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묵의 21세기 렌즈] 1987년에 머물러 있는 정치…'낡은 렌즈' 벗어던지고 새 시대 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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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와 민주화 달성 이후 '87년 체제' 35년
한국 쉼없이 질주했지만 정치담론은 '제자리'
저출산·자산 격차 등 새로운 문제들도 쏟아져
좌우 정치세력 여전히 이분법적 대안 제시
청년들 조연으로 남기 거부하며 저항나서
대선 승자, 시대적 과제 직시해 '새 장' 열어야
한국 쉼없이 질주했지만 정치담론은 '제자리'
저출산·자산 격차 등 새로운 문제들도 쏟아져
좌우 정치세력 여전히 이분법적 대안 제시
청년들 조연으로 남기 거부하며 저항나서
대선 승자, 시대적 과제 직시해 '새 장' 열어야
2022년은 제6공화국이 출범한 지 35년째가 되는 해다. 전후 34년 동안, 1987년에 한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기까지의 역사는 한국 현대사의 제1막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제2막은, 급격히 달라진 시대 속에서도 여전히 1987년의 방법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로 인해 사람들에게 싫증만 남기며 지지부진하게 끝나가고 있다. 문제는 새로운데 대안은 그렇지 못하고, 제2막에 태어난 청년들은 제1막의 조연이 되기를 거부하고 있다. 우리는 세계화와 정보화로 달라진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제3막을 기대할 수 있을까.
1987년 6월은 대한민국이 한 시대를 결산하는 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쟁의 폐허만 가득했던 1953년 이래로, 34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1987년에 이미 한국은 굴지의 대기업 집단을 거느린, 선진 산업 세계의 일원이었고, 북한과의 체제 경쟁은 사실상 완벽한 승리로 끝난 상태였다. 1953년부터 1987년까지 34년의 역사는 경제적 기적과 신화의 역사였다. 한편으로 이 34년의 역사는,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 전반에 몰아친 자유화의 역사이기도 했다. 독재 시대에도 급속한 도시화, 중산층과 대중문화의 성장, 미국 및 유럽과의 교류로 태동한 자유주의적 지식인의 대두로 한국 사회는 민주화를 미리 연습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1953년부터 1987년의 한 시대, 대한민국 역사의 제1막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는, 한국 사회를 규정했던 핵심적인 과제인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 투쟁하고 질주한 시대였다.
그렇다면 그다음 시대, 대한민국 역사의 제2막은 어떠했는가? 올해는 1987년 제6공화국이 시작된 지 35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34년간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한 제1막과 달리 제2막이 어떤 시대였는지 규정하는 것은 어렵다. 물론 이 시기에도 한국 사회는 쉼 없이 질주했다. 제2막 동안에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자 글로벌 대중문화를 주도하는 명실상부한 세계 중심국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 시기 정치적 과제의 대부분은 제1막에서 제시됐던 문제의 연장이었다. 좌우 정치 세력은 자신들이 제1막의 위대한 성취를 이뤘던 영웅들의 후예라고 주장하며, 그 영웅들이 성취한 바를 지키겠다고 공언했다. 실제 1987년 이후 한국에서 정치적 논쟁의 대상은 모두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기존의 문제의식으로 정당화되거나 논박될 수 있었다. 현대사의 제1막은 1987년에 말 그대로 막을 내렸지만, 35년간 펼쳐진 제2막은 실질적으로 제1막과 똑같은 배우와 소품으로 진행된 셈이다. 당연히 1987년에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고 해서 시대의 문제가 즉각 해결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은 제2막에서도 지속적인 발전을 경험했다.
물론 ‘기성세대’라고 묶이는 노년층과 중장년층은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2막의 각종 문제가 산업화와 민주화로 대변되는 제1막의 서사가 ‘충실히’ 이행되지 못했기에 발생한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니 ‘지금’ 한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제1막의 철학, 즉 산업화 혹은 민주화로 국가를 움직여야 하고, 이 과제의 완성을 방해하는 상대를 척결해내야만 한다는 결론이 이어진다.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노년층은 안보와 성장을 지상 가치로 다시 확립하고, 친북과 친중 성향 인사들을 솎아내고, 좌파 지식인의 영향력을 철저히 차단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는 중장년층은 민주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제1막의 지배층이라고 규정한 재벌, 검찰, 보수언론의 연합을 파괴했을 때 한국 사회가 진정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청년층은 기성세대의 인식과 해법에 동의하지 않았다. 1994년생인 내가 태어날 때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를 목전에 둔 ‘문민정부’의 민주 국가였다. 산업화나 민주화가 이미 달성된 뒤의 세상에서는 이런 목표들이 절실하게 다가올 수가 없다. 설령 말로 아무리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삶과 경험으로 그것을 느껴온 앞선 세대와 같은 수준일 수는 없다. 청년층에게 1987년 이전의 시대와 1987년 이후의 시대는 아예 다른 시대고, 이런 인식은 기성세대가 제2막도 제1막의 연장이라 생각하는 것과 대조된다. 그렇다면 청년층이 마주했던 지난 35년은 대체 어떤 시대였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제1막의 주제인 산업화와 민주화가 20세기 서구 사회를 참조하며 만들어진 것처럼, 한국 바깥의 세계를 볼 필요가 있다.
탈냉전 시대라고도 부를 수 있는 지난 30년은 세계화와 정보화의 시대였다. 철의 장막이 무너지면서 세계 경제는 놀라운 속도로 통합됐다. 사람, 자본, 기술, 문화, 정보, 상품 등 모든 것이 국경을 넘나들며 교환됐다. 문제는 국경을 넘나드는 통합이 역설적으로 국경 안에서의 분리를 만들어냈다는 데 있었다. 생산성을 뽐낼 수 있는 사람들은 글로벌 네트워크의 허브인 세계 도시로 몰려들었고, 상시로 다른 세계 도시들과 소통했다. 특히 서구의 세계 도시는 지구적 경제를 조율하고, 성장 잠재력이 높은 지역에 자국의 자본과 기술을 투여하며 부를 흡수하는 진정한 중심으로 거듭났다. 반면 세계 도시의 배후지, 국경에 매여 있는 지역은 반대로 세계 도시와의 긴밀한 연결을 상실해갔다.
서구 세계의 일원으로서 한국의 사회 경제적 문제는 대부분 세계화의 결과로 탄생한 ‘이중경제체제’에서 기인했다. 서울은 서구 어느 도시에도 밀리지 않는 최고의 세계 도시로 우뚝 섰다. 사람들, 특히 청년층은 기회를 잡기 위해서 서울로 몰려들었으며, 자연스레 지방은 위축됐다. 도시가 농촌을 흡수하는 과거의 이촌향도는 수도권이 광역시마저 흡수하는 제2의 이촌향도로 재현되고 있고, 지방의 공백은 기회를 찾아온 아시아 각지의 이주자들로 채워지고 있다. 한편 글로벌 영역에서 빨아들인 돈이 서울의 상위 노동자들에게 유입되며, 수도권의 공간 가치는 극도로 올라갔고, 자산 격차는 극대화됐다. 도저히 좁힐 수 없어진 격차로 인해 청년층의 생애주기는 세계와 연결된 세계 도시의 상층 노동시장에 진입하느냐, 못하느냐를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됐다. 한국의 사회적 스트레스를 상징하는 입시 문제는 유년기부터 청년기의 끝까지 확장됐고, 상층 노동시장 진입을 향한 길고 고된 여정의 일부로 편입됐다. 물론 이런 경쟁은 대부분 제1막에서 사회 경제적 자본을 쌓은 부모들의 지원을 받는 이들의 독무대가 됐고, 청년층은 제2막이 ‘수저’에 따라 달라지는 이야기라고 느끼게 됐다.
이것이 한국 현대사의 제1막이 끝난 뒤에 태어난 이들이 피부로 느끼는 제2막의 풍경이다. 그러니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제1막의 도구로는 실질적으로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의 시선은 여전히 1987년, 제1막이 화려하게 막을 내리는 그 영광스러운 순간을 향한다. 전례 없는 호황과 성장을 누리는 가운데, 공산권은 무너지고 있으며, 폭압적 독재 정부도 물러나던 그 순간 말이다. 한국의 좌·우파는 모두 제1막의 성공 공식을 반복하고, 각자의 머리에 있는 제1막의 악역을 물리치면 제2막도 1987년처럼 화려하게 막을 내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현대사의 제2막은 청년층이 제1막의 주연들 생각대로 연기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끝을 향해 달려갔다. 민주화 세력은 청년층이라면 당연히 자신들의 무대에서 조연으로 서줄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20대는 민주화 세력의 조연으로 열연을 펼쳐봤자 문제가 개선되기는커녕 나빠지는 것을 실감했다. 산업화 세력은 20대가 자신들의 조연으로 들어오면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20대는 이미 제1막의 진부한 무대가 반복되는 상황이라면 그 무엇이든 거부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20대 남성은 국민의힘의 가장 강력한 지지층이 돼 주었으나, 제1막의 주연들을 오히려 자신의 연기에 따르는 조연들로 격하시키는 데 성공했다. 20대 여성은 아예 이 무대에 서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새로운 배역들이 제 역할을 해주지 않을 때 공연은 유지될 수 없다. 35년에 걸친 제2막의 막이 빠르게 내려오고 있는 것은 이제 확실하다.
이미 결과를 기다려야만 하는 대선을 두고 불만을 길게 토로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제는 대선의 승자가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에 관한 전망을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새로운 대통령은 제1막의 주제를 외치며 제2막, 1987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시간을 연장하고자 할까? 아니면 지난 35년간의 제2막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대임을 직시하고, 새로운 과제를 발견하고 그에 맞는 해법을 추구하는 제3막을 시작할까? 그람시의 시대가 오싹한 전체주의의 시대였고, 그 주인공이 장기화된 혼란 끝에 질서를 찾겠다며 일어선 당대의 청년들이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전자의 길에서는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 하지만 후자의 길이 쉬웠다면 제2막이 이런 식으로 끝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의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과거와 무엇이, 왜 달라졌는지를 규명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자신의 삶과 경험을 의심하며, 바뀐 세상을 직시하는 자세를 요구한다. 보통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새로운 대통령이 그 누가 되든 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과거의 렌즈를 벗어던지고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며 새로운 이야기를 써나가기를 바란다. 그렇게 펼쳐진 제3막이라면 1987년 이후의 세대, 제2막의 세대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 활약할 수 있지 않을까.
■ 임명묵 작가는
임명묵은 MZ세대 시선에서 정치와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1990년대생 젊은 논객이다.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에서 서아시아 지역학을 전공하고 있다. 역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방면의 주제를 엮어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며, 최근의 주된 관심사는 지구적 변화와 대중문화의 상호작용이다. 지은 책으로는 덩샤오핑에서 시진핑으로의 전환을 다룬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과 한국 사회를 비평한 《K를 생각한다》가 있다.
1987년 6월은 대한민국이 한 시대를 결산하는 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쟁의 폐허만 가득했던 1953년 이래로, 34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1987년에 이미 한국은 굴지의 대기업 집단을 거느린, 선진 산업 세계의 일원이었고, 북한과의 체제 경쟁은 사실상 완벽한 승리로 끝난 상태였다. 1953년부터 1987년까지 34년의 역사는 경제적 기적과 신화의 역사였다. 한편으로 이 34년의 역사는,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 전반에 몰아친 자유화의 역사이기도 했다. 독재 시대에도 급속한 도시화, 중산층과 대중문화의 성장, 미국 및 유럽과의 교류로 태동한 자유주의적 지식인의 대두로 한국 사회는 민주화를 미리 연습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1953년부터 1987년의 한 시대, 대한민국 역사의 제1막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는, 한국 사회를 규정했던 핵심적인 과제인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 투쟁하고 질주한 시대였다.
그렇다면 그다음 시대, 대한민국 역사의 제2막은 어떠했는가? 올해는 1987년 제6공화국이 시작된 지 35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34년간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한 제1막과 달리 제2막이 어떤 시대였는지 규정하는 것은 어렵다. 물론 이 시기에도 한국 사회는 쉼 없이 질주했다. 제2막 동안에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자 글로벌 대중문화를 주도하는 명실상부한 세계 중심국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 시기 정치적 과제의 대부분은 제1막에서 제시됐던 문제의 연장이었다. 좌우 정치 세력은 자신들이 제1막의 위대한 성취를 이뤘던 영웅들의 후예라고 주장하며, 그 영웅들이 성취한 바를 지키겠다고 공언했다. 실제 1987년 이후 한국에서 정치적 논쟁의 대상은 모두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기존의 문제의식으로 정당화되거나 논박될 수 있었다. 현대사의 제1막은 1987년에 말 그대로 막을 내렸지만, 35년간 펼쳐진 제2막은 실질적으로 제1막과 똑같은 배우와 소품으로 진행된 셈이다. 당연히 1987년에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고 해서 시대의 문제가 즉각 해결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은 제2막에서도 지속적인 발전을 경험했다.
기성세대의 해법에 동의하지 않는 청년층
하지만 제2막이 공연되는 가운데, 1987년까지 한국 사회를 규정했던 제1막의 문제의식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들이 속출했다. 저출산과 고령화, 지방의 쇠퇴와 수도권 과밀화, 부동산 가격 폭등과 갈수록 벌어지는 자산 격차, 교육 비용의 상승과 경쟁의 심화, 악화하는 취업난, 다문화 사회로의 전환, 젠더 갈등의 폭발, 중국의 부상으로 인한 국제 질서의 격변. 표면적으로 보이는 한국의 놀라운 성공 이면에, 사회 구성원들이 느끼는 스트레스와 불안감은 기본적으로 이 같은 새로운 문제들에서 기인한다.물론 ‘기성세대’라고 묶이는 노년층과 중장년층은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2막의 각종 문제가 산업화와 민주화로 대변되는 제1막의 서사가 ‘충실히’ 이행되지 못했기에 발생한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니 ‘지금’ 한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제1막의 철학, 즉 산업화 혹은 민주화로 국가를 움직여야 하고, 이 과제의 완성을 방해하는 상대를 척결해내야만 한다는 결론이 이어진다.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노년층은 안보와 성장을 지상 가치로 다시 확립하고, 친북과 친중 성향 인사들을 솎아내고, 좌파 지식인의 영향력을 철저히 차단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는 중장년층은 민주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제1막의 지배층이라고 규정한 재벌, 검찰, 보수언론의 연합을 파괴했을 때 한국 사회가 진정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청년층은 기성세대의 인식과 해법에 동의하지 않았다. 1994년생인 내가 태어날 때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를 목전에 둔 ‘문민정부’의 민주 국가였다. 산업화나 민주화가 이미 달성된 뒤의 세상에서는 이런 목표들이 절실하게 다가올 수가 없다. 설령 말로 아무리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삶과 경험으로 그것을 느껴온 앞선 세대와 같은 수준일 수는 없다. 청년층에게 1987년 이전의 시대와 1987년 이후의 시대는 아예 다른 시대고, 이런 인식은 기성세대가 제2막도 제1막의 연장이라 생각하는 것과 대조된다. 그렇다면 청년층이 마주했던 지난 35년은 대체 어떤 시대였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제1막의 주제인 산업화와 민주화가 20세기 서구 사회를 참조하며 만들어진 것처럼, 한국 바깥의 세계를 볼 필요가 있다.
탈냉전 시대라고도 부를 수 있는 지난 30년은 세계화와 정보화의 시대였다. 철의 장막이 무너지면서 세계 경제는 놀라운 속도로 통합됐다. 사람, 자본, 기술, 문화, 정보, 상품 등 모든 것이 국경을 넘나들며 교환됐다. 문제는 국경을 넘나드는 통합이 역설적으로 국경 안에서의 분리를 만들어냈다는 데 있었다. 생산성을 뽐낼 수 있는 사람들은 글로벌 네트워크의 허브인 세계 도시로 몰려들었고, 상시로 다른 세계 도시들과 소통했다. 특히 서구의 세계 도시는 지구적 경제를 조율하고, 성장 잠재력이 높은 지역에 자국의 자본과 기술을 투여하며 부를 흡수하는 진정한 중심으로 거듭났다. 반면 세계 도시의 배후지, 국경에 매여 있는 지역은 반대로 세계 도시와의 긴밀한 연결을 상실해갔다.
서구 세계의 일원으로서 한국의 사회 경제적 문제는 대부분 세계화의 결과로 탄생한 ‘이중경제체제’에서 기인했다. 서울은 서구 어느 도시에도 밀리지 않는 최고의 세계 도시로 우뚝 섰다. 사람들, 특히 청년층은 기회를 잡기 위해서 서울로 몰려들었으며, 자연스레 지방은 위축됐다. 도시가 농촌을 흡수하는 과거의 이촌향도는 수도권이 광역시마저 흡수하는 제2의 이촌향도로 재현되고 있고, 지방의 공백은 기회를 찾아온 아시아 각지의 이주자들로 채워지고 있다. 한편 글로벌 영역에서 빨아들인 돈이 서울의 상위 노동자들에게 유입되며, 수도권의 공간 가치는 극도로 올라갔고, 자산 격차는 극대화됐다. 도저히 좁힐 수 없어진 격차로 인해 청년층의 생애주기는 세계와 연결된 세계 도시의 상층 노동시장에 진입하느냐, 못하느냐를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됐다. 한국의 사회적 스트레스를 상징하는 입시 문제는 유년기부터 청년기의 끝까지 확장됐고, 상층 노동시장 진입을 향한 길고 고된 여정의 일부로 편입됐다. 물론 이런 경쟁은 대부분 제1막에서 사회 경제적 자본을 쌓은 부모들의 지원을 받는 이들의 독무대가 됐고, 청년층은 제2막이 ‘수저’에 따라 달라지는 이야기라고 느끼게 됐다.
과거의 성공 공식 반복하는 정치세력
한편 청년층이 유년기부터 함께했던 정보 기기들은 그들의 가장 내밀한 일상까지 파고들며 삶의 모든 부분을 바꿔 나갔다. 타인의 삶을 실시간으로 엿볼 수 있게 된 정보 기기와 SNS 플랫폼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청년층의 인식을 뒤흔들었다. 한편으로는 그간 사회의 주류에 가려 흩어져 있던 다양한 정체성이 제각기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뭉치며 일종의 정치적 부족으로 발전했다. 소통을 통해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며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온라인 공간은 곧이어 이런 부족 간의 격렬한 투쟁이 상시 벌어지는 전쟁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청년 남성과 여성은 모두 과거 남성과 여성에게 부여됐던 사회적 역할을 거부하면서도 상대방 성별은 그러한 역할을 그대로 수행해주기를 원하고 있다. 소비와 여가가 변하고, 남녀가 관계 맺는 방식도 변하면서 결혼과 가족의 의미도 달라졌다. SNS를 통한 과시 열풍은, 과하게 높아진 ‘정상성’의 기준, 사실상 그 누구도 온전히 달성할 수 없는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들에게 열패감을 심어주고 있다. 사람들의 불만은 커뮤니티에 모이고, 그곳에서는 자신들의 정체성에 알맞게 적대감을 투사할 대상을 향한 증오가 누적된다. 그렇게 청년층의 젠더 갈등은 사회 변동과 정보화가 만들어낸 압력이 폭발하는 활화산 같은 영역이 됐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세계화와 정보화를 통해 무섭게 성장한 중국을 향하고 있다.이것이 한국 현대사의 제1막이 끝난 뒤에 태어난 이들이 피부로 느끼는 제2막의 풍경이다. 그러니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제1막의 도구로는 실질적으로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의 시선은 여전히 1987년, 제1막이 화려하게 막을 내리는 그 영광스러운 순간을 향한다. 전례 없는 호황과 성장을 누리는 가운데, 공산권은 무너지고 있으며, 폭압적 독재 정부도 물러나던 그 순간 말이다. 한국의 좌·우파는 모두 제1막의 성공 공식을 반복하고, 각자의 머리에 있는 제1막의 악역을 물리치면 제2막도 1987년처럼 화려하게 막을 내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현대사의 제2막은 청년층이 제1막의 주연들 생각대로 연기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끝을 향해 달려갔다. 민주화 세력은 청년층이라면 당연히 자신들의 무대에서 조연으로 서줄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20대는 민주화 세력의 조연으로 열연을 펼쳐봤자 문제가 개선되기는커녕 나빠지는 것을 실감했다. 산업화 세력은 20대가 자신들의 조연으로 들어오면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20대는 이미 제1막의 진부한 무대가 반복되는 상황이라면 그 무엇이든 거부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20대 남성은 국민의힘의 가장 강력한 지지층이 돼 주었으나, 제1막의 주연들을 오히려 자신의 연기에 따르는 조연들로 격하시키는 데 성공했다. 20대 여성은 아예 이 무대에 서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새로운 배역들이 제 역할을 해주지 않을 때 공연은 유지될 수 없다. 35년에 걸친 제2막의 막이 빠르게 내려오고 있는 것은 이제 확실하다.
“새로운 것이 탄생하지 않은 위기의 시간”
아마 진짜 문제는 이미 지나버린 제2막이 아니라, 어떻게 시작될지 누구도 감을 잡지 못하는 제3막일지도 모른다. 이번 대선은 “정말 찍고 싶은 사람이 없는 대선”이라는 이야기가 유독 많았다. 과거의 서사는 통하지 않는 가운데 새로운 서사를 만들지 못하니, 상대방에 대한 자극적인 공격만이 유일한 논쟁거리가 됐기 때문이리라. 제2막에 태어난 청년들도 제2막이 뭔가 잘못됐다고 아우성치지만, 문제 제기를 넘어서는 새로운 이야기는 역시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90년 전에 안토니오 그람시가 이야기한,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이 탄생하지 않은 위기의 시간”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나는 공백기”는 그 어느 때보다 2022년의 한국을 나타내기에 적합한 표현인 것 같다.이미 결과를 기다려야만 하는 대선을 두고 불만을 길게 토로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제는 대선의 승자가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에 관한 전망을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새로운 대통령은 제1막의 주제를 외치며 제2막, 1987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시간을 연장하고자 할까? 아니면 지난 35년간의 제2막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대임을 직시하고, 새로운 과제를 발견하고 그에 맞는 해법을 추구하는 제3막을 시작할까? 그람시의 시대가 오싹한 전체주의의 시대였고, 그 주인공이 장기화된 혼란 끝에 질서를 찾겠다며 일어선 당대의 청년들이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전자의 길에서는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 하지만 후자의 길이 쉬웠다면 제2막이 이런 식으로 끝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의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과거와 무엇이, 왜 달라졌는지를 규명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자신의 삶과 경험을 의심하며, 바뀐 세상을 직시하는 자세를 요구한다. 보통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새로운 대통령이 그 누가 되든 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과거의 렌즈를 벗어던지고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며 새로운 이야기를 써나가기를 바란다. 그렇게 펼쳐진 제3막이라면 1987년 이후의 세대, 제2막의 세대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 활약할 수 있지 않을까.
■ 임명묵 작가는
임명묵은 MZ세대 시선에서 정치와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1990년대생 젊은 논객이다.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에서 서아시아 지역학을 전공하고 있다. 역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방면의 주제를 엮어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며, 최근의 주된 관심사는 지구적 변화와 대중문화의 상호작용이다. 지은 책으로는 덩샤오핑에서 시진핑으로의 전환을 다룬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과 한국 사회를 비평한 《K를 생각한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