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선의 'ASEAN 톺아보기' (20)] 1만7500개 섬나라의 직접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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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선 <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前 한·아세안센터 사무총장 >
인도네시아는 지난달 17일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조코 위도도(조코위) 대통령의 재선이 확실시되는 가운데 공식 개표 결과는 오는 22일 발표될 예정이다. 그런데 선거 과정에 동원된 군·경찰 및 선거요원 중 사고 및 과로로 순직한 사람이 300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또 이들을 ‘선거 영웅’으로 추모한다는 소식이다. 인도네시아는 한반도 면적의 아홉 배나 되고 1만7500여 개의 섬으로 이뤄진 해양국가다. 투표함 등 투표 용품을 제때 공급하고, 개표 결과를 사고 없이 선거관리위원회로 이관하는 일이 보기보다 쉽지 않다.
이번 인도네시아 대선이 특히 주목을 끈 것은 하루 일정으로 치러지는 선거 중 세계에서 가장 크고 복잡한 선거였다는 점이다. 약 1억9300만 명의 유권자가 대통령뿐 아니라 국회의원 575명, 상원에 해당하는 지역대표협의회 의원 136명, 주 및 시·군 단위 지방의원 1만9817명 등 2만528명을 동시에 뽑는 선거였다. 출마 후보자만 24만5000명에 이르렀다. 이를 위해 560만 명의 선거 관리요원과 50만 명의 군·경찰이 동원됐다.
민주화 과정 험난했던 인도네시아
약 200만 명에 대한 해외 부재자 투표도 전 세계 130개 대사관 및 영사관에서 치러졌다. 공식 투표소뿐 아니라 공장지대와 같이 유권자가 많이 거주하는 곳은 이동식 투표소도 운영하고 우편 투표도 인정했다는 점에서 우리보다 훨씬 진전된 방식이다. 한국에 거주하는 7094명의 유권자는 13개 투표소에서 투표했고, 많은 이들이 적극적으로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아시아에서 대통령을 직접선거로 선출하는 나라는 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3개국뿐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4000달러가 채 안 되는 인도네시아가 이처럼 엄청난 비용과 노력을 들여 선거를 치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도네시아의 민주화 과정은 우리의 굴곡진 정치 발전 과정 못지않게 험난했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은 350년간의 네덜란드 식민지배와 3년 반 동안의 일본점령이 끝나고도 바로 찾아오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네덜란드의 재점령 기도에 대항한 4년간의 처절한 독립전쟁을 치른 뒤에야 비로소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그것도 일부 지역에 국한된 독립이었다. 오늘날의 영토를 경계로 한 완전한 독립은 1963년이 돼서야 가능했다.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의 국가이념인 ‘판차실라(Pancasila)’를 수립하고 다종교·다종족·다문화 사회의 인도네시아를 하나의 국가로 통합했다. 전후 동서냉전의 격랑 속에서 반식민·비동맹운동을 주도함으로써 국민에게 자긍심을 심어줬다. 그러나 수카르노는 교도민주주의(敎導民主主義)를 주창하고 종신제 대통령을 추구해 인도네시아를 극도의 혼란에 빠뜨렸다. 급기야 공산당 세력의 쿠데타로 퇴진하게 된다.
‘신질서’를 기치로 내건 수하르토 대통령은 실용주의 노선에 따라 경제발전에 진력했다. 그러나 장기 집권으로 이어지면서 신질서는 부정부패, 족벌주의 및 밀실주의로 전락했다. 1997년 아시아를 덮친 금융위기가 직접적인 원인이 돼 이듬해 수하르토 정권은 붕괴한다.
이후 하비비-와히드-메가와티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문민정부는 보다 민주적인 정치체제를 추구했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네 차례의 헌법 개정을 통해 직접선거에 의한 대통령 선출, 대통령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견제와 균형, 지방분권 강화 등을 규정했다.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출은 국회 간접선거에서 국민 직접선거에 의한 5년 임기, 중임제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2004년 첫 직접선거로 유도요노 대통령이 선출됐고 2009년 재선됐다.
2014년 대선에서 조코위 대통령의 등장은 인도네시아 민주정치 발전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강변의 무허가 주택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조코위는 대학에서 임학을 전공하고 가구업으로 자수성가했다. 이어 지방도시인 솔로시의 시장이 됐고 전격적으로 자카르타 주지사에 당선된 뒤 마침내 국가수반이 됐다.
조코위의 과제는 '국민통합'
과두정치가 특징인 동남아 정치에서 정치적 기반이 없던 서민 출신이 지도자가 됐다는 것은 직선제 대통령제가 아니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조코위 대통령의 재선은 구태를 답습하는 정치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열망과 조코위 대통령의 정책 기조에 대한 국민의 평가로 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 민주정치의 발전은 아직은 민주화 과정의 진통을 겪고 있는 여타 아세안 국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코위 대통령에게도 도전과제가 적지 않다. 민주화로 높아진 다양한 국민적 여망을 어떻게 두루 충족시킬 것인지, 이번 선거로 인해 양극화된 진영의 논리를 어떻게 조화롭게 통합시킬 것인가 등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이슬람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이 우려했던 것보다 크게 작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후보의 지지 지역이 확연히 구분됐고, 이는 온건 또는 보수 이슬람 세력이 우세한 지역과 관계가 있다. 인도네시아인의 특성인 ‘관용과 화합’의 정신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번 인도네시아 대선이 특히 주목을 끈 것은 하루 일정으로 치러지는 선거 중 세계에서 가장 크고 복잡한 선거였다는 점이다. 약 1억9300만 명의 유권자가 대통령뿐 아니라 국회의원 575명, 상원에 해당하는 지역대표협의회 의원 136명, 주 및 시·군 단위 지방의원 1만9817명 등 2만528명을 동시에 뽑는 선거였다. 출마 후보자만 24만5000명에 이르렀다. 이를 위해 560만 명의 선거 관리요원과 50만 명의 군·경찰이 동원됐다.
민주화 과정 험난했던 인도네시아
약 200만 명에 대한 해외 부재자 투표도 전 세계 130개 대사관 및 영사관에서 치러졌다. 공식 투표소뿐 아니라 공장지대와 같이 유권자가 많이 거주하는 곳은 이동식 투표소도 운영하고 우편 투표도 인정했다는 점에서 우리보다 훨씬 진전된 방식이다. 한국에 거주하는 7094명의 유권자는 13개 투표소에서 투표했고, 많은 이들이 적극적으로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아시아에서 대통령을 직접선거로 선출하는 나라는 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3개국뿐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4000달러가 채 안 되는 인도네시아가 이처럼 엄청난 비용과 노력을 들여 선거를 치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도네시아의 민주화 과정은 우리의 굴곡진 정치 발전 과정 못지않게 험난했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은 350년간의 네덜란드 식민지배와 3년 반 동안의 일본점령이 끝나고도 바로 찾아오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네덜란드의 재점령 기도에 대항한 4년간의 처절한 독립전쟁을 치른 뒤에야 비로소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그것도 일부 지역에 국한된 독립이었다. 오늘날의 영토를 경계로 한 완전한 독립은 1963년이 돼서야 가능했다.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의 국가이념인 ‘판차실라(Pancasila)’를 수립하고 다종교·다종족·다문화 사회의 인도네시아를 하나의 국가로 통합했다. 전후 동서냉전의 격랑 속에서 반식민·비동맹운동을 주도함으로써 국민에게 자긍심을 심어줬다. 그러나 수카르노는 교도민주주의(敎導民主主義)를 주창하고 종신제 대통령을 추구해 인도네시아를 극도의 혼란에 빠뜨렸다. 급기야 공산당 세력의 쿠데타로 퇴진하게 된다.
‘신질서’를 기치로 내건 수하르토 대통령은 실용주의 노선에 따라 경제발전에 진력했다. 그러나 장기 집권으로 이어지면서 신질서는 부정부패, 족벌주의 및 밀실주의로 전락했다. 1997년 아시아를 덮친 금융위기가 직접적인 원인이 돼 이듬해 수하르토 정권은 붕괴한다.
이후 하비비-와히드-메가와티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문민정부는 보다 민주적인 정치체제를 추구했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네 차례의 헌법 개정을 통해 직접선거에 의한 대통령 선출, 대통령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견제와 균형, 지방분권 강화 등을 규정했다.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출은 국회 간접선거에서 국민 직접선거에 의한 5년 임기, 중임제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2004년 첫 직접선거로 유도요노 대통령이 선출됐고 2009년 재선됐다.
2014년 대선에서 조코위 대통령의 등장은 인도네시아 민주정치 발전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강변의 무허가 주택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조코위는 대학에서 임학을 전공하고 가구업으로 자수성가했다. 이어 지방도시인 솔로시의 시장이 됐고 전격적으로 자카르타 주지사에 당선된 뒤 마침내 국가수반이 됐다.
조코위의 과제는 '국민통합'
과두정치가 특징인 동남아 정치에서 정치적 기반이 없던 서민 출신이 지도자가 됐다는 것은 직선제 대통령제가 아니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조코위 대통령의 재선은 구태를 답습하는 정치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열망과 조코위 대통령의 정책 기조에 대한 국민의 평가로 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 민주정치의 발전은 아직은 민주화 과정의 진통을 겪고 있는 여타 아세안 국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코위 대통령에게도 도전과제가 적지 않다. 민주화로 높아진 다양한 국민적 여망을 어떻게 두루 충족시킬 것인지, 이번 선거로 인해 양극화된 진영의 논리를 어떻게 조화롭게 통합시킬 것인가 등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이슬람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이 우려했던 것보다 크게 작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후보의 지지 지역이 확연히 구분됐고, 이는 온건 또는 보수 이슬람 세력이 우세한 지역과 관계가 있다. 인도네시아인의 특성인 ‘관용과 화합’의 정신이 요구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