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로마와 신라의 화장실
고대 문명에서는 청결을 경건함 다음으로 중시했다. 남에게 잘 보이려는 게 아니라 신을 숭배하기 위해 몸을 정결히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로마에도 남녀가 모두 사용하는 공동목욕탕과 공중화장실이 많았다. 4세기 무렵 144개의 대형 화장실과 254개의 간이 화장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변기 아래로는 물이 흘러 하수구로 빠져나갔다.

사람들은 칸막이도 없는 이곳에 둘러앉아 용변을 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대부분이 ‘키톤’이라는 긴 옷으로 몸을 가릴 수 있었기에 수치심을 덜 느꼈다고 한다. 화장실 운영은 국가가 맡았고, 시민들은 각자 이용료를 냈다. 소변기를 설치해 오줌만 따로 보관하는 곳도 있었다.

당시에는 비누가 없어 소변을 세척제로 사용했다. 암모니아 성분은 기름때를 제거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가죽제품을 다듬는 데도 필요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소변 관리 등의 위생산업에 특별세를 부과했다. 이를 비난하자 동전 한 개를 코 밑에 들이대며 “돈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했던 일화의 주인공이다.

화장실의 역사는 거의 5000년에 이른다. 최초의 좌변기는 기원전 2500년 인더스 문명 때 등장했다. 벽돌 위에 나무판을 얹고 변기 아래 배수구를 연결한 유적이 발굴됐다. 하수도는 골목을 따라 촘촘히 설치됐다. 여기에 필요한 물은 역청으로 방수 처리한 파이프를 통해 인더스강에서 끌어다 썼다.

중세에는 오염된 물이 병균을 옮긴다며 대중목욕을 기피하고 공중 화장실도 외면했다. 집집마다 요강을 이용했고 오물은 창밖으로 내버렸다. 숙녀들은 치마에 오물이 묻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었다. 가정용 수세식 변기를 고안한 사람은 영국의 존 해링턴(1561~1612)이다. 최초의 특허는 1775년 영국 수학자 알렉산더 커밍이 받았다.

근대식 화장실이 정착한 시기는 콜레라 창궐 이후 위생혁명이 일어난 19세기다. 1847년 영국은 런던의 하수도 시설을 완성하고 모든 분뇨를 여기에 방류하도록 법제화했다. 한국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와 특급호텔, 백화점 등에 수세식 변기가 보급됐다. 주거용 수세식 화장실이 처음 설치된 곳은 광복 후 고려대 담장을 따라 들어선 서울 종암아파트였다.

8세기 통일신라 때의 수세식 화장실 터가 그제 경주 동궁 유적지에서 발견됐다. 고대 화장실 유적 중 변기와 오물 배수시설이 모두 발견된 것은 국내 처음이다. 비슷한 시기의 불국사 석판 변기와 닮았다. 타원형 화강암 아래 배수로의 흔적을 보니 로마 때나 신라 때나 수세식 화장실의 원리가 다를 게 없다. “인간의 역사는 곧 화장실의 역사”라는 빅토르 위고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