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는 이미 저지선인 ‘구로다 라인’(달러당 125엔)을 뚫고 126엔대로 내려왔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BOJ) 총재는 2015년 엔화가 125엔 가까이로 급락하자 “엔저가 더 진전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발언해 추가 하락을 막았다. 이후 달러당 125엔은 일본은행의 최종 환율 방어선으로 여겨져왔다.
“일본 제조업 역사상 처음으로 엔저 리스크가 발생했다”는 하시모토 에이지 일본철강연맹 회장의 말은 일본이 처한 상황을 잘 말해준다. 상당수 일본 기업이 관세장벽 등을 피해 해외로 생산기지를 옮긴 탓에 엔저로 인한 수출 증대 효과는 크게 줄었다. 유니클로의 모기업 패스트리테일링의 야나이 다다시 회장도 “엔화 가치 하락의 메리트는 전혀 없다. 일본 전체로 보면 단점뿐”이라고 말해 ‘나쁜 엔저론’에 가세했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빅스텝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금융완화를 고수 중인 일본은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졌다. ‘나쁜 엔저’를 막기 위해 금리를 올리자니 자칫 재정 파탄을 부를 수 있어서다. 일본의 국채 잔액은 지난해 말 1000조엔(약 9745조원)을 넘겨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256%에 달한다. 이 때문에 금리를 1~2%포인트만 올려도 원리금 상환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엔저와 수입물가 급등은 일본 국민의 고통으로 돌아오고 있다. 구조조정을 통한 경제 체질 개선은 외면한 채 마이너스 금리를 통해 엔저를 장기간 방치한 아베노믹스의 후유증이다. 아베 신조 내각은 공격적인 재정 통화 팽창정책을 구사했고 그 중심에 엔저가 있었다. 엔저 덕분에 자동으로 이익이 늘어난 일본 기업들은 신기술 개발이나 디지털 전환을 소홀히 했다. 그 결과 도요타자동차만 세계 1등 기업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 소니 파나소닉 등은 예전의 위상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환율 상승과 성장률 정체가 일본만의 현상은 아니다. 한국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성장률은 낮아지고 물가는 오를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쏟아지고 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 일본 경제는 경제구조 개혁, 산업 구조조정, 기업 체질 개선을 미루면 나중에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