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선의 'ASEAN 톺아보기' (35)] "나는 아스팔트 깔린 길은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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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7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한국국제학교(JIKS)’에서는 코데코(한국남방개발) 창업주인 고(故) 최계월 회장의 장학금 기탁식과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한국국제학교는 최 회장이 초대 인도네시아 한인회장으로 재임 중이던 1976년 설립돼 지난해까지 2672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번에 기탁된 장학금은 한국인과 인도네시아인 결혼 가정 자녀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질 것이라고 한다.
인도네시아에는 약 2000개의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다. 한인사회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큰 외국인 커뮤니티를 이룬다.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직선 대통령제 민주주의 가치를 기반으로 광범한 분야에서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아세안 10개국 중 가장 높은 단계인 ‘특별 전략동반자 관계’를 발전시켜 가고 있다. 이런 한·인도네시아 협력관계의 물꼬를 튼 인물이 바로 최계월 회장이다.
韓 '수출효자' 합판, 인니 투자 결과물
최 회장은 1960년대 초 인도네시아 불모지 칼리만탄의 산림개발에 뛰어들었다. 당시 한국은 외환보유액이 5000만달러에도 못 미치고 해외투자 관련 법규가 없어 해외투자를 적극 추진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따라서 인도네시아 산림개발 사업은 그 자체가 상상을 초월하는 위험과 도전을 의미했다. 더구나 당시 수카르노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비동맹운동을 주도하며 북한과 특별한 협력관계를 유지해 우리와는 외교관계조차 없던 상황이었다. 칼리만탄 산림개발 사업은 그렇게 극적으로 추진됐다.
수카르노 대통령의 신생 인도네시아는 350년간의 네덜란드 지배, 3년 반의 일본 점령을 극복하고 완전 독립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옛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네덜란드는 이리안 자야(현 파푸아 주) 지도자들을 부추겨 독립정부를 세우려 획책했다. 일본 와세다대를 마치고 일본 정·재계와 끈끈한 인맥이 있던 최 회장은 마침 일본 정부의 협력을 구하려 일본을 방문한 이리안 자야 지도자들이 네덜란드가 아니라 수카르노의 인도네시아에 귀속, 통합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를 고맙게 여긴 수카르노는 1962년 최 회장을 인도네시아에 특별 초청했고, 최 회장의 산림개발 사업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같은 해 도쿄를 방문 중이던 수카르노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최 회장의 주선으로 회동해 양국 관계 발전 방안을 협의했다. 수카르노 실각 후 1966년 실권을 장악한 수하르토 장군이 친서방 노선을 표방함에 따라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영사관계를 수립했고 총영사관, KOTRA 등 관련 기관이 자카르타에 들어섰다.
이렇게 해서 1968년 코데코는 우리 기업의 첫 번째 인도네시아 진출이자 한국의 해외직접투자 제1호, 인도네시아의 외국 투자유치 제1호를 기록하게 됐다. 해외 산림개발 경험과 노하우가 없고 인프라도 갖춰지지 않은 열대 원시림에서의 작업은 많은 시행착오와 희생이 따랐다. 그러나 그 열악한 환경도 한국인의 열정과 투지를 꺾지는 못했다. 1960~1970년대 한국의 수출 주력 품목이던 합판은 인도네시아 원목을 재료로 한 것이었다. 국내 여러 기업이 코데코 뒤를 따랐다. 코데코의 개척자 정신은 훗날 파푸아 주에 최초의 대규모 팜오일 농장을 개발한 코린도그룹, 칼리만탄에 세계 5대 유연탄광산을 개척한 키데코(삼탄) 등 인도네시아에서 한국 기업들이 수많은 성공 신화를 일궈낸 토대가 됐다.
최계월 회장의 개척자 정신 되새겨야
코데코는 1981년 ‘해외 원유개발 제1호’라는 새 역사도 썼다. 산림개발과는 전혀 관계없는 원유 시추·개발이란 점에서 이 사업의 추진 또한 극적이었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중동발 오일쇼크는 한국 경제를 휘청이게 했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도 원유 확보와 새로운 유전 개발에 혈안인 상황에서 우리가 이들과의 경쟁을 통해 경제성 있는 유전을 확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때 최 회장의 개인적 신뢰와 인맥이 빛을 발했다. 수하르토 대통령과 그의 최측근 실력자인 베니 무르다니 장군(1969~1973년 주한 총영사 역임)이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이다.
이번 한국국제학교 내 최계월 회장 흉상 제막에 대해 자카르타 한인사회 일부에서 다소 이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최 회장의 공과 여부가 아니라 우리 경제가 어려웠던 시기에 칼리만탄의 원시림 개발과 해외 유전개발을 성공으로 이끈 그에게서 찾을 수 있는 역사적 교훈과 시사점이 아닐까.
그는 자신의 인생역정을 기술한 책자 《나는 아스팔트 깔린 길은 가지 않는다》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무조건 밖으로 나가라. 안에 없는 것이 그곳에 있다. 나가면 산다. 전 세계는 한국인을 기다리고 있다”라고. 오늘날 동남아에는 1만 개 이상의 한국 기업이 활약하고 있고, 매년 수백 개 기업이 새롭게 진출하고 있다. 이는 최 회장이 보여준 불굴의 개척자 정신과 뜨거운 열정, 해낼 수 있다는 신념이 일궈낸 결과다. 우리 젊은이들이 다시금 되새겨볼 만한 메시지다.
김영선 <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 前 한·아세안센터 사무총장 >
인도네시아에는 약 2000개의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다. 한인사회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큰 외국인 커뮤니티를 이룬다.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직선 대통령제 민주주의 가치를 기반으로 광범한 분야에서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아세안 10개국 중 가장 높은 단계인 ‘특별 전략동반자 관계’를 발전시켜 가고 있다. 이런 한·인도네시아 협력관계의 물꼬를 튼 인물이 바로 최계월 회장이다.
韓 '수출효자' 합판, 인니 투자 결과물
최 회장은 1960년대 초 인도네시아 불모지 칼리만탄의 산림개발에 뛰어들었다. 당시 한국은 외환보유액이 5000만달러에도 못 미치고 해외투자 관련 법규가 없어 해외투자를 적극 추진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따라서 인도네시아 산림개발 사업은 그 자체가 상상을 초월하는 위험과 도전을 의미했다. 더구나 당시 수카르노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비동맹운동을 주도하며 북한과 특별한 협력관계를 유지해 우리와는 외교관계조차 없던 상황이었다. 칼리만탄 산림개발 사업은 그렇게 극적으로 추진됐다.
수카르노 대통령의 신생 인도네시아는 350년간의 네덜란드 지배, 3년 반의 일본 점령을 극복하고 완전 독립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옛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네덜란드는 이리안 자야(현 파푸아 주) 지도자들을 부추겨 독립정부를 세우려 획책했다. 일본 와세다대를 마치고 일본 정·재계와 끈끈한 인맥이 있던 최 회장은 마침 일본 정부의 협력을 구하려 일본을 방문한 이리안 자야 지도자들이 네덜란드가 아니라 수카르노의 인도네시아에 귀속, 통합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를 고맙게 여긴 수카르노는 1962년 최 회장을 인도네시아에 특별 초청했고, 최 회장의 산림개발 사업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같은 해 도쿄를 방문 중이던 수카르노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최 회장의 주선으로 회동해 양국 관계 발전 방안을 협의했다. 수카르노 실각 후 1966년 실권을 장악한 수하르토 장군이 친서방 노선을 표방함에 따라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영사관계를 수립했고 총영사관, KOTRA 등 관련 기관이 자카르타에 들어섰다.
이렇게 해서 1968년 코데코는 우리 기업의 첫 번째 인도네시아 진출이자 한국의 해외직접투자 제1호, 인도네시아의 외국 투자유치 제1호를 기록하게 됐다. 해외 산림개발 경험과 노하우가 없고 인프라도 갖춰지지 않은 열대 원시림에서의 작업은 많은 시행착오와 희생이 따랐다. 그러나 그 열악한 환경도 한국인의 열정과 투지를 꺾지는 못했다. 1960~1970년대 한국의 수출 주력 품목이던 합판은 인도네시아 원목을 재료로 한 것이었다. 국내 여러 기업이 코데코 뒤를 따랐다. 코데코의 개척자 정신은 훗날 파푸아 주에 최초의 대규모 팜오일 농장을 개발한 코린도그룹, 칼리만탄에 세계 5대 유연탄광산을 개척한 키데코(삼탄) 등 인도네시아에서 한국 기업들이 수많은 성공 신화를 일궈낸 토대가 됐다.
최계월 회장의 개척자 정신 되새겨야
코데코는 1981년 ‘해외 원유개발 제1호’라는 새 역사도 썼다. 산림개발과는 전혀 관계없는 원유 시추·개발이란 점에서 이 사업의 추진 또한 극적이었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중동발 오일쇼크는 한국 경제를 휘청이게 했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도 원유 확보와 새로운 유전 개발에 혈안인 상황에서 우리가 이들과의 경쟁을 통해 경제성 있는 유전을 확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때 최 회장의 개인적 신뢰와 인맥이 빛을 발했다. 수하르토 대통령과 그의 최측근 실력자인 베니 무르다니 장군(1969~1973년 주한 총영사 역임)이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이다.
이번 한국국제학교 내 최계월 회장 흉상 제막에 대해 자카르타 한인사회 일부에서 다소 이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최 회장의 공과 여부가 아니라 우리 경제가 어려웠던 시기에 칼리만탄의 원시림 개발과 해외 유전개발을 성공으로 이끈 그에게서 찾을 수 있는 역사적 교훈과 시사점이 아닐까.
그는 자신의 인생역정을 기술한 책자 《나는 아스팔트 깔린 길은 가지 않는다》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무조건 밖으로 나가라. 안에 없는 것이 그곳에 있다. 나가면 산다. 전 세계는 한국인을 기다리고 있다”라고. 오늘날 동남아에는 1만 개 이상의 한국 기업이 활약하고 있고, 매년 수백 개 기업이 새롭게 진출하고 있다. 이는 최 회장이 보여준 불굴의 개척자 정신과 뜨거운 열정, 해낼 수 있다는 신념이 일궈낸 결과다. 우리 젊은이들이 다시금 되새겨볼 만한 메시지다.
김영선 <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 前 한·아세안센터 사무총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