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형두의 법과 사랑] 선행이 '올무'가 되는 세상
#1. 플랫폼 독서 모임의 오프라인 뒤풀이에서 성추행 사건이 발생했다. 가해자는 플랫폼 업체에서 파트너라는 명칭을 부여받은 리더 격인 회원이다. 피해 회원은 플랫폼 업체에 항의했으나 해당 플랫폼은 가해자와 정식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이 사건을 보도한 기자는 비즈니스 구조상 플랫폼 업체에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업체가 왜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을 하지 않는지 비판했다.

#2. 밤길을 운전해 가는데 도로 전방에 누군가 쓰러져 있다. 운전자는 정차 후 내려 피해자를 차에 싣고 응급실로 데려갔다. 그런데 진범을 찾지 못한 수사기관은 구조한 운전자를 가해자로 지목해 기소했다. 착한 일을 하다 졸지에 법정에 선 운전자는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어야 했느냐고 자신의 무죄를 항변했다.

#3. A, B 회사는 사업상 갈등으로 재판 직전에 있다. 패소해도 안 되지만 승소해도 시간과 비용을 생각하면 소송을 아니함만 못하다는 판단이 서자, A 회사는 B 회사에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런데 최종 타협에 실패해 진행된 재판에서 B 회사는 A 회사가 보낸 이메일을 자사에 유리한 증거로 법정에 제출했다. A 회사가 책임이 없다면 왜 타협하자고 했겠느냐면서.

#1은 최근 지상파 뉴스에 보도된 내용이고, #2와 #3은 가상적인 이야기다. #1에서 언뜻 보면 플랫폼 업체는 왜 예방 교육을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예방 교육을 했다면 재판에서 법원은 가해자를 플랫폼 업체의 직원으로 인정해 플랫폼 업체에 법적 책임을 물을 가능성이 있다. 업체는 이를 우려한 것이다.

판례법주의 국가인 미국 법원은 #2의 경우 피해자를 병원에 데려갔다는 사실이 구조자에게 불리한 증거로 쓰일 수 없다는 판례법을 형성해 왔다. 이를 ‘선한 사마리아인 법(Good Samaritan Law)’이라고 한다.

또 #3의 상황에서 A 회사와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변호사들은 초년병 시절에 함부로 타협을 시도하지 말라는 교육을 받기도 한다. 변호사가 화해시키려고 나섰다가 뭔가 약점이 있어 타협하려는 것이 아닌가란 식으로 역공을 당한다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이런 실수(!)를 하지 않는 변호사를 철두철미하다고 하거나, 상대방 실수를 정확히 포착해 법정에 드러내는 변호사를 예리하다고도 한다. ‘좋은 변호사는 좋은 이웃이 되기 어렵다’는 서양의 진부한 격언이 나올 만도 하다. 이 경우에도 미국은 분쟁을 줄여준다는 점에서 타협을 시도하거나 제안한 사실이 불리한 증거로 사용돼서는 안 된다는 증거법을 발전시켜 왔다.

위 세 가지 사례 모두 법(판례)이 사람의 행위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법이 사람을 매정하게 만드는가 하면(#1), 사람을 따뜻하고 의롭게 만들기도 한다(#2, 3의 미국 사례). 한국인과 미국인의 성정이 달라서일까? 아니다. 법을 운용하는 사람들에게서 문제를 찾는 편이 타당하다.

플랫폼 경제가 일상에 뿌리내린 지 오래됐다. 그런데 여전히 플랫폼과 사업자는 사용자로서 법적 책임을 피하려고 ‘사용자 지우기’를 시도하고, 노동자는 근로자로 보호받고자, 이용자는 피해를 배상받고자 ‘사용자 찾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1과 같은 상황도 발생한다. 누가 사용자이고 노동자인지를 법률에 세세히 정할 수 없다. 세상일은 법률 문장 사이에서 발생한다고 하지 않는가. 결국 그 틈새를 메우는 것은 법관의 몫이다. ‘뭔가 켕기는 일이 있으니 병원에 데려갔고 타협안을 제시했겠지’라는 고민 없는 판결은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오해받을까봐 지나치고 조금만 양보하면 상생할 수 있는데 역공당할까봐 한 발을 내딛지 못하는 일에 작지 않은 책임이 있다.

미국에서 ‘선한 사마리아인 법’이 단숨에 증거법 원칙으로 정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런 원칙과 상관없이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는 행위로 의심받거나 처벌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상식에 기반할 때 법은 존중받을 수 있다. 타인에 대한 선행과 배려를 법정에서 공격의 빌미로 삼는 것을 막아야 할 책무는 법을 운용하는 사람들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