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여왕의 남편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공주 시절 필립공과 결혼식을 올릴 때 신랑 쪽에는 가족이 아무도 없었다. 필립공의 아버지인 그리스 왕자 안드레아스는 쿠데타로 쫓겨난 뒤 오랜 망명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중환자였다. 누나들의 남편은 ‘나치 지지자’로 비난받는 독일인이었다.

필립공 스스로도 많은 것을 버려야 했다. 먼저 그리스 왕자 신분을 포기했다. 영국으로 귀화하며 성(姓)을 바텐베르크에서 영국식 마운트배튼으로 바꾸고, 이름도 그리스어 필리포스에서 영어 필립으로 개명했다. 그리스 동방정교회에서 영국 성공회로 개종했고, 해군 장교로서의 미래도 내려놨다.

엘리자베스가 여왕에 오른 뒤에는 대관식에서 무릎을 꿇고 충성맹세를 한 첫 번째 신하가 됐다. 여왕의 남편이지만 왕실 후손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줄 수도 없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나는 자식에게 성을 물려줄 수 없는 유일한 남자”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타고난 쾌활함으로 여왕을 잘 보필한 ‘외조의 왕’이었다. 소탈하기도 했다. 가방을 옮길 때 왕실 직원에게 맡기지 않았고, 직원들의 편의를 위해 버킹엄궁에 내부 통신용 전화를 설치했다. 전기 프라이팬으로 음식을 만들어 아내와 함께 먹는 걸 즐겼다.

연간 수백 번의 여왕 행사에 그림자처럼 동행하는 틈틈이 독자적인 사회 활동도 펼쳤다. 세계 야생동물기금 초대 회장을 비롯해 그가 인연을 맺은 단체는 780여 개에 이른다. 워낙 행사를 많이 해서 “여러분은 이제 세상에서 가장 경험이 풍부한 현판 제막 기계(plaque-unveiler)를 보게 될 것”이라는 농담으로 좌중을 웃기곤 했다.

여왕에게 직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도 그였다. 아내를 ‘양배추(cabbage)’란 애칭으로 부르는 자상한 남편인 동시에 그는 왕실의 안전과 현대화를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어릴 때 그리스 왕실의 몰락을 직접 겪었기에 역사를 보는 시각이 남달랐다.

그를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앨버트공과 비교하기도 하지만, 앨버트가 42세에 타계한 것과 달리 그는 99세까지 살다 하늘로 갔다. 공주와 결혼한 지 74년, ‘여왕의 남자’로 산 지 69년 만이니 역대 영국 왕의 배우자로 가장 오래 산 사람이다. 늘 아내의 세 발짝 뒤에 서 있어야 했던 일생을 생각하면 그보다 더 많은 사연을 품고 세상을 떠난 남자도 드물 것 같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