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아스는 숭고한 사람"…숙적의 명예 지켜주려는 오디세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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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41) 자비(慈悲)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41) 자비(慈悲)
그리스 비극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제3자의 눈으로 자신을 관찰하라고 주문한다. 고대 그리스어로 ‘극장’을 의미하는 ‘테아트론(theatron)’은 축자적(逐字的)으로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장소’라는 의미다. 아테네 시민들은 원형극장에서 자신을 관조하는 종교·시민 교육을 받았다. ‘교육’이란 자신과 상관이 없는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각자에게 맡겨진 고유한 임무를 상기시키는 체계적인 자극이며,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완수해야 하는 개인의 임무를 위한 훈련이다.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들’
그리스 비극을 통한 교육은 단순히 각자에 대한 응시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 교육은 자신을 제3자의 눈으로, 더 나아가 원수의 눈으로 보는 훈련이었다. 최초의 비극시인 아이스킬로스는 비극 ‘페르시아인들’(기원전 472년 초연)에서 그 훈련을 소개했다. 원형극장에 모인 아테네 시민들은 8년 전인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제국과 벌인 살라미스 해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의 부모와 형제, 자식들이 페르시아 제국의 왕 크세르크세스와 페르시아 용병들에게 살해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에서는 아테네 군인들이나 그리스 연합군에 대한 찬양이 없다. 이 비극은 그들에게 생소한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수사’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크세르크세스, 그의 어머니 아톳사, 돌아가신 선왕 다리우스가 등장한다.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의 오만 때문에 페르시아 제국이 아테네와의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했다고 시인한다.
아테네 시민들은 크세르크세스가 무대 위로 올라왔을 때 처음에는 야유와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페르시아 왕이 자신의 잘못을 깊이 인식하고 울기 시작하자 원형극장에 앉아 있는 2만여 명의 아테네 시민은 숙연해졌다. 그들은 크세르크세스가 괴물인 줄 알았다. 그가 어린아이처럼 울자 그를 인간 동료로 봤다. 그의 오만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인류 공통의 기질이자 실수다. 아테네 시민들의 눈가에도 눈물이 고였다. 원수가 절규할 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들은 이 눈물을 통해 페르시아 제국이란 원수에 대한 적개심이 사라지고 페르시아인들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보기 시작했다. 맨 앞좌석에 앉은 아테네 지도자 페리클레스와 극작가 아이스킬로스는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이들은 아테네가 이제 서양문명의 정신적인 토대인 ‘자비’를 터득하기 시작했다고 믿었다.
자비
지도자의 카리스마는 어디에서 오는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을 적용할 때 생기는가? 그것은 지도자가 ‘자비’를 수련해 실천할 때 생기는 아우라다. 한자 ‘자(慈)’는 나와 이웃, 혹은 나와 제3자의 경계가 허물어져 내가 자신을 위하는 마음만큼 상대방의 행복을 위하는 마음이자 행동이다. ‘慈’는 ‘가물가물하다, 아득하다, 까맣다’란 의미를 가진 ‘현(玄)’ 두 개가 나란히 있다. 나와 너, 나와 제3자의 경계가 가물가물해져,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 상태다. ‘자’는 더 나아가 상대방이 행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는 수고다.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을 인간 동료로 보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살라미스 해전을 보기 시작했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만, 지혜로운 자는 두루두루 본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더 나아가 원수의 입장에서 세상을 관찰한다.
한자 ‘비(悲)’는 상대방이 슬플 때, 함께 슬퍼하는 마음일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슬퍼하지 않고 행복한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마음과 행동이다. 나와 상대방은 새가 날기 위해 좌우로 벌린 날개(非)와 같기 때문이다. ‘비’는 배려하는 마음이다. 상대방이 불편하지 않도록, 나의 말과 행동을 삼갈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처지를 살펴 불편하지 않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행위다. 자비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최고의 덕목일 뿐만 아니라 지도자가 지녀야 할 최고의 무기다. 인간은 모두 자비를 경험했다.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목숨 바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처럼, 인간에겐 모든 생물을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지도자는 적극적인 자비의 실천으로 공동체 일원들의 충성을 자아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비를 자극하는 사람이다.
아가멤논의 악의와 오디세우스의 선의
메넬라오스는 테우크로스에게 아이아스의 광기 어린 행위는 그리스 연합군에 대한 도전이자 반역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아이아스의 시신을 공터에 버려 새들과 들짐승들이 훼손하도록 방치하라고 명령했다. 메넬라오스의 뒤를 따라 그의 형 아가멤논이 등장한다. 아가멤논은 무대에 오르자마자 동생과 마찬가지로 테우크로스를 비난한다. 특히 테우크로스가 서자(庶子)인 점을 약점으로 잡아 놀리며, 그를 대신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인’을 데리고 오라고 말한다. 아가멤논에게 테우크로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는 ‘야만인’일 뿐이다.
오디세우스는 새로운 시대의 지도자다. 상대방을 완력이 아니라 대화와 설득으로 굴복시키는 자다. 그는 테우크로스에게 말한다. “무슨 일입니까? 저는 아트레우스의 아들들(메넬라오스와 아가멤논)이 이 사람(아이아스)의 시신 위에서 고함치는 소리를 멀리서 들었습니다.”(1318~1329행)
오디세우스는 아가멤논을 설득한다. “그러면 잘 들어보십시오. 그대는 이 사람을 매장하지 않은 채 인정사정없이 내던지지 마시오. 그건 정말 무모한 짓입니다. 미움이라는 폭력이 당신을 미치게 해 정의를 짓밟게 해서는 안 됩니다.”(1132~1134행) 인간이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는 이유는 상대방에 대한 미움이 그를 난폭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는 누구보다도 아이아스를 증오하는 사람이었다. 아이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가져간 오디세우스를 실제로 살해하려고 시도했다. “아이아스는 한때 내게도 군대에서 가장 고약한 원수였소. 내가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손에 넣은 뒤부터 말입니다.”(1336~1337행)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아이아스를 자신의 눈이 아니라 객관적인 견지에서 평가한다. 그는 아이아스를 트로이에 온 그리스 군인 중 아킬레우스 다음으로 ‘가장 탁월한 전사’라고 고백한다. 오디세우스는 아이아스가 군인으로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 맞는 ‘명예’를 추서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자신의 적이지만 용감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모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강조한다. 명예는 자신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자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특권이다. 명예로운 사람에 대한 평가는 개인의 사적인 감정을 넘어서는 숭고한 가치가 깃들어 있다. 명예는 그 사회를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기반이다.
아가멤논은 자신이 처한 심리적 딜레마를 이렇게 표현한다. “절대권력을 쥔 자가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절대권력을 쥔 자는 자비를 베풀 필요가 없다. 권력으로 시민들의 복종을 강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테네가 실험하기 시작한 민주주의에서는 대화와 설득만이 시민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다.
설득
오디세우스는 아이아스에 관해 이렇게 정의한다. “그는 내 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숭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숭고한’이란 그리스 형용사 ‘겐나이오스(gennaios)’는 ‘(전쟁에서) 용감한, 존경을 받는’이란 의미다. 숭고함은 아름다움과 추함, 나와 너, 아군과 적군을 초월해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복종을 자아내는 가치다. 오디세우스는 아이아스의 숭고함이 그에 대한 적대감을 해소시켰다고 말한다.
오디세우스는 아이아스의 시신 처리라는 문제에 봉착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실마리를 풀려고 노력한다. 그는 메넬라오스나 아가멤논이 아이아스에게 품은 증오의 감정이 아니라 아이아스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그의 시신을 처리하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판단한다. 아이아스가 그리스와 아테네 공동체를 위해 군인으로서 보여준 최선은 그리스인이 지향해야 할 최선이다. 오디세우스의 설득은 그 문제를 해결(解決·solve)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문젯거리가 되지 않게 해소(解消·dissolve)시켰다.
테우크로스는 아이아스의 무덤을 마련한다. 일꾼들은 빈 구덩이를 파고 그의 시신을 닦을 물이 담긴 세발솥을 데우기 시작한다. 다른 일꾼들은 막사에서 아이아스의 방패와 갑옷을 들고나온다. 그는 아이아스의 아들 에우뤼시케스와 함께 아직도 검은 피가 혈관에서 솟고 있는 아이아스의 시신을 옮긴다. 마지막으로 합창대가 아이아스의 시신을 바라보면서 운명의 ‘장님성’을 노래한다. “사람들은 일단 보고 나면 많은 것을 헤아릴 수 있으나, 보기 전에는 아무도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예언할 수 없구나.”(1419~1420행)
배철현 < 작가 ·고전문헌학자 >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들’
그리스 비극을 통한 교육은 단순히 각자에 대한 응시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 교육은 자신을 제3자의 눈으로, 더 나아가 원수의 눈으로 보는 훈련이었다. 최초의 비극시인 아이스킬로스는 비극 ‘페르시아인들’(기원전 472년 초연)에서 그 훈련을 소개했다. 원형극장에 모인 아테네 시민들은 8년 전인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제국과 벌인 살라미스 해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의 부모와 형제, 자식들이 페르시아 제국의 왕 크세르크세스와 페르시아 용병들에게 살해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에서는 아테네 군인들이나 그리스 연합군에 대한 찬양이 없다. 이 비극은 그들에게 생소한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수사’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크세르크세스, 그의 어머니 아톳사, 돌아가신 선왕 다리우스가 등장한다.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의 오만 때문에 페르시아 제국이 아테네와의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했다고 시인한다.
아테네 시민들은 크세르크세스가 무대 위로 올라왔을 때 처음에는 야유와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페르시아 왕이 자신의 잘못을 깊이 인식하고 울기 시작하자 원형극장에 앉아 있는 2만여 명의 아테네 시민은 숙연해졌다. 그들은 크세르크세스가 괴물인 줄 알았다. 그가 어린아이처럼 울자 그를 인간 동료로 봤다. 그의 오만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인류 공통의 기질이자 실수다. 아테네 시민들의 눈가에도 눈물이 고였다. 원수가 절규할 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들은 이 눈물을 통해 페르시아 제국이란 원수에 대한 적개심이 사라지고 페르시아인들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보기 시작했다. 맨 앞좌석에 앉은 아테네 지도자 페리클레스와 극작가 아이스킬로스는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이들은 아테네가 이제 서양문명의 정신적인 토대인 ‘자비’를 터득하기 시작했다고 믿었다.
자비
지도자의 카리스마는 어디에서 오는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을 적용할 때 생기는가? 그것은 지도자가 ‘자비’를 수련해 실천할 때 생기는 아우라다. 한자 ‘자(慈)’는 나와 이웃, 혹은 나와 제3자의 경계가 허물어져 내가 자신을 위하는 마음만큼 상대방의 행복을 위하는 마음이자 행동이다. ‘慈’는 ‘가물가물하다, 아득하다, 까맣다’란 의미를 가진 ‘현(玄)’ 두 개가 나란히 있다. 나와 너, 나와 제3자의 경계가 가물가물해져,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 상태다. ‘자’는 더 나아가 상대방이 행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는 수고다.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을 인간 동료로 보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살라미스 해전을 보기 시작했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만, 지혜로운 자는 두루두루 본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더 나아가 원수의 입장에서 세상을 관찰한다.
한자 ‘비(悲)’는 상대방이 슬플 때, 함께 슬퍼하는 마음일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슬퍼하지 않고 행복한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마음과 행동이다. 나와 상대방은 새가 날기 위해 좌우로 벌린 날개(非)와 같기 때문이다. ‘비’는 배려하는 마음이다. 상대방이 불편하지 않도록, 나의 말과 행동을 삼갈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처지를 살펴 불편하지 않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행위다. 자비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최고의 덕목일 뿐만 아니라 지도자가 지녀야 할 최고의 무기다. 인간은 모두 자비를 경험했다.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목숨 바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처럼, 인간에겐 모든 생물을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지도자는 적극적인 자비의 실천으로 공동체 일원들의 충성을 자아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비를 자극하는 사람이다.
아가멤논의 악의와 오디세우스의 선의
메넬라오스는 테우크로스에게 아이아스의 광기 어린 행위는 그리스 연합군에 대한 도전이자 반역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아이아스의 시신을 공터에 버려 새들과 들짐승들이 훼손하도록 방치하라고 명령했다. 메넬라오스의 뒤를 따라 그의 형 아가멤논이 등장한다. 아가멤논은 무대에 오르자마자 동생과 마찬가지로 테우크로스를 비난한다. 특히 테우크로스가 서자(庶子)인 점을 약점으로 잡아 놀리며, 그를 대신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인’을 데리고 오라고 말한다. 아가멤논에게 테우크로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는 ‘야만인’일 뿐이다.
오디세우스는 새로운 시대의 지도자다. 상대방을 완력이 아니라 대화와 설득으로 굴복시키는 자다. 그는 테우크로스에게 말한다. “무슨 일입니까? 저는 아트레우스의 아들들(메넬라오스와 아가멤논)이 이 사람(아이아스)의 시신 위에서 고함치는 소리를 멀리서 들었습니다.”(1318~1329행)
오디세우스는 아가멤논을 설득한다. “그러면 잘 들어보십시오. 그대는 이 사람을 매장하지 않은 채 인정사정없이 내던지지 마시오. 그건 정말 무모한 짓입니다. 미움이라는 폭력이 당신을 미치게 해 정의를 짓밟게 해서는 안 됩니다.”(1132~1134행) 인간이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는 이유는 상대방에 대한 미움이 그를 난폭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는 누구보다도 아이아스를 증오하는 사람이었다. 아이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가져간 오디세우스를 실제로 살해하려고 시도했다. “아이아스는 한때 내게도 군대에서 가장 고약한 원수였소. 내가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손에 넣은 뒤부터 말입니다.”(1336~1337행)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아이아스를 자신의 눈이 아니라 객관적인 견지에서 평가한다. 그는 아이아스를 트로이에 온 그리스 군인 중 아킬레우스 다음으로 ‘가장 탁월한 전사’라고 고백한다. 오디세우스는 아이아스가 군인으로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 맞는 ‘명예’를 추서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자신의 적이지만 용감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모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강조한다. 명예는 자신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자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특권이다. 명예로운 사람에 대한 평가는 개인의 사적인 감정을 넘어서는 숭고한 가치가 깃들어 있다. 명예는 그 사회를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기반이다.
아가멤논은 자신이 처한 심리적 딜레마를 이렇게 표현한다. “절대권력을 쥔 자가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절대권력을 쥔 자는 자비를 베풀 필요가 없다. 권력으로 시민들의 복종을 강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테네가 실험하기 시작한 민주주의에서는 대화와 설득만이 시민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다.
설득
오디세우스는 아이아스에 관해 이렇게 정의한다. “그는 내 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숭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숭고한’이란 그리스 형용사 ‘겐나이오스(gennaios)’는 ‘(전쟁에서) 용감한, 존경을 받는’이란 의미다. 숭고함은 아름다움과 추함, 나와 너, 아군과 적군을 초월해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복종을 자아내는 가치다. 오디세우스는 아이아스의 숭고함이 그에 대한 적대감을 해소시켰다고 말한다.
오디세우스는 아이아스의 시신 처리라는 문제에 봉착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실마리를 풀려고 노력한다. 그는 메넬라오스나 아가멤논이 아이아스에게 품은 증오의 감정이 아니라 아이아스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그의 시신을 처리하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판단한다. 아이아스가 그리스와 아테네 공동체를 위해 군인으로서 보여준 최선은 그리스인이 지향해야 할 최선이다. 오디세우스의 설득은 그 문제를 해결(解決·solve)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문젯거리가 되지 않게 해소(解消·dissolve)시켰다.
테우크로스는 아이아스의 무덤을 마련한다. 일꾼들은 빈 구덩이를 파고 그의 시신을 닦을 물이 담긴 세발솥을 데우기 시작한다. 다른 일꾼들은 막사에서 아이아스의 방패와 갑옷을 들고나온다. 그는 아이아스의 아들 에우뤼시케스와 함께 아직도 검은 피가 혈관에서 솟고 있는 아이아스의 시신을 옮긴다. 마지막으로 합창대가 아이아스의 시신을 바라보면서 운명의 ‘장님성’을 노래한다. “사람들은 일단 보고 나면 많은 것을 헤아릴 수 있으나, 보기 전에는 아무도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예언할 수 없구나.”(1419~1420행)
배철현 < 작가 ·고전문헌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