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원죄(原罪), 정부 실패와 외환위기
최근 우리나라 외환시장에서는 원화 가치가 큰 폭 떨어지는 등 환율이 높은 변동성을 보였다. 1997년 외환위기의 트라우마가 있기도 하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한·미 통화스와프가 체결되지 않았다면 또다시 위기가 재연될 처지를 겪었을 수 있기에, 현 상황에 대한 우려는 남다르다. 외환위기 와중에 원화가 구매력을 잃고 자산 가격이 급락하며 수많은 기업이 무너진 결과, 일자리를 잃은 국민이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따라서 외환시장이 흔들리며 외국인 투자자가 한국 시장을 떠나는 최근 상황에 우려가 큰 것은 당연하다.

통화가치가 폭락하며 금융시장이 붕괴하고 결국 실물경제가 극도의 침체에 빠지는 외환위기 발생 가능성은 해외에서 자국 통화로 자금을 조달할 수 없는 국가에는 늘 존재하는 위험요인이다. 저명한 경제학자인 버클리대 배리 아이컨그린이나 하버드대의 리카르도 하우스만은 국제금융시장에서 활용 가능성이 떨어지는 화폐를 사용하는 국가가 국내에 사용될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해외에서 대규모 외화자금을 조달하는 경우 통화 불일치 때문에 외환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이 항상 내재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에서 ‘원죄(原罪)’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외환위기 발생 가능성은 국제 유통화폐 혹은 기축통화를 가지지 못한 국가에 숙명적으로 주어진 운명이라는 뜻이다.

외환위기는 그 발생 경로에 따라 다양한 원인이 존재하는데 크게 제1, 제2, 제3세대의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가장 고전적인 제1세대 외환위기 모형에서는 정부가 과도한 지출로 대규모 재정적자를 유지하는 가운데 일정한 환율을 유지하려는 정책이 겹치면서 외환 보유가 바닥난 결과 위기가 발생한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했던 외환위기를 설명하는 데 유효한 이론이다.

버클리대 모리스 옵스펠트 연구로 유명해진 제2세대 외환위기 모형에서는 방만한 재정지출이 선행되지 않아도 정부가 국제금융시장의 자금 흐름을 무시하고 특정 환율을 방어하려 시도하는 상황에서 해당 환율을 방어할 능력이 없다고 예측되면 실제로 위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일종의 ‘자기충족적인 위기 예언’으로 불리기도 한다. 유럽환율메커니즘(ERM) 위기로 불리는 영국의 파운드화 폭락과 뒤이은 금융위기가 대표적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의 1997년 외환위기는 제3세대 모형을 통해 주로 설명하는데, 금융시스템 부실과 이로 인해 과도한 대출과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특정 환율을 유지하려 시도하며 위기가 발생한다고 본다. 특히 정부가 금융회사나 기업의 부채에 대해 암묵적으로 보증을 제공하거나, ‘대마불사(大馬不死)’ 개념으로 시장 논리에 따른 부실기업 퇴출이 이뤄지지 않은 채 과도한 보호를 제공하는 경우라면 위기가 발생하기 쉽다.

세 가지 유형의 이론이 강조하는 관점은 다르지만, 여기에는 모두를 일관하는 공통된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방만한 재정지출과 국가부채 급증 때문이든, 과도한 대출과 부실금융을 허용하는 정책 탓이든, 기업 구조조정 미비에 따른 부실 확산 때문이든 모두 광의에서 정부 정책의 실패와 관련된다는 사실이다. 즉, 국제 유통통화 혹은 기축통화를 가지지 못한 국가가 해외에서 대규모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원죄적 상황에서 정부가 충분한 경제운영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면 외환위기는 찾아온다는 뜻이다.

그런데 1997년 당시와 지금, 정부 실패의 모습은 유사하다. 당시는 부실기업 때문에, 지금은 부동산정책 실패로 금융위험이 커진 상태다. 또한, 당시처럼 이해관계자 갈등으로 원활한 기업활동과 타당한 경제 원칙이 적용되는 입법이 추진되지 못한 채 민생과 관련 없는 입법과 정쟁으로 점철되고 있다. 불안한 자산 가격 흐름이 나타나는 가운데 경기 부진과 물가 상승이 결합한 스태그플레이션 등 거시변수의 불안정성도 확대되고 있어, 행정부와 통화·금융당국이 모두 적절한 정책을 수행하고 있는지 확신하기 어렵게 만든다. 더구나 1997년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만한 정부지출 확대로 재정의 지속가능성이 이미 상당 부분 훼손됐음을 고려한다면, 정부 실패에 따른 외환위기 우려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