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한·일 갈등,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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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정치가 부른 경제 갈등
경제전쟁을 원치 않는다면
제3자에게 판단을 맡기거나
서로의 퇴로 모색하는
외교적 해결에 집중해야
최병일 < 이화여대 교수·한국국제경제학회 회장 >
경제전쟁을 원치 않는다면
제3자에게 판단을 맡기거나
서로의 퇴로 모색하는
외교적 해결에 집중해야
최병일 < 이화여대 교수·한국국제경제학회 회장 >
전쟁으로 얼룩진 근대 유럽에서 독일 통일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전쟁론》의 저자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는 통찰을 남겼다. 세계 반도체 시장의 대표주자로 부상한 한국에 핵심 소재의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공급을 위협하는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는 일본 국내 정치의 연장이다. 그런 일본에 대응해 30대 기업 총수들을 청와대로 불러 ‘3분 발언 회동’을 하고 일본의 행태를 “경제 침략”으로 규정한 문재인 대통령의 행보도 국내 정치의 연장이다. 아베 신조 총리가 한·일 간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고 심화돼온 가치사슬을 차단하는 선택을 한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된 중국과의 가치사슬을 차단하려는 무역전쟁을 선택한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최근 한·일 갈등의 본질은 경제 분쟁이 아닌, 불행했던 과거사를 둘러싼 양국의 메울 수 없는 간극과 대치라는 정치의 산물이란 점이다. 한국의 분열적인 정치와 리더십 부재가 가해자인 일본을 되레 국제규범을 준수하는 국가로 둔갑시키는 상황 반전은 한국인을 화나게 하고 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웬만해선 무역제재란 수단을 쓰지 않는 자유무역체제에서의 ‘레드라인’을 세계 경제대국 최상위를 차지하는 미국, 중국, 일본이 앞장서서 무너뜨리고 있다. 지극히 불행하고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감정과 흥분만으로는 이 낯선 세상을 헤쳐나가기 역부족이다.
정치권은 소재산업의 국산화와 수입처 다변화를 주창하지만, 이런 형국을 맞을 때마다 흘러나오는 ‘유행가’란 점을 기업하는 사람들은 다 안다. 그게 그렇게 쉽다면 왜 진작 하지 못했을까. 이번에는 다를까. 막연한 기대가 희망으로 연결되려면 한국은 절대적으로 시간을 벌어야 한다. 경제전쟁이 아니라 외교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다. 서양의 《전쟁론》에 필적하는 동양의 《손자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의 승리”라고 소모적인 전쟁의 참상을 경고했다.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은 양국 간 분쟁이 있을 때 외교 경로를 통해 해결하고, 해결이 안 될 경우 양국이 임명하는 위원 등으로 중재위원회를 구성하며, 중재위 구성이 안 되면 제3국 정부가 중재위원을 임명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중재를 거부하고 있다. 일본이 중재를 원하는데 한국이 중재에 응하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면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사법부의 판단에 간섭할 수 없다는 논리 속으로 숨는다. 사법부는 국가를 초월하는 존재일 수 없다. 이 때문에 국내 사법적인 판단이 국가가 맺은 국제조약의 권리 및 의무와 합치해야 한다는 것쯤은 복잡한 국제법 체계를 동원하지 않아도 상식에 속한다. ‘사법 독주’가 아닌, ‘사법 자제’는 국제사회 책임있는 국가의 필수덕목이다. 그렇지 않다면 국제조약은 종잇조각에 불과하고, 국제사회는 힘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정글이 될 것이다.
강제징용에 대한 개인청구권을 허용한 한국 사법부의 판정을 “사법독주”라고 주장하는 일본과 그렇지 않다는 한국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리는 상황에서 한·일 양국이 합의한 중재라는 절차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국제규범에 지탱해서 여기까지 성장해온 대한민국이라면 더더구나 그렇다.
중재를 거부한다면 다른 선택지는 외교 협상, 아니면 경제전쟁이다. 중재로 간다고 반드시 어느 한쪽이 유리하다고 할 수 없다. 국가 간 협정으로 모든 것이 해결됐다는 일본의 주장과 “개인청구권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한국의 주장 중 어느 것이 국제규범과 일치하는지를 제3자가 판단하는 것은 후쿠시마 수산물의 금수조치를 세계무역기구(WTO) 분쟁절차라는 제3자의 판단에 맡기는 것과 같다. 중재는 갈등이 상승 국면으로 치닫는 한·일 양국에 출구를 제공할 것이다.
만약 제3자 중재라는 불안함에 운명을 맡기기보다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결기라면, 그것은 상호파괴적인 경제전쟁이 아니라 정상 국면으로 회귀하기 위해 서로의 퇴로를 모색하는 외교에 집중해야 마땅하다. “과거와 현재가 싸우면 미래가 위험해진다”고 한 윈스턴 처칠의 경구는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의 상황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최근 한·일 갈등의 본질은 경제 분쟁이 아닌, 불행했던 과거사를 둘러싼 양국의 메울 수 없는 간극과 대치라는 정치의 산물이란 점이다. 한국의 분열적인 정치와 리더십 부재가 가해자인 일본을 되레 국제규범을 준수하는 국가로 둔갑시키는 상황 반전은 한국인을 화나게 하고 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웬만해선 무역제재란 수단을 쓰지 않는 자유무역체제에서의 ‘레드라인’을 세계 경제대국 최상위를 차지하는 미국, 중국, 일본이 앞장서서 무너뜨리고 있다. 지극히 불행하고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감정과 흥분만으로는 이 낯선 세상을 헤쳐나가기 역부족이다.
정치권은 소재산업의 국산화와 수입처 다변화를 주창하지만, 이런 형국을 맞을 때마다 흘러나오는 ‘유행가’란 점을 기업하는 사람들은 다 안다. 그게 그렇게 쉽다면 왜 진작 하지 못했을까. 이번에는 다를까. 막연한 기대가 희망으로 연결되려면 한국은 절대적으로 시간을 벌어야 한다. 경제전쟁이 아니라 외교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다. 서양의 《전쟁론》에 필적하는 동양의 《손자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의 승리”라고 소모적인 전쟁의 참상을 경고했다.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은 양국 간 분쟁이 있을 때 외교 경로를 통해 해결하고, 해결이 안 될 경우 양국이 임명하는 위원 등으로 중재위원회를 구성하며, 중재위 구성이 안 되면 제3국 정부가 중재위원을 임명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중재를 거부하고 있다. 일본이 중재를 원하는데 한국이 중재에 응하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면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사법부의 판단에 간섭할 수 없다는 논리 속으로 숨는다. 사법부는 국가를 초월하는 존재일 수 없다. 이 때문에 국내 사법적인 판단이 국가가 맺은 국제조약의 권리 및 의무와 합치해야 한다는 것쯤은 복잡한 국제법 체계를 동원하지 않아도 상식에 속한다. ‘사법 독주’가 아닌, ‘사법 자제’는 국제사회 책임있는 국가의 필수덕목이다. 그렇지 않다면 국제조약은 종잇조각에 불과하고, 국제사회는 힘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정글이 될 것이다.
강제징용에 대한 개인청구권을 허용한 한국 사법부의 판정을 “사법독주”라고 주장하는 일본과 그렇지 않다는 한국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리는 상황에서 한·일 양국이 합의한 중재라는 절차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국제규범에 지탱해서 여기까지 성장해온 대한민국이라면 더더구나 그렇다.
중재를 거부한다면 다른 선택지는 외교 협상, 아니면 경제전쟁이다. 중재로 간다고 반드시 어느 한쪽이 유리하다고 할 수 없다. 국가 간 협정으로 모든 것이 해결됐다는 일본의 주장과 “개인청구권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한국의 주장 중 어느 것이 국제규범과 일치하는지를 제3자가 판단하는 것은 후쿠시마 수산물의 금수조치를 세계무역기구(WTO) 분쟁절차라는 제3자의 판단에 맡기는 것과 같다. 중재는 갈등이 상승 국면으로 치닫는 한·일 양국에 출구를 제공할 것이다.
만약 제3자 중재라는 불안함에 운명을 맡기기보다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결기라면, 그것은 상호파괴적인 경제전쟁이 아니라 정상 국면으로 회귀하기 위해 서로의 퇴로를 모색하는 외교에 집중해야 마땅하다. “과거와 현재가 싸우면 미래가 위험해진다”고 한 윈스턴 처칠의 경구는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의 상황에도 그대로 적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