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금융채무를 일시 연체했다가 상환한 사람들에게 신용등급을 회복시켜주는 ‘신용 사면’을 추진키로 했다. 연체 이력을 금융회사끼리 공유하지 않는 방식이다. 어제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금융협회장들을 만나 이를 협의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0일 “일시적 연체자에 대한 구제방안을 찾아보라”고 지시한 뒤 한 달도 안 돼 일사천리로 추진되는 모양새다.

정부가 코로나 사태로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평가해줄 만한 일이다. 그러나 꼭 이런 방식이어야 하는지는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신용은 금융과 자본시장의 핵심이다. 모든 거래가 신용을 기반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금융회사들은 정교한 신용평가 시스템을 만드는 데 시간과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개인들도 신용카드 현금서비스·할부만 이용해도 신용 점수가 깎여 금융거래 시 불이익을 받기 때문에 신용관리에 노심초사한다. 신용질서를 확립하는 게 금융의 본령인데, 특정 그룹에만 신용사면을 해주면 기존 연체자들과의 형평 문제 등 신용평가 시스템의 근간이 흔들리게 된다. 당장 금융계에서 “정부가 복지차원에서 풀어야 할 일을 금융회사에 신용리스크로 떠넘기고 있다”는 불만이 나오는 이유다.

이 정부 들어 유독 금융분야에서 반(反)시장적 행보가 잦다. 대통령은 지난 3월 “신용도 높은 사람이 저(低)이율을, 낮은 사람은 고(高)이율을 적용받은 구조적 모순이 있다”고 해 논란을 빚었다. 지극히 당연한 금융 원칙을 모순이라고 언급한 것이다. 청와대는 전달과정에서 약간의 오해가 있었다고 해명했으나 결과는 달랐다. 몇 달 후 마이너스통장 개설 때 고신용자에게 고금리를 물리는 ‘금리 역전’ 현상이 나타났다. 해당 금융사들은 통계 착시 때문이라고 해명했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불문가지’다. 이뿐만이 아니다. 금융당국이 만기가 돌아온 소상공인 대출을 강제 연장한 게 벌써 1년 반이고, 상장사들의 분기 배당과 공모가 산정에까지 개입하는 일도 당연하게 여긴다. 금융을 ‘딴 주머니’ 정도로 취급하는 ‘관치금융’ ‘정치금융’ 행태가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여당 대선후보들은 한술 더 뜬다. ‘1000만원짜리 저금리 마이너스 통장’ ‘최고 금리 연 10% 제한’ 등 반(反)시장적 공약들을 경쟁적으로 쏟아낸다. 여기에 정부까지 신용사면이라는 무리수를 꺼내들었으니 ‘선거용’이란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신용사회로 가는 길은 멀고 힘들어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