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안보 중간성적표
도전받는 '한반도 운전자론'
문재인 정부의 외교정책 분야 중간 성적표는 길 잃은 남북한 관계, 흔들리는 한·미 동맹, 최악의 한·일 관계, 미적지근한 한·러, 한·중 관계로 요약된다. 과도한 대북정책 쏠림 탓에 정세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이 같은 고립무원의 외교 위기를 자초했다는 평가가 많다. “지나친 대북 낙관론 경계해야”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은 지난 1일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문재인 정부가 가장 잘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말에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협을 제거한 것”이라고 자신있게 답했다. 진영을 막론하고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한반도에 드리운 전쟁의 공포가 걷혔다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남북 관계 개선은 문재인 정부의 주요 공약 중 하나였다. 이른바 ‘운전자론’으로 상징돼 온 대북정책 또한 현 정부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키워드로 꼽혔다. 하지만 남북 관계는 2017년 7월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부터 지난해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금강산 남측 시설 철거를 지시한 최근에 이르기까지 아찔한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
우리 정부의 지속적인 구애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이제 ‘통미봉남(한국을 통하지 않고 미국과 협상)’을 넘어 ‘통미배남(한국을 배척·배제하며 미국과 협상)’ 카드를 꺼내들고 있다. 우리 측이 제안한 4차 남북정상회담, 장관급 고위 회담 제의엔 잇따른 미사일 도발로 대답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대북정책이 지나치게 낙관론에만 기댄 측면이 많다”고 지적했다. 미·중 경쟁구도 속에 남북 관계가 끼어 있는 상황, 한국과 동등한 협상 파트너가 되고자 하는 김정은의 속내 등을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은 “미국, 중국, 러시아 등과 회담한 김정은이 예전처럼 한국만을 협력 파트너로 여길 것이란 생각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말했다.
표류하는 4강 외교
정부가 남북 문제에 ‘올인’하는 사이 4강 외교 전선에는 구멍이 뚫리고 한·미 동맹에는 균열 조짐까지 나타났다. ‘미국 최우선주의’를 내걸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동맹을 돈, 외교를 거래로 인식하며 한국에 수조원의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공공연히 요구하고 있다. 한·일 관계는 작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을 시작으로 일본의 수출규제 보복, 한국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등으로 이어지며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으로 내몰렸다.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갈등의 감정적 앙금이 남아 있는 중국은 러시아와 경쟁하듯 한국의 항공식별구역(KADIZ)에 수시로 진입하며 군사적 위협 수위를 높이고 있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남북 관계만 잘 풀리면 된다는 접근으로 그간 소중히 해왔던 한·미 동맹과 한·미·일 안보협력을 소홀히 했다”며 “신(新)북방정책을 추진한다면서도 러시아, 중국과도 별다른 협력 고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급변하는 국제질서 맥 꿰뚫어야”
전문가들은 문재인 정부가 남은 임기 동안 북한에 대한 ‘과잉 몰입’에서 벗어나 4강 외교 복원에 힘써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과 교수는 “남은 임기 동안 이전 정부 때보다 뒷걸음질 친 4강 외교 복원에 나서야 한다”며 “이데올로기나 과거사 관련 강박에서 벗어나 유연한 전략적 외교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북 정책 또한 주변 4강과의 관계 회복 속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박 교수는 “북핵 등 북한 이슈는 한반도 주변 국가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고차 방정식”이라며 “주변국과의 관계가 잘 풀리고 정상적인 관계가 복원되면 엉킨 실타래도 자연스럽게 풀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급변하는 국제질서의 큰 판을 읽는 실리 외교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기존 정책들을 수정 보완하고 국익에 기초한 외교·안보 전략의 재설계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정호/이미아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