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신규 계좌 개설 시 하루 30만원까지만 이체할 수 있도록 한 ‘한도계좌’ 제도가 소비자 불편을 낳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 광화문의 한 건물 앞에 주요 은행 ATM이 나란히 설치돼 있다.  한경DB
은행 신규 계좌 개설 시 하루 30만원까지만 이체할 수 있도록 한 ‘한도계좌’ 제도가 소비자 불편을 낳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 광화문의 한 건물 앞에 주요 은행 ATM이 나란히 설치돼 있다. 한경DB
서울 마포의 한 주택에 전세로 살고 있는 직장인 A씨는 오는 10월 본인 소유의 인근 아파트에 입주하기로 하고 세입자에게 돌려줄 전세금 마련에 나섰다. 시세 15억원 초과 아파트여서 은행 대출은 불가능했다. 다급해진 그는 백방으로 알아본 끝에 가까스로 한 신용카드사에서 신용대출 5000만원을 받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계열 은행 계좌로만 대출금을 받을 수 있다는 카드사 안내에 그동안 거래 관계가 없던 B은행에서 새로 입출금 계좌를 개설했다. 문제는 이 계좌가 보이스피싱 방지 등을 위한 ‘금융거래 한도계좌’로 분류돼 하루 30만원만 이체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5000만원을 다 찾으려면 5개월이 넘게 걸린다는 얘기다. 당황한 A씨가 은행 영업점 창구에 찾아가 재직증명서와 소득금액확인서 등을 내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은행원이 “신용카드 결제 계좌만 바꾸면 돈을 한꺼번에 찾을 수 있다”고 은근슬쩍 요구했다.

결국 A씨는 주거래은행에 연동돼 있던 신용카드 결제 계좌를 B은행으로 바꿔야 했다. 그는 “내 돈을 내가 찾겠다는데도 은행은 각종 제한을 걸어놓고 신규 영업만 유도하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내 돈도 못 찾게 하나”

금융거래 한도계좌에 대한 소비자 불만이 커지고 있다. 금융거래 한도계좌는 신규로 은행 입출금 계좌를 연 소비자가 각종 증빙서류 등을 내지 못할 경우 인터넷·모바일뱅킹이나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서 하루 30만원, 영업점 창구에선 하루 100만원까지만 이체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제도다.

최근 대출 규제 강화로 주거래은행이 아닌 다른 금융사에서 대출받는 사례가 급증하면서 이 같은 한도계좌에 걸려 불편을 겪는 소비자도 그만큼 늘고 있다. 은행들이 이처럼 한도계좌를 운영하는 이유는 ‘대포통장’과 보이스피싱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금융감독원은 2012년 은행연합회와 신규 통장 개설 시 은행이 금융거래목적을 확인하는 절차를 도입했다. 처음엔 미성년자와 외국인, 단기간에 여러 계좌를 연 사람에게만 확인 서류를 받았지만, 2015년 7월 모든 신규 계좌를 대상으로 금융거래목적 확인서를 받도록 범위를 넓혔다.
"하루 이체 한도 30만원…5천만원 찾으려면 5개월 걸릴 판"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자녀 명의로 각각 은행 계좌를 열어주고 1000만원씩 증여한 직장인 이모씨도 입출금 한도 때문에 은행 창구 직원과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두 자녀에게 우량주식에 장기투자하도록 유도하는 ‘경제 교육’을 해줄 요량이었지만 은행에선 미성년자 계좌 이체가 하루 30만원으로 제한된다고 통보했다. 아무리 항의해봐도 해당 직원은 “은행 규정상 어쩔 수 없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한도 제한을 푸는 기준은 금융거래목적 확인 증빙이다. 신규로 개설한 계좌가 연금 수령, 공과금 자동이체, 모임통장, 카드 결제 등의 용도로 쓰인다는 증거를 은행에 제시하면 제한을 풀 수 있다. 단 미성년자 계좌는 해당 증빙을 제시하더라도 일회성으로만 풀 수 있고 그때그때 사용 목적에 맞는 새로운 증빙 서류를 갖춰 영업점을 방문해야 한다.

증빙 서류는 일반적으로 재직증명서, 근로계약서, 구성원 명부(모임통장의 경우), 공과금 납입 영수증 등이지만 은행마다 기준이 제각각이다. 일부 은행은 ‘영업점 창구 직원 혹은 지점장의 판단’으로 한도 제한을 풀어주기도 한다.

이런 탓에 한도계좌가 은행 마케팅에 이용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대출금을 받는 입출금 계좌나 신용카드 결제 계좌를 당행이나 계열 은행 계좌로만 지정하도록 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한도 제한 규제를 마케팅에 활용”

그나마 5대 은행 중에서는 하나은행이 다른 은행에 비해 한도 제한을 푸는 데 덜 인색하다는 게 소비자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하나은행은 ‘적금 및 청약 최소 10만원 이상, 펀드 3개월 이상 납부 명세’ 등을 내면 제한을 풀어주고 있다. 은행 창구 직원의 ‘재량’ 측면에서도 비교적 융통성이 크다는 평가다.

카카오뱅크와 케이뱅크 등 인터넷전문은행들의 문턱은 더 낮다. 직장인이라면 계좌를 여는 즉시 손쉽게 한도 제한이 풀릴 수 있다. 스마트폰을 통해 은행이 건강보험납입증명원 등의 소득증빙 서류를 자동으로 긁어가기(스크래핑) 때문이다. 대학생은 등록금 납입증명서를, 주부라면 해당 월 포함 2개월간의 통신비 납입 확인서를 사진으로 찍어 내면 해제할 수 있다. 케이뱅크 관계자는 “지점이 없는 은행 특성상 서류가 확인되면 2~3영업일 후 제한을 풀어주고 있다”고 했다.

은행들은 “금융당국이 대포통장, 보이스피싱 계좌에 대해 금융사를 제재하고 있어 한도계좌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금융사고에 대해 ‘문턱만 높이면 되겠지’라며 규제를 만든 정부와 ‘책임만 회피하면 그만’이라는 은행의 태도로 인해 소비자 불편이 가중되고 있다는 불만도 적지 않다. 소비자 불편을 오랫동안 방치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금융전문 변호사는 “금융거래를 제한해 금융사기를 예방한다는 일차원적인 규제와 금융사 태도가 문제”라고 꼬집었다.

김대훈/이호기 기자 daep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