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포스트 지소미아, 어디로?
폐기가 기정사실화되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이 조건부 연장됐다. 북한의 핵도발 수위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한·일 간 군사정보 공유를 위해 체결된 지소미아는 문재인 정부에서도 매년 연장돼 왔다. 올여름 한국 정부는 돌연 지소미아 폐기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 조치에 대응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지난 8월 22일 정부는 일본 측에 ‘지소미아 종료’를 통보했다. 그 후 3개월 뒤면 폐기될 운명을 맞은 지소미아. 지난주 금요일 밤 12시(23일 0시)면 지소미아는 폐기되는 수순이었다.

한국 정부가 지소미아 폐기 카드를 꺼낸 직후부터 미국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미 국무부, 국방부 최고위급이 총동원돼 한국 정부를 압박했다.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지난주에는 미 국방부 장관이 서울로 날아와 문재인 대통령을 만났다. 미 의회 상원은 만장일치로 ‘지소미아 연장 촉구’를 결의했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일본이 수출규제 조치를 원상 복원해야 한다고 맞섰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꿈쩍하지 않았다. 한·일 간 명분 싸움은 ‘치킨 게임’을 연상케 했다.

한국이 끝까지 밀어붙여 지소미아가 폐기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동맹국의 강력한 반발에도 ‘마이웨이’를 고집한 대가는 혹독했을 것이다. 결정을 미루던 자동차 분야 232조 조치가 발동돼 25% 관세 폭탄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거론되기 시작한 주한미군 감축론이 힘을 얻고, 안보 리스크로 한국 경제의 신뢰가 흔들리고, 한국의 신용평가 등급이 하향 조정되는 사태도 예견됐다. 한국의 수출은 직격탄을 맞고, 외국인 투자는 한국을 탈출하는 상상하기 어려운 격랑 속으로 내몰릴 수 있었다.

지소미아 폐기는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판도라 상자’를 열 뻔했다. 폐기 시한 6시간을 앞두고 시계는 멈췄다. ‘연장’이 아니라 ‘폐기통보 효력중지’라는 난해한 단어 속에는 언제라도 다시 스톱워치를 누를 수 있다는 위협이 숨어 있지만, 최악의 상황은 면한 셈이다.

그러나 일본은 수출규제 조치를 원상 복원하지 않았다. 실무국장급 협의 개최가 고작이다. 그래서 ‘현찰 주고 어음 받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애초부터 지소미아 카드로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응한 것은 무리한 자해행위였다. 아베 총리의 수출규제 카드는 국내 정치용이었는데, 지소미아 카드로 대응한 것은 부적절했다.

지소미아 카드를 꺼낸 지난 3개월간, 한국 외교가 경험한 것은 현실의 벽이었다. 지소미아 파기는 일본의 확실한 양보를 얻어내지 못했고, 한·미·일 안보 협력구도를 훼손하고, 한·미 동맹에도 심각한 상처를 남겼다. 지소미아를 둘러싼 국내 갈등이 고조되고 국론은 분열됐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일본이 수출규제를 풀지 않으면 지소미아 카드를 다시 꺼내 들 수 있다고 정부는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한·일 간 군사정보 공유협정인 지소미아 파기에 미국이 그토록 강하게 반발한 것은 지소미아가 동북아 한·미·일 군사협력의 상징이자 연결고리이기 때문이다. 한국, 일본과 각각 군사동맹을 맺고 있는 미국은 과거사 문제로 삐걱거리는 사이인 한국과 일본을 어렵사리 지소미아로 연결했다. 중국과 21세기 명운을 건 패권경쟁, 가치경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에 한국의 지소미아 폐기는 그런 구도에 대한 도전이었던 셈이다.

문 대통령은 이번 지소미아 사태를 한국 외교 전환의 계기로 삼을 수 있을까. 지금 한국이 처한 상황은 구한말 열강의 각축 속에 국가 존립이 생사기로에 내몰리던 때의 상황에 비견될 정도로 엄중하다. 문재인 정부의 지소미아 카드는 처음부터 ‘벼랑 끝 전술’이었다. 한국처럼 잃을 것이 많은 국가가 벼랑 끝 전술을 쓰는 것은 자충수나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부의 이념적 낭만파 강성주의자들의 지소미아 폐기 카드는 통하지 않았다. 이번 사태가 국제관계의 냉혹한 현실을 성찰하는 ‘진실의 순간’이 됐기를 바란다.

동시에 이번 사태가 남긴 후유증을 직시하고 치유해야 할 것이다. 동맹이 훼손되고 한·미·일 공조가 무너진다면 미·중 패권경쟁의 와중에 한국의 생존은 벼랑 끝으로 내몰릴 것이다. 그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다. 다시 올라오기는 불가능한 낭떠러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