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CJ ENM 제공
제72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CJ ENM 제공
“참으로 시의적절하구나.”

짧게 스쳐가는 대사 한마디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 배우 송강호가 한 대사다. 세계 최고 권위의 칸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가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만으로도 놀랍다. 그런데 마침 올해가 ‘한국영화 100주년’이라니, 이보다 멋진 타이밍이 있을까. 그래서 네티즌 사이에선 이 대사가 화제가 되고 있다.

신기한 점이 또 있다. 작품엔 한국적인 장치로 가득하다. 빈부격차를 드러내는 장소와 원인, 이로 인해 나타나는 주체들의 사소한 행동까지 그렇다. 반지하라는 한국 특유의 공간, 대만 카스텔라 사태가 가져온 사회적 파장,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에 한우를 넣는 행위의 의미. 대한민국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칸 영화제에 온 각국의 사람들은 봉 감독에게 ‘기생충’이 ‘자국 이야기’라고 했다고 한다. 물론 양극화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러나 지극히 한국적인 작품으로 세계를 유유히 관통했다는 점이 경이롭다.

‘기생충’이 증명해 보인 것은 아닐까. 오랫동안 우리가 만들고 가꿔온 ‘문화의 시간’ 말이다. 이는 곧 ‘축적의 시간’이다.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급격한 역사적 파고를 겪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감정과 상상력을 쌓아왔고, 남다른 길을 만들어냈다. 한국영화는 이 문화적 응집력의 표상으로서, 우리도 인식하지 못한 사이 세계 무대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한국영화가 걸어온 걸음이 그리 빠른 편은 아니었다. 세계 최초의 대중영화로 평가받는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이 만들어진 것은 1895년이다. 한국 최초의 영화로 꼽히는 김도산 감독의 ‘의리적 구토’는 그로부터 24년 뒤인 1919년 탄생했다. 의붓어머니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주인공 송산이 복수를 한다는 내용이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도 일본, 중국 등에 비해 한참 늦다.

그러나 더디다고 강하지 않은 건 아니다. 오히려 독자적인 길을 만들어 왔다.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상상적 자아가 투영됐기 때문이다. ≪영화란 무엇인가≫를 쓴 프랑스 영화평론가 앙드레 바쟁은 영화를 ‘분신’이자 ‘거울을 지향하는 인간의 고대적인 꿈’이라고 분석했다. 영화는 각 개인과 사회가 꿈꾸고 욕망하는 자아를 끊임없이 투영한 결과물이라는 얘기다.

올해가 한국 영화 100주년인 동시에 3·1운동 100주년인 것을 떠올려보자. 유독 힘들었던 시기지만, 우리는 영화를 만들어냈고 또 즐겼다. ‘의리적 구토’의 관람권 가격이 꽤 높은 편이었는데도,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근현대에 들어서도 극단의 경험을 해야 했다. 빠른 경제 성장의 기쁨부터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가 가져다준 처절한 좌절감까지. 정치적 위기와 발전도 거듭됐다. 이렇게 차곡차곡 쌓인 감정은 영화에 투영됐다. ‘하녀’의 김기영, ‘오발탄’의 유현목, ‘취화선’의 임권택, ‘박하사탕’의 이창동, ‘올드보이’의 박찬욱 등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작품과 감독의 이름만 꼽아봐도 알 수 있다. 봉 감독도 “한국 영화는 할리우드의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서 발전했다”며 “그 열린 틈을 통해 정치적인 문제, 인간적인 고뇌, 한국인의 삶과 역사가 섞여 들어갔다”고 말했다. 예술은 자유로운 표현을 기반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떠올려 보면, 한국영화는 철저히 이 정의에 부합한다.

지난달 소설가 한강은 100년 후 출간될 미공개 소설 원고를 노르웨이의 ‘미래도서관’에 전달했다. 미래도서관 사업은 2014년부터 100년 동안 매년 작가 한 명의 작품을 받아 2114년에 공개한다. 한강은 원고를 전달하며 말했다. “마침내 첫 문장을 쓰는 순간, 나는 100년 후의 세계를 믿어야 했다.” 우리가 이어가고 있는 문화의 시간도 마찬가지다. 지난 100년간은 그 시간의 힘을 굳이 의식하지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젠 목격하고 있다. 영화뿐만 아니라 K팝 등 다양한 영역에서 쌓아온 우리만의 문화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을. 앞으로 100년, 문화의 시간엔 새로운 의미가 추가될 것 같다. 더욱 나아갈 것이란 ‘믿음의 시간’이다.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