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의과학도에게 굶주림 안줘"…돈·명예 대신 연구 택한 병리학자 윤일선
고(故) 윤일선 박사(1896~1987)는 현대의학 연구의 초석을 닦은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한국인 최초로 실험동물을 이용해 알레르기와 내분비 관계를 연구하며 병리학의 씨앗을 뿌렸다.

윤 박사는 192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제국대에서 당대 유명한 병리학자인 후지나미 아키라(藤浪鑑) 교수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아 한국인 최초 병리학자가 됐다. 유학 시절 스승인 후지나미 교수가 등록금을 대신 내줄 정도도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귀국 후 연세대 의대 전신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그는 병리학을 비롯한 기초의학 전반의 기틀을 정립해 나갔다. 가장 먼저 교내 도서관을 설립했다. 비용을 모두 직접 부담해 일본과 유럽, 미국에서 의학 서적을 주문했다. 국내에서 발표한 논문을 해외에 알리고 외국 학자의 연구 논문을 소개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윤 박사가 1949년 미국의 암 연구 학회지 캔서리서치에 발표한 ‘한국 종양환자 통계’는 국제 학술지에 실린 한국 최초의 의학 논문이다.

윤 박사는 유명인사였지만 정치권 영입 제의를 뿌리치고 평생 의학자로 남았다. 서울대로 자리를 옮긴 뒤 1956년 교수투표에서 90% 동의를 얻어 총장에 임명됐다. 총장 재직 시절 미네소타대와 자매 결연을 맺고 의사들을 유학 보내기도 했다. 흔히 ‘미네소타 프로젝트’로 불리는 이 사업은 한국 의료 선진화의 기틀을 마련한 결정적 계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대학교육과정과 인재 육성에도 힘을 쏟았다. 65세로 정년을 맞은 1961년까지 지도한 논문은 256편, 그의 지도 아래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제자는 152명에 달한다. 6·25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란해서도 논문을 심사했다.

윤 박사는 1963년 원자력병원 초대 원장으로 임명되며 국내 방사선 치료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1972년 한국과학진흥재단 고문, 1980년 재단법인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이사장 등을 지내며 타계하는 날까지 과학 발전과 저변 확대를 위해 정성을 쏟았다.

윤 박사는 구한말 교육가이자 친일 개화파인 윤치오의 아들이다. 하지만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다. 교수생활 내내 자동차는 물론 집 한 칸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다. 그가 살던 서울 용산구 자택은 정년퇴직 후 제자들과 동문회가 성금을 모아 마련해준 것이다. 지난 13일 작고한 김기형 초대 과학기술처 장관은 생전 윤 박사를 회고하며 “고고한 품성으로 사람들을 움직였고 후학에게 존경받은 분이었다”고 말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 데모가 계속되자 교수들을 데리고 직접 시위대의 곁을 지키며 보호한 일화도 유명하다.

윤 박사의 아들이자 훗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원자력병원장을 지낸 윤택구 박사는 “아버지는 ‘신은 한낱 미물에게도 먹이를 내려주는데 진리를 탐구하는 의과학도에게 굶주림을 주시겠느냐’는 말을 자주 했다”며 “과학자는 평생 연구에만 몰두해야 한다고 말하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유하늘 기자 sky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