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고대국가 압독국
1968년 터파기를 시작한 영남대 캠퍼스는 부지가 넓기로도 유명하지만 대도시 대구 교외의 평지여서 활용도가 높다. 1947년 설립된 옛 대구대학과 1950년 세워진 청구대학이 1967년 말 통합돼 종합대학으로 새출발 하면서 ‘최고급 캠퍼스 부지’를 확보했다.

반(半)백년간 괄목성장을 해온 영남대 캠퍼스가 자리잡은 곳은 경산시 압량(押梁)읍이다. 예부터 ‘압량벌’이라고 불린 너른 평야지대다. 역사적으로 풍수해 피해가 적은 편이고, 한반도에서 연간 일조량이 가장 많은 지역으로 꼽혀온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이 들을 가로지나는 금호강 주변이 온통 사과밭으로 조성됐던 것은 풍부한 햇살과 용수 덕에 가능했다. 당시로서는 자연조건을 최대한 활용한 선진농업 지역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압량의 옛 지명은 압독(押督)이다. 지리적 조건이 좋아서였을까. 2000년 전 이곳에 ‘압독국(압량국)’이라는 부족국가형 고대국가가 존재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5대 파사이사금 23년(102년)에 압독국 왕이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다. 7대 일성이사금 13년(146년)에는 “압독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군사를 보내 평정한 뒤 주민을 남쪽으로 이주시켰다”는 대목도 있다. 삼국유사에도 압독국 언급이 나온다.

신라 진덕여왕 2년(648년) 김유신이 압독주(州) 도독이었다는 사실이나 불교를 일으킨 원효의 태생지가 압독이라는 기록을 보면 압독국이 망한 뒤에도 이곳은 신라의 요지였음이 고증된다. 경주 일대 들판이 압량벌보다 넓은 데다 바다까지 인접해 물산이 풍부했던 덕에 신라의 전신 사로국이 압독국을 이겼다는 해석도 있다.

영남대 정문 건너편 야트막한 구릉지대에 남아 있는 고분군이 압독국 지배계층 무덤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임당동고분군, 조영동고분군, 부적리고분군으로 나눠지는 이곳에는 조사된 무덤만 1500기가 넘는다. 1987년 발굴 때 임당고분에서는 순장 흔적 속에 금동관, 금동신발장신구, 금귀고리, 은허리띠 등 유물 5000여 점이 쏟아졌다.

어제 공개된 경산시 하양읍 목관묘가 압독국의 왕릉급 무덤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평야지대 가운데 있는 임당고분군과 달리 압량들판의 끝자락, 무학산·팔공산으로 이어지는 산기슭에 있다. 1세기 전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무덤에서 중국제 청동거울, 철검, 팔찌 등이 대거 출토됐다. 한 무덤에서 부채가 3개나 나온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규모와 부장품에서 임당고분군을 능가한다고도 한다.

신라에 패망한 압독국의 실체는 어땠을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은 있지만 몇 줄뿐이다. 이후의 기록들은 재인용한 것이다. 하양 목관묘는 또 하나의 고대국가 압독국의 신비를 풀어줄 열쇠가 될 것인가.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