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WTO 개도국 지위 포기, 대신 무얼 얻었나
“한국인의 최대 명절인 추석이 되면 도로, 항만, 철도는 귀성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길고 지루한 고생길을 마다하지 않고 고향을 찾는 한국인들에게 농촌은 마음의 고향입니다.” 1990년 초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우루과이라운드 농산물협상에서 나온 한국 대표의 발언이다. 농업 개방을 막아내려던 한국은 식량주권론만으론 어렵다고 판단하고, 농업과 농촌은 한국인 삶의 정체성이라는 비장한 카드까지 끄집어냈다.

몇 차례 타결 시한을 넘긴 우루과이라운드가 극적으로 타결되기 직전인 1993년 12월, 한국의 일부 국회의원과 풍물놀이패가 제네바 원정시위를 감행, 삭발과 꽹과리 소리로 농업 개방에 반대했다. 예외 없는 관세화를 몰아붙이는 선진국의 압박 속에 한국은 쌀에 대해서만 ‘10년+추가 10년 개방유예’를 받아내고 협상을 마무리지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한국은 1995년 1월 출발하는 세계무역기구(WTO)라는 기차의 탑승권을 확보했다. 한국은 스스로 ‘개발도상국’이라고 부르는 특별석에 앉았다. 다른 국가들은 이런 한국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국제무대에선 상대국 시선에 비친 국가의 모습이 중요하다. 그들 눈에 비친 한국은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면서부터 선진국이었다. 개도국임을 우기는 한국은 국제무대에서 의무는 지지 않고 권리만 주장하면서 무임승차의 얌체짓을 하는 나라라는 비난과 조롱거리일 뿐이었다.

2001년 출범한 WTO 도하라운드 협상에서 한국은 ‘개도국 지위’를 견지했다. 2008년 타결의 계기를 맞은 도하라운드에서 한국의 개도국 지위는 거센 도전과 반발에 직면했다. 한국의 개도국 지위 관철은 쉽지 않아 보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도하라운드는 그때 타결에 이르지 못하고 지금까지 10년 넘게 표류하고 있다.

1995년의 한국은 국민소득 1만달러 직전이었고 이제 한국은 국민소득 3만달러, 세계 10위권 경제, 7대 무역국가 반열에 올랐다. 더 이상 개도국임을 주장할 명분이 없다. 지난주 정부가 한국의 WTO 개도국 지위 포기를 선언한 배경엔 이런 이유가 작동했다.

문제는 자발적으로 개도국 지위 포기를 선언한 것이 아니라 압박에 의한 포기라는 점이다. 그 상대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트럼프는 지난여름 “개도국 지위를 넘어선 국가들이 WTO에서 부당한 특혜를 누리고 있다”고 압박했다. OECD 가입국, G20 국가, 세계은행 분류 고소득 국가, 세계 상품무역 비중 0.5% 등 미국이 제시한 4개 기준에 한국은 모두 포함된다. 미국의 일방적인 주장이지만 싱가포르와 브라질은 개도국 지위를 포기했고, 한국도 그들을 따랐다.

그럼 한국 정부가 얻어낸 것은 무엇일까? 트럼프는 철강 수입이 미국 안보를 위협한다는 주장으로 25%의 철강 수입 관세를 부과했다. 한국은 수출 물량을 70%로 제한하는 쿼터에 합의했다. 트럼프는 자동차 수입이 미국 안보를 위협한다는 억지 논리를 펴면서 관세 인상 카드도 만지작거리고 있다. 독일, 일본, 한국 등 자동차 생산 국가들이 숨을 죽이고 있다. 방위비 협상에서 미국은 한국의 분담금 파격 증가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의 개도국 지위 포기는 일부의 관측대로 트럼프 압박에 대한 대응 카드가 될 수 있을까?

한국의 개도국 지위 포기는 트럼프 입장에서 적폐청산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한국은 더 많은 양보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양보가 어떤 기준과 원칙에 따라 이뤄지는가, 그래서 국민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협상 과정에서 불가피한 한국의 양보가 원칙 없는 흥정의 결과물일 때, 국익은 훼손되고 더 큰 양보를 자초하게 될 것이다.

또 다른 관건은 농업의 특수성을 이유로 개도국 지위를 고집했던 한국이 농업 분야 생존 전략을 제대로 구상했느냐 하는 점이다. 세계 최대 농업 소비시장을 이웃에 둔 한국은 그 세월 동안 매력적인 친환경 선진 농업국으로 전환할 수 있었음에도 늘 수세적이고 단기적인 대책으로 일관했다. 이제는 달라질 수 있을까. 농업 개방 얘기만 나오면 성난 농심을 달랜다는 명목으로 퍼주기로 일관하던 한국의 농업정책이 까먹은 지난 세월은 누가 보상해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