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0년] '죽음의 작전' 스미스 특임대 오산 죽미령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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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열흘 만에 유엔 지상군 540명 첫 참전…"패했지만 얻은 게 많은 전투"
북한군 5천명에 맞서 6시간 14분 버티며 유엔군 존재감 과시하고 교두보 확보에 도움
연락장교 참전한 윤승국 장군 "철수 작전 때 200명 구해…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아"
"스미스 특임대의 오산 죽미령 전투는 부산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피할 수 없었던 '죽음의 작전'이었다.
"(더글라스 맥아더 초대 유엔군사령관 전후 회고록 중)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불과 열흘 만인 7월 5일 오전 8시 16분.
유엔군 스미스 특임대는 지금의 경기 오산시 죽미령에 진지를 구축, 경부국도(지금의 국도 1호선)를 따라 이동하는 북한군 T-34 전차에 105mm 곡사포를 발사했다.
유엔군 지상 병력의 투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 전투는 유엔군의 패배로 끝났으나 거침없이 남진하던 북한군은 6시간 14분에 걸친 유엔군과의 교전이 끝난 뒤 전열을 가다듬는데 열흘 넘는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패배한 전투였다는 일각의 평가를 이유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유엔군 죽미령 전투는 6.25 전쟁사에서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많았던 전투'로 재평가되고 있다.
◇ 전쟁 발발 열흘 만에 유엔군 지상군 투입
6.25 전쟁 발발 이틀 후인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참전을 결정하자 당시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은 워커 미 8군 사령관에게 특수임무부대(Task force)를 편성할 것을 지시했다.
워커 사령관은 2차 대전 후 일본에 점령군으로 주둔하고 있던 미 24사단 21연대 1대대의 B중대, C중대와 52포병대대 A포대 등 540명으로 구성된 부대를 꾸렸다.
이 특임대는 1대대장이던 찰스 스미스 중령의 이름을 따 '스미스 특임대'라 불렸다.
한반도에 장맛비가 쏟아지던 7월 4일 스미스 대장은 전차를 앞세워 경부국도로 이동하는 북한군을 막을 장소로 오산 죽미령이 최적이라고 보고 진지를 구축했다.
◇ '6시간 14분'간 오산 죽미령에서 유엔군 첫 전투
다음날인 5일 오전 7시 30분 소련제 T-34 전차 8대를 선두로 한 북한군 행렬이 남진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스미스 부대원은 1개 대대 병력인 540명이 전부였으나, 북한군은 제4보병사단 2개 연대(16, 18연대), 107전차연대 등 3개 연대 병력 5천여명에 달했고 전차만 36대를 보유했다.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오길 기다리던 스미스 특임대는 오전 8시 16분 화성 병점리 일원을 지나던 북한군 전차에 105mm 곡사포를 발사했다.
유엔군 지상 병력이 처음으로 교전을 벌인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전차는 고폭탄에 정통으로 맞고도 남진을 계속했다.
부대원들은 훗날 고폭탄으로는 전차를 파괴할 수 없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됐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나마 대전차용 포탄 6발을 모두 소진했을 때 선두 전차 1대가 화염에 휩싸였고, 또 다른 1대는 궤도가 끊어졌다.
나머지 전차는 차례로 오산 방면으로 남진을 이어갔다.
곧이어 맹렬한 보병 전투가 이어졌다.
스미스 부대는 선두에 선 북한군 전차 3대와 병력을 태운 트럭을 향해 4.2인치 박격포와 75mm 무반동총 등 중화기로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기습은 성공적이었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북한군은 이내 전세를 뒤집었다.
선두 전차는 스미스 부대의 보병 진지 전방 200m 코앞에서 포탄을 쏘기 시작했고, 기습에 놀라 분산됐던 북한군 보병들도 전열을 가다듬어 방어진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스미스 부대에는 7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탄약은 거의 바닥났다.
적이 3면으로 방어진지를 포위하자, 대 전차전 이후 4시간가량을 더 버틴 스미스 대장은 결국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때가 오후 2시 30분이었다.
◇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많았던 전투
죽미령 전투에서 스미스 특임대는 북한군 안동수 대좌(우리 군의 대령급)를 포함해 42명을 사살했고 T-34 전차 4대를 완파했다.
하지만 스미스 부대는 첫 전투에서 540명 중 30%가 넘는 181명(실종 포함)이 희생됐다.
부대는 비록 첫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북한군에는 지울 수 없는 생채기를 남겼다.
당초 유엔군 투입 전 전쟁을 끝내겠다는 북한군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고, 전쟁 발발 열흘 만에 유엔군이 투입된 사실이 전해져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다.
이에 김일성 당시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 주석은 7월 8일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내 파병을 요청하기도 했다.
교전은 6시간 14분에 불과했지만, 북한군은 전열을 재정비하는 데 10일 넘는 시간을 소비했다고 한다.
그 사이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고 맥아더 사령관은 두 달여 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해 전세를 뒤집었다.
죽미령 전투 이후 유엔군의 대응이 달라진 것도 6.25 전쟁사에 길이 남을 성과다.
미군은 적을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7월 7일 4개 사단을 한반도에 추가 파병할 것을 정부에 요청했다.
이를 계기로 정전 때까지 48만 명의 유엔군이 한반도에 파병됐다.
◇ 국군 중 유일하게 초전 참전한 윤승국 장군
스미스 특임대에는 연락장교로 파견된 국군 장교도 있었다.
당시 대위였던 윤 장군(육사 4기·예비역 소장)은 죽미령 전투 도중 스미스 부대 포병 진지에서 적과 싸웠다.
윤 장군은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전차를 포위하고 '투항하라'고 외쳤는데, 해치를 열고 나온 북한 병사가 총을 난사해 페리 중령(52포대장)이 오른쪽 다리에 총탄을 맞았다"며 "그런데도 후송을 거부한 채 다리를 절뚝거리며 부대 지휘를 계속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회고했다.
스미스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긴급한 철수 작전이 진행됐을 때 지리를 잘 알던 윤 장군이 행렬을 이끌어 부대원 200여명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윤 장군은 "안성에 있던 본대에 복귀한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철수 직후 북한군이 포병 진지가 있던 지역을 완전히 점령했다고 한다"며 "철수가 조금만 늦었다면 부대원이 전멸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고 전했다.
윤 장군이 이끈 철수 병력과 달리 지리를 몰랐던 보병들은 걸어서 동해안까지 갔다가 뒤늦게 본대에 합류하기도 했고, 또 다른 일부는 서해안에서 쪽배를 타고 부산까지 갔다가 며칠 후 복귀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실종자와 사망자도 여럿 나왔다.
윤 장군은 "스미스 부대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며 "생을 마감하면서까지 한반도를 지켜준 그들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이어 "젊디젊은 20대 중반에 몸소 겪은 전쟁이 벌써 70년이나 됐다"며 "참전 용사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Freedom is not free)'는 것을 우리 시대 젊은이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엔군 초전이 있었던 오산 죽미령에는 1955년 생존 장병들이 다시 찾아와 전우들을 추모하는 의미로 540개의 돌을 쌓아 기념비를 건립했다.
오산시는 이곳에 유엔군 초전기념관을 지어 매년 스미스 부대원과 주한미군을 초청해 기념식을 열고 있다.
최근에는 기념관 일원에 평화공원을 조성, 초전 70주년을 맞는 다음 달 5일 개장할 예정이다 /연합뉴스
북한군 5천명에 맞서 6시간 14분 버티며 유엔군 존재감 과시하고 교두보 확보에 도움
연락장교 참전한 윤승국 장군 "철수 작전 때 200명 구해…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아"
"스미스 특임대의 오산 죽미령 전투는 부산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피할 수 없었던 '죽음의 작전'이었다.
"(더글라스 맥아더 초대 유엔군사령관 전후 회고록 중)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불과 열흘 만인 7월 5일 오전 8시 16분.
유엔군 스미스 특임대는 지금의 경기 오산시 죽미령에 진지를 구축, 경부국도(지금의 국도 1호선)를 따라 이동하는 북한군 T-34 전차에 105mm 곡사포를 발사했다.
유엔군 지상 병력의 투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 전투는 유엔군의 패배로 끝났으나 거침없이 남진하던 북한군은 6시간 14분에 걸친 유엔군과의 교전이 끝난 뒤 전열을 가다듬는데 열흘 넘는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패배한 전투였다는 일각의 평가를 이유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유엔군 죽미령 전투는 6.25 전쟁사에서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많았던 전투'로 재평가되고 있다.
◇ 전쟁 발발 열흘 만에 유엔군 지상군 투입
6.25 전쟁 발발 이틀 후인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참전을 결정하자 당시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은 워커 미 8군 사령관에게 특수임무부대(Task force)를 편성할 것을 지시했다.
워커 사령관은 2차 대전 후 일본에 점령군으로 주둔하고 있던 미 24사단 21연대 1대대의 B중대, C중대와 52포병대대 A포대 등 540명으로 구성된 부대를 꾸렸다.
이 특임대는 1대대장이던 찰스 스미스 중령의 이름을 따 '스미스 특임대'라 불렸다.
한반도에 장맛비가 쏟아지던 7월 4일 스미스 대장은 전차를 앞세워 경부국도로 이동하는 북한군을 막을 장소로 오산 죽미령이 최적이라고 보고 진지를 구축했다.
◇ '6시간 14분'간 오산 죽미령에서 유엔군 첫 전투
다음날인 5일 오전 7시 30분 소련제 T-34 전차 8대를 선두로 한 북한군 행렬이 남진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스미스 부대원은 1개 대대 병력인 540명이 전부였으나, 북한군은 제4보병사단 2개 연대(16, 18연대), 107전차연대 등 3개 연대 병력 5천여명에 달했고 전차만 36대를 보유했다.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오길 기다리던 스미스 특임대는 오전 8시 16분 화성 병점리 일원을 지나던 북한군 전차에 105mm 곡사포를 발사했다.
유엔군 지상 병력이 처음으로 교전을 벌인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전차는 고폭탄에 정통으로 맞고도 남진을 계속했다.
부대원들은 훗날 고폭탄으로는 전차를 파괴할 수 없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됐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나마 대전차용 포탄 6발을 모두 소진했을 때 선두 전차 1대가 화염에 휩싸였고, 또 다른 1대는 궤도가 끊어졌다.
나머지 전차는 차례로 오산 방면으로 남진을 이어갔다.
곧이어 맹렬한 보병 전투가 이어졌다.
스미스 부대는 선두에 선 북한군 전차 3대와 병력을 태운 트럭을 향해 4.2인치 박격포와 75mm 무반동총 등 중화기로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기습은 성공적이었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북한군은 이내 전세를 뒤집었다.
선두 전차는 스미스 부대의 보병 진지 전방 200m 코앞에서 포탄을 쏘기 시작했고, 기습에 놀라 분산됐던 북한군 보병들도 전열을 가다듬어 방어진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스미스 부대에는 7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탄약은 거의 바닥났다.
적이 3면으로 방어진지를 포위하자, 대 전차전 이후 4시간가량을 더 버틴 스미스 대장은 결국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때가 오후 2시 30분이었다.
◇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많았던 전투
죽미령 전투에서 스미스 특임대는 북한군 안동수 대좌(우리 군의 대령급)를 포함해 42명을 사살했고 T-34 전차 4대를 완파했다.
하지만 스미스 부대는 첫 전투에서 540명 중 30%가 넘는 181명(실종 포함)이 희생됐다.
부대는 비록 첫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북한군에는 지울 수 없는 생채기를 남겼다.
당초 유엔군 투입 전 전쟁을 끝내겠다는 북한군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고, 전쟁 발발 열흘 만에 유엔군이 투입된 사실이 전해져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다.
이에 김일성 당시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 주석은 7월 8일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내 파병을 요청하기도 했다.
교전은 6시간 14분에 불과했지만, 북한군은 전열을 재정비하는 데 10일 넘는 시간을 소비했다고 한다.
그 사이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고 맥아더 사령관은 두 달여 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해 전세를 뒤집었다.
죽미령 전투 이후 유엔군의 대응이 달라진 것도 6.25 전쟁사에 길이 남을 성과다.
미군은 적을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7월 7일 4개 사단을 한반도에 추가 파병할 것을 정부에 요청했다.
이를 계기로 정전 때까지 48만 명의 유엔군이 한반도에 파병됐다.
◇ 국군 중 유일하게 초전 참전한 윤승국 장군
스미스 특임대에는 연락장교로 파견된 국군 장교도 있었다.
당시 대위였던 윤 장군(육사 4기·예비역 소장)은 죽미령 전투 도중 스미스 부대 포병 진지에서 적과 싸웠다.
윤 장군은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전차를 포위하고 '투항하라'고 외쳤는데, 해치를 열고 나온 북한 병사가 총을 난사해 페리 중령(52포대장)이 오른쪽 다리에 총탄을 맞았다"며 "그런데도 후송을 거부한 채 다리를 절뚝거리며 부대 지휘를 계속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회고했다.
스미스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긴급한 철수 작전이 진행됐을 때 지리를 잘 알던 윤 장군이 행렬을 이끌어 부대원 200여명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윤 장군은 "안성에 있던 본대에 복귀한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철수 직후 북한군이 포병 진지가 있던 지역을 완전히 점령했다고 한다"며 "철수가 조금만 늦었다면 부대원이 전멸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고 전했다.
윤 장군이 이끈 철수 병력과 달리 지리를 몰랐던 보병들은 걸어서 동해안까지 갔다가 뒤늦게 본대에 합류하기도 했고, 또 다른 일부는 서해안에서 쪽배를 타고 부산까지 갔다가 며칠 후 복귀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실종자와 사망자도 여럿 나왔다.
윤 장군은 "스미스 부대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며 "생을 마감하면서까지 한반도를 지켜준 그들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이어 "젊디젊은 20대 중반에 몸소 겪은 전쟁이 벌써 70년이나 됐다"며 "참전 용사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Freedom is not free)'는 것을 우리 시대 젊은이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엔군 초전이 있었던 오산 죽미령에는 1955년 생존 장병들이 다시 찾아와 전우들을 추모하는 의미로 540개의 돌을 쌓아 기념비를 건립했다.
오산시는 이곳에 유엔군 초전기념관을 지어 매년 스미스 부대원과 주한미군을 초청해 기념식을 열고 있다.
최근에는 기념관 일원에 평화공원을 조성, 초전 70주년을 맞는 다음 달 5일 개장할 예정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