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표기업인 삼성이 극심한 무기력증에 빠져들고 있다. 사정기관의 전방위 압박, 반도체 불황, 미·중 무역전쟁, 일본의 경제보복 등 대외 불확실성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혁신 부재와 비전 실종 등 내부 위기요인까지 불거지고 있다. 한마디로 내우외환의 ‘퍼펙트 스톰(초강력 폭풍)’이 덮친 상황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비상경영을 선언하고 신사업과 투자를 직접 챙기는 등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힘겨워보인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삼성의 ‘전매특허’인 빠른 의사결정과 강한 조직력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계열사·사업부별 협력도 눈에 띄게 약해지고 있어서다. 자부심, 강한 조직력, 1등 정신 등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던 예전 모습이 사라지면서 그저 그런 조직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삼성 위기의 가장 큰 요인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사정기관의 먼지털기식 ‘적폐 청산’ 수사가 꼽힌다. 삼성은 지난 2년간 다스 소송비 지원 혐의,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 및 증거인멸 혐의 등으로 20여 차례나 압수수색을 당했다. 압수수색 장소도 이건희 회장 자택, 삼성본관 등 150여 곳에 달했다.

이 과정에서 검찰의 무차별적인 별건(別件) 수사가 이뤄졌고, 확정되지도 않은 피의사실들이 공공연하게 공표됐다. 김태한 삼성바이오로직스 사장은 두 차례나 구속영장이 청구됐다가 기각 당했고, 이 회사의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스무 번 넘게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았다. 임직원들의 일상 업무와 경영 활동들은 잠재적 수사 대상이 됐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미래 투자’인 기업 인수합병(M&A)과 사업구조 재편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삼성은 ‘24시간’을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쓰고 있다”는 한 원로 기업인의 우려가 나온 배경이다.

더 큰 문제는 직원들의 이탈 조짐이다. 삼성에 덧씌워진 ‘적폐 기업’ 프레임과 이에 따른 ‘리스크 최소화 우선주의’ 탓에 조직 문화도 급속히 보수화되고 있다. 젊은 직원들 사이에선 “미래가 안 보인다”며 유망 스타트업이나 외국계 기업으로 이직하려는 ‘탈(脫)삼성’ 분위기마저 감지되고 있다고 한다.

삼성의 위기는 한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삼성의 간판 기업인 삼성전자 매출은 국내총생산(GDP)의 10%가 넘고, 유가증권시장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에 육박한다. 삼성이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차치하더라도, 삼성이 처한 현실은 국내 주요 기업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그마한 혐의라도 나오면 검찰 경찰 국세청 등 국가기관들로부터 무차별 압수수색을 당하거나 소환 조사를 받는 기업이 적지 않다. 산업안전보건법과 화학물질관리법 등 기업인과 기업 경영을 옥죄는 모호하고 과도한 법규도 부지기수다.

지금 우리 경제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서 있다. 국내 간판기업들이 더 나은 미래를 여는 혁신과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지 못하면 우리 경제의 미래도 장담하지 못한다. 정부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은 국부(國富)와 고용의 원천인 기업들이 미래를 향해 뛸 수 있도록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고 경영에 집중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기업들이 ‘과거’에 발목 잡혀 귀중한 재원과 시간을 허비하는 건 국가적인 불행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