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비운의 동(東)투르키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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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북서쪽의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는 고대 중국인들이 ‘서역’이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신장(新疆)이라는 지명은 ‘새로운 강토’라는 뜻으로 18세기 청나라가 이곳을 정복한 뒤 붙인 이름이다. 주민의 주류는 투르크 계통 유목민인 위구르족이다. 약 1000만 명에 달하는 위구르인은 투르크어계인 위구르어를 쓴다. 대부분이 이슬람교도다.
이들은 신장을 ‘동(東)투르키스탄’이라고 부른다. ‘동투르키스탄’은 위구르인들이 두 번이나 세웠다가 잃은 ‘비운의 나라’ 이름이다. 이들은 1933년 ‘동투르키스탄 이슬람공화국’이라는 독립국을 설립했다가 몇 달 만에 소련의 지원을 받은 군벌에 패망했다. 1945년에도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을 세웠으나 1949년 중국에 병합됐다.
한동안 숨죽이고 지내던 이들의 민족의식이 되살아난 것은 1991년 소련의 붕괴 이후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5개국이 독립한 뒤 위구르족 분리주의 운동이 싹트기 시작했다. 중국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중국 정부가 가장 경계한 것은 위구르인들이 종교를 토대로 독립운동을 펼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슬람교육과 예배를 금지하고,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 대신 공산당 이론을 외우도록 했다. 중국어 교육도 의무화했다. 독립운동에 나서는 반군을 색출하기 위해 당 간부들을 2개월마다 1주일 이상씩 위구르족 가정에 들어가 살면서 감시하게 하는 ‘일가친(一家親) 정책’까지 동원했다.
이에 반발하는 주민 100만여 명을 수용소에 감금했다는 외신 보도가 이어지면서 위구르 탄압은 국제적인 인권 문제로 떠올랐다. 엊그제는 터키계 독일인인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선수 메수트 외질이 이 문제를 비판했다가 중국 당국의 생중계 취소 등 거센 역풍을 맞았다. 앞서 홍콩 시위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중국이 미국 농구 중계를 중단했던 것과 비슷한 사태다.
이를 두고 “중국이 ‘대국몽(大國夢)’은커녕 ‘좁쌀몽’으로 전락했다”는 등의 비판이 쏟아지고 있지만 중국은 외교부까지 나서 으름장을 놓고 있다. 위구르인들로서도 경제력을 다 빼앗긴 데다 자치구 내 중국 한족 비율마저 절반에 육박하는 현실에서 당장 독립을 쟁취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래저래 슬픈 ‘동투르키스탄 후예’들의 운명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이들은 신장을 ‘동(東)투르키스탄’이라고 부른다. ‘동투르키스탄’은 위구르인들이 두 번이나 세웠다가 잃은 ‘비운의 나라’ 이름이다. 이들은 1933년 ‘동투르키스탄 이슬람공화국’이라는 독립국을 설립했다가 몇 달 만에 소련의 지원을 받은 군벌에 패망했다. 1945년에도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을 세웠으나 1949년 중국에 병합됐다.
한동안 숨죽이고 지내던 이들의 민족의식이 되살아난 것은 1991년 소련의 붕괴 이후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5개국이 독립한 뒤 위구르족 분리주의 운동이 싹트기 시작했다. 중국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중국 정부가 가장 경계한 것은 위구르인들이 종교를 토대로 독립운동을 펼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슬람교육과 예배를 금지하고,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 대신 공산당 이론을 외우도록 했다. 중국어 교육도 의무화했다. 독립운동에 나서는 반군을 색출하기 위해 당 간부들을 2개월마다 1주일 이상씩 위구르족 가정에 들어가 살면서 감시하게 하는 ‘일가친(一家親) 정책’까지 동원했다.
이에 반발하는 주민 100만여 명을 수용소에 감금했다는 외신 보도가 이어지면서 위구르 탄압은 국제적인 인권 문제로 떠올랐다. 엊그제는 터키계 독일인인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선수 메수트 외질이 이 문제를 비판했다가 중국 당국의 생중계 취소 등 거센 역풍을 맞았다. 앞서 홍콩 시위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중국이 미국 농구 중계를 중단했던 것과 비슷한 사태다.
이를 두고 “중국이 ‘대국몽(大國夢)’은커녕 ‘좁쌀몽’으로 전락했다”는 등의 비판이 쏟아지고 있지만 중국은 외교부까지 나서 으름장을 놓고 있다. 위구르인들로서도 경제력을 다 빼앗긴 데다 자치구 내 중국 한족 비율마저 절반에 육박하는 현실에서 당장 독립을 쟁취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래저래 슬픈 ‘동투르키스탄 후예’들의 운명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