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명저] "사회 신뢰수준이 국가 경쟁력 좌우"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프랜시스 후쿠야마 《트러스트》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신뢰 자본’의 차이다. 신뢰 기반이 없는 나라는 사회적 비용 증가로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하고 말 것이다.”
“현대의 각종 법과 경제제도는 필수적이지만 번영을 유지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제도들이 성공적으로 실행되려면 윤리 규범과 합쳐져야 하기 때문이다. 제도와 계약은 신뢰가 결합할 때 더욱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1995년 펴낸 《트러스트(Trust)》에서 국가 번영을 이루기 위한 중요 요소의 하나로 ‘신뢰’를 지목했다. 일본계 미국인 정치경제학자인 저자는 “경제적 현실을 검토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한 국가의 복지와 경쟁력은 하나의 지배적인 문화적 특성, 즉 한 사회가 고유하게 갖고 있는 신뢰의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후진 사회일수록 신뢰자본 부족
후쿠야마 교수는 1992년 “이데올로기 대결에서 패한 마르크스·헤겔주의적 역사는 끝났다”고 밝힌 《역사의 종언》에 이어 출간한 《트러스트》로 세계적인 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후쿠야마 교수는 “지속 성장을 달성한 국가는 신뢰 자본이 풍부한 국가”라고 했다. 신뢰 수준이 높은 사회일수록 각종 계약·거래와 관련한 불신(不信) 비용이 적어 효율이 높아진다는 설명이다. 사회 구성원이 언제나 서로에게 믿음을 갖고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면, 다양한 거래에서 나타나는 비용이 줄어들고 예상치 못한 손해에 대비해야 할 필요성도 감소한다. 반면 신뢰가 부족한 사회에서는 위험회피 비용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저자는 한 사회의 신뢰 수준이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핵심 요소라고 강조했다. 여기서 말하는 신뢰는 개인 간 관계뿐 아니라 개인과 국가 간 관계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세계은행도 2007년 내놓은 ‘국부는 어디에서 오는가(Where is the wealth of nations)’ 보고서에서 “한 나라의 부(富)는 법질서와 신뢰, 지식경쟁력 등 사회적 자본에서 나온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은 국부의 81%를 사회적 자본으로 만들어냈지만, 후진국으로 갈수록 그 비중이 줄어든다”고 했다.
197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경제학자 케네스 애로가 “모든 상거래는 신뢰라는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경제적 후진성의 대부분은 상호 신뢰 결핍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지적한 것도 같은 얘기다. 상호신뢰 결여가 개발도상국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20여 년 전 분석이지만, 후쿠야마 교수는 대표적인 ‘고(高)신뢰 사회’로 일본, 독일과 함께 미국을 꼽았다. 그는 “이들 국가는 산업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 사회성이라는 건전한 사회적 유산을 갖고 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부문에서 주도적인 강대국이 됐다”고 설명했다. 자발적 사회성은 강한 신뢰를 바탕으로 새로운 집단과 결합·협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저자는 다만, 미국은 신뢰 자본이 쇠퇴하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시민들이 유럽 국가나 일본에 비해 훨씬 많은 돈을 변호사들에게 내는 것이나 치안 비용이 계속 늘어나는 점 등은 사회 신뢰가 감소하면서 비용 증가로 이어진 사례라고 지적했다.
후쿠야마 교수는 《트러스트》에서 한국을 중국 이탈리아 프랑스와 함께 ‘저(低)신뢰 국가’로 분류했다. 혈연이나 지연과 같은 태생적 신뢰가 아니라 사회 공통의 규범을 바탕으로 서로 믿고 존중하며 자발적으로 협력하게 하는 신뢰는 부족하다는 설명이다. 규범과 가치에 대한 사회적 공유가 안 되고 있다는 것으로, 저자는 “가족적 유대만을 유지하고자 하는 가족주의는 경제 발전에 장애가 된다”고 꼬집었다.
후쿠야마 교수가 지금 개정판을 낸다면 한국 사회의 신뢰 수준을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해진다. 어렵게 쌓은 기존의 신뢰 자본마저 훼손했다고 지적하지는 않을지 걱정스럽다.
규제는 저(低)신뢰 사회의 단면
한국 사회에서 개개인 사이의 거래를 둘러싼 민·형사 소송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은 물론, 법 규범과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 부족으로 인한 정치·사회적 갈등이 잇따르고 있어서다.
후쿠야마 교수 분석에 따르면 겹겹이 쌓인 정부 규제 역시 신뢰 부족 사회의 한 단면이다. 신뢰가 없다 보니 모든 것을 규정으로 명문화하고, 그래야 책임을 면할 수 있는 사회가 됐다. 신뢰 수준이 높은 사회라면 전혀 들일 필요가 없는 비용과 시간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정부는 사회적 자본을 고갈시키는 정책은 손쉽게 시행할 수 있지만, 다시 일으키는 방법을 찾아내는 데는 큰 어려움을 겪는다.” 후쿠야마 교수는 국민 신뢰기반을 훼손할 수 있는 정책을 남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사회 전체가 높은 수준의 신뢰성을 갖추지 못하면 그 사회의 경제발전은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발전을 위해 법과 제도들이 제대로 작동하게 하려면 사회적 신뢰 수준부터 끌어올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수언 논설위원 sookim@hankyung.com
“현대의 각종 법과 경제제도는 필수적이지만 번영을 유지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제도들이 성공적으로 실행되려면 윤리 규범과 합쳐져야 하기 때문이다. 제도와 계약은 신뢰가 결합할 때 더욱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1995년 펴낸 《트러스트(Trust)》에서 국가 번영을 이루기 위한 중요 요소의 하나로 ‘신뢰’를 지목했다. 일본계 미국인 정치경제학자인 저자는 “경제적 현실을 검토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한 국가의 복지와 경쟁력은 하나의 지배적인 문화적 특성, 즉 한 사회가 고유하게 갖고 있는 신뢰의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후진 사회일수록 신뢰자본 부족
후쿠야마 교수는 1992년 “이데올로기 대결에서 패한 마르크스·헤겔주의적 역사는 끝났다”고 밝힌 《역사의 종언》에 이어 출간한 《트러스트》로 세계적인 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후쿠야마 교수는 “지속 성장을 달성한 국가는 신뢰 자본이 풍부한 국가”라고 했다. 신뢰 수준이 높은 사회일수록 각종 계약·거래와 관련한 불신(不信) 비용이 적어 효율이 높아진다는 설명이다. 사회 구성원이 언제나 서로에게 믿음을 갖고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면, 다양한 거래에서 나타나는 비용이 줄어들고 예상치 못한 손해에 대비해야 할 필요성도 감소한다. 반면 신뢰가 부족한 사회에서는 위험회피 비용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저자는 한 사회의 신뢰 수준이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핵심 요소라고 강조했다. 여기서 말하는 신뢰는 개인 간 관계뿐 아니라 개인과 국가 간 관계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세계은행도 2007년 내놓은 ‘국부는 어디에서 오는가(Where is the wealth of nations)’ 보고서에서 “한 나라의 부(富)는 법질서와 신뢰, 지식경쟁력 등 사회적 자본에서 나온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은 국부의 81%를 사회적 자본으로 만들어냈지만, 후진국으로 갈수록 그 비중이 줄어든다”고 했다.
197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경제학자 케네스 애로가 “모든 상거래는 신뢰라는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경제적 후진성의 대부분은 상호 신뢰 결핍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지적한 것도 같은 얘기다. 상호신뢰 결여가 개발도상국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20여 년 전 분석이지만, 후쿠야마 교수는 대표적인 ‘고(高)신뢰 사회’로 일본, 독일과 함께 미국을 꼽았다. 그는 “이들 국가는 산업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 사회성이라는 건전한 사회적 유산을 갖고 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부문에서 주도적인 강대국이 됐다”고 설명했다. 자발적 사회성은 강한 신뢰를 바탕으로 새로운 집단과 결합·협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저자는 다만, 미국은 신뢰 자본이 쇠퇴하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시민들이 유럽 국가나 일본에 비해 훨씬 많은 돈을 변호사들에게 내는 것이나 치안 비용이 계속 늘어나는 점 등은 사회 신뢰가 감소하면서 비용 증가로 이어진 사례라고 지적했다.
후쿠야마 교수는 《트러스트》에서 한국을 중국 이탈리아 프랑스와 함께 ‘저(低)신뢰 국가’로 분류했다. 혈연이나 지연과 같은 태생적 신뢰가 아니라 사회 공통의 규범을 바탕으로 서로 믿고 존중하며 자발적으로 협력하게 하는 신뢰는 부족하다는 설명이다. 규범과 가치에 대한 사회적 공유가 안 되고 있다는 것으로, 저자는 “가족적 유대만을 유지하고자 하는 가족주의는 경제 발전에 장애가 된다”고 꼬집었다.
후쿠야마 교수가 지금 개정판을 낸다면 한국 사회의 신뢰 수준을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해진다. 어렵게 쌓은 기존의 신뢰 자본마저 훼손했다고 지적하지는 않을지 걱정스럽다.
규제는 저(低)신뢰 사회의 단면
한국 사회에서 개개인 사이의 거래를 둘러싼 민·형사 소송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은 물론, 법 규범과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 부족으로 인한 정치·사회적 갈등이 잇따르고 있어서다.
후쿠야마 교수 분석에 따르면 겹겹이 쌓인 정부 규제 역시 신뢰 부족 사회의 한 단면이다. 신뢰가 없다 보니 모든 것을 규정으로 명문화하고, 그래야 책임을 면할 수 있는 사회가 됐다. 신뢰 수준이 높은 사회라면 전혀 들일 필요가 없는 비용과 시간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정부는 사회적 자본을 고갈시키는 정책은 손쉽게 시행할 수 있지만, 다시 일으키는 방법을 찾아내는 데는 큰 어려움을 겪는다.” 후쿠야마 교수는 국민 신뢰기반을 훼손할 수 있는 정책을 남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사회 전체가 높은 수준의 신뢰성을 갖추지 못하면 그 사회의 경제발전은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발전을 위해 법과 제도들이 제대로 작동하게 하려면 사회적 신뢰 수준부터 끌어올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수언 논설위원 so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