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 기업인 대만 TSMC의 미국 애리조나 피닉스공장 장비 반입식은 반도체 기술 패권 시대의 ‘기경학(技經學·technoeconomics)’ 지형도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위시해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 젠슨 황 엔비디아 CEO, 리사 수 AMD CEO 등 정보기술(IT) 거물들이 총출동했다.

이들을 한데 모은 TSMC는 세계 파운드리 반도체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대만의 국보 기업이다. 엔비디아, AMD 같은 반도체 큰손들도 TSMC에 “우리 제품을 생산해 달라”고 읍소하는 상황이다 보니 늘 ‘슈퍼을(乙)’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닌다. 행사 참석자들도 “TSMC의 칩은 세계 최고”, “TSMC 없으면 우리도 없다”고 찬사를 쏟아냈다.

그러나 이면을 들여다보면 TSMC조차 마냥 립서비스를 즐길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TSMC는 미국 투자 계획을 당초 120억달러에서 공장 하나를 더 지어 400억달러로 늘리기로 했지만, 다분히 미국의 압박에 끌려다니는 측면이 강하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반도체 공급망의 중요성을 확연히 인식한 미국은 TSMC와 삼성전자 공장을 유치해 자국 내 반도체 공급망 확보에 목을 걸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메이드 인 아메리카의 미래’라고 적힌 현수막을 배경으로 한 연설에서 “애리조나에서 만들어진 칩을 애플이 쓰면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다. 미국의 미래가 지금보다 나은 적이 없었다”고 한 표현은 의미심장하다.

한국과 대만이 국제사회에서 당당할 수 있는 것은 미·중이 간절히 원하면서도 갖고 있지 못한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메이드 인 USA 칩’을 통해 반도체 공급망을 완성한 뒤에도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우리의 존재 가치는 결국 초격차 기술을 확보할 때만 보장받을 수 있다. 그 대표선수를 키울 법안과 세제 지원에 대해 거대 야당이 “대기업 특혜” “부자 감세” 운운하며 훼방을 놓는 게 현실이다. 반도체가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 죽고 사는 문제가 된 시대 논리를 명철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