댄 대어’나 미국의 ‘플래시 고든’과 같은 SF만화 주인공과 2000AD 시리즈와 같은 만화시리즈는 미국과 영국 독자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과학기술을 중시하는 문화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전쟁 직후 먹고살기도 각박하던 세상의 시선은 냉정했다. 이 화백의 그림을 두고 한 언론은 불량만화라는 딱지를 붙였다. 이 화백은 “쥘 베른의 해저 2만리도 처음에는 황당한 이야기라는 지적을 받았다”며 “지금도 만화가의 상상력이 사회발전에 해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화백은 지금도 상상만화를 계속 그리고 있다고 전했다. 2010년에는 2050년의 미래 모습을 담은 상상만화를 그렸다. 그는 “인간이 팽창하는 우주 끝에 도착했을 때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가장 궁금하다”며 “지금도 다큐멘터리나 우주와 관련한 신문기사를 꼼꼼히 읽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화백은 “아이들이 우주선을 타고 수학여행을 떠나고, 좁쌀만한 로봇이 몸 안을 돌아다니며 병을 치료하는 시대도 머지않아 열릴 것”이라며 “세상이 변할 수 있도록 상상력을 자극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