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기에 폭탄 달던 중학생 "그 시절 누구든 싸워야 했다" [한국전쟁 7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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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70주년 기획 인터뷰-참전자의 기억④]
미국 항공기지에서 일한 이인범 할아버지
고깃국 먹으면서 풍요로웠던 北생활
제대로 된 교육 위해 고향 떠나 월남
13살 나이에 혼자서 학비 벌어 공부
피난길 전전하다 美항공기지서 근무
美 전투기 미사일 조립·장착 임무
"휴전 후에도 귀향 꿈꾸며 군생활"
미국 항공기지에서 일한 이인범 할아버지
고깃국 먹으면서 풍요로웠던 北생활
제대로 된 교육 위해 고향 떠나 월남
13살 나이에 혼자서 학비 벌어 공부
피난길 전전하다 美항공기지서 근무
美 전투기 미사일 조립·장착 임무
"휴전 후에도 귀향 꿈꾸며 군생활"
6·25 참전 유공자 이인범씨(85)는 미군 항공기지에서 한국전쟁을 치렀다. 흔히 떠올릴 법한 전투기 조종사가 아니다. 그는 무장정비대원이었다. 아무리 좋은 전투기도 정비를 받지 않으면 비행 자체가 불가능한 법.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戰場)은 아니었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전투를 치렀다.
엄밀히 말해 이씨는 한국전쟁 당시 군인이 아니라 학생이었다. 자유를 찾아, 양질의 교육을 찾아 정든 고향과 가족을 두고 이북에서 떠나온 중학생이었다. 나이 열 다섯의 학생에 불과했지만, 이인범 학생은 분명 나라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 직접 퓨즈를 조립한 폭탄을 전투기 날개에 달았다. 그렇게 이씨는 18년 동안의 군생활을 시작했다.
▷고향이 어디신가요?
“평안북도 용천군이 내 고향이에요. 서쪽으로는 압록강이 있고, 바로 북쪽에는 신의주가 있죠. 1948년 3월에 38선 밑으로 월남(越南)하기 전까지 쭉 거기서 살았어요.” ▷굉장히 먼 곳인데, 왜 월남하셨나요?
“나는 전적으로 공부를 하기 위해서 왔어요. 내가 월남했을 적에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는데, 북한이 당시만 해도 남쪽보다 훨씬 잘 살았거든요? 고깃국에 흰쌀밥 먹고 다닐 정도였으니까요. 문제는 자유가 사라지고 있다는 거였어요. 개인재산을 전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좋은 선생님들이 대부분 월남했어요. 이북에 남은 건 공산당쪽 선생님밖에 없었는데, 가르치는 게 원….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벌써 산수는 안 알려주고 공산주의 사상만 가르치더라고요. 어린 나이에도 그게 너무 싫었죠.”
▷가족과 함께 오셨나요?
"다 같이는 못 왔어요. 제가 4형제 중에 막내인데, 내 바로 위인 셋째 형님하고 어머니는 못 왔어요. 짐 정리하고 한달 후에 뒤따라 온다고 하셨는데 말이죠…. 여태 소식을 몰라요…."
▷월남할 때 어려움은 없었나요?
"38선 부근에서 소련군한테 들켜가지고는 큰일 날 뻔한 적이 있었죠. 그곳이 철원 즈음이었는데, 한밤중에 소련군이 나타나서 내 가슴팍에 총부리를 확 대더라고. 아이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어린 마음에 그대로 도망쳤어요."
▷그래도 결국 도망쳐서 다행이네요.
"그러게 말이야, 그때 만약 쏘면 죽는 거였지…. 그렇게 밤에 도망치다가 제가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정신을 잃었어요. 눈 뜨고 보니까 어딘지 모르는 주막에 누워있더라고. 인근에서 장사하는 분들이 나를 발견하고 짊어다가 데려다 놨대요. 어린 나이에 혼자고, 다리까지 다쳐서 쩔뚝이게 되니까 한참 울었어요."
▷같이 넘어오던 가족들은 어떻게 됐나요?
"주막에 있다 보니 마침 형님 가족이 주막으로 오더라고요. 약속한 것도 아닌데, 그 지역에 주막이 거기 한 곳밖에 없으니까 그리로 왔대요. 얼마나 반가웠는지…. 나중에 듣고 보니까 소련군이 시계랑 값진 것들만 좀 빼앗고 붙잡아가지는 않았다고 해요. 그렇게 다시 출발해서 결국 38선 넘었어요. 38선을 막 넘었을 때 다같이 만세를 불렀던 기억이 나네요."
◆포기할 수 없는 꿈, 공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대한민국에 도착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남한의 경제는 고깃국은커녕 쌀밥 먹기도 버거울 정도로 좋지 않았다. 평안도 이방인에게 안정적 터전은 더더욱 없었다. 자식 세 명이 딸린 이씨의 친형은 동생까지 보살필 여력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씨는 결국 친형과 헤어져 혼자 학업과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이씨처럼 스스로 학비를 벌어 생활하는 학생을 당시엔 '고학생(苦學生)'이라고 불렀다. '쓸 고(苦)' 자에 '배울 학(學)' 자. 모진 고생의 의미가 그대로 담겨있는 단어다. 이씨는 "신문 배달을 하면서 학비를 벌었다"며 "고학 생활이 얼마나 고달팠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당시 그의 나이 열 셋이었다.
▷월남 이후에 어디에서 사셨어요?
"대전에서 살았어요. 원래 서울에 좋은 학교 다니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는데, 서울은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가지고 도저히 생활을 못할 정도로 번잡했어요. 같이 월남한 형님도 서울에선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길래 곧장 대전으로 갔어요."
▷대전에선 어떻게 지내셨나요?
"대전에서 신문 배달하면서 중학교를 다녔어요. 워낙 신문을 잘 팔아서 신문 대전지국장이 나를 엄청 이뻐했죠. 내가 지국장님 집에서 혼자 얹혀 사니까 용돈도 조금씩 주셨는데, 다 공부하는 데에 썼어요. 그리고 당시엔 정부 수립 직후라 헌법이 적힌 종이도 팔았어요. 헌법도 내가 하루에 1000장씩 팔았지."
▷대전에서 전쟁을 맞으신 건가요?
"1950년 1월에 먼저 강릉으로 갔습니다. 신문 지국장님이 그리로 이사를 간다길래 따라간 거에요. 강릉에서 신문 좀 팔다가 거의 곧바로 전쟁이 터져버렸지…. 그때 같이 신문 배달하던 친구놈 형이 육군 정보장교여서 전쟁 터진 날 바로 나도 입대하겠다고 말했는데, 나이가 어리다고 안 받아줬어요. 바로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었죠. 그때 내 나이가 열 다섯이었어요."
▷피난길은 어땠나요?
"우선 형님 만나려고 대전까지 육군 8사단 트럭을 얻어타고 갔어요. 대전부터가 문제였는데, 형님 만나서 경북 김천까지 걸어갔습니다. 대전에서 김천으로 갈 때 벌써 뒤쪽 산 너머로는 북한군 탱크가 내려오는 게 보이더라고…. 하루도 못 쉬고 종일 100리(약 40km)씩은 걸었을 거에요. 김천에선 도저히 더는 못 걷겠더라고요. 다 포기할 뻔할 때 마침 김천역에 기차가 있어서 올라탔는데, 아주 난리였지…. 기차 겉에 사람이 빼곡히 붙어있고, 사람 위에 또 사람이 얹혀서 피난을 갔으니까…. 그렇게 기차 몇 번 갈아타고 부산으로 갔어요."
이씨는 피난길에서도 학업을 멈추지 않았다. 가난 탓에 가방도 없었지만, 길가에 굴러다니던 실탄 탄통에 연필과 노트를 넣고 학교를 다녔다. 등굣길 가방 역할을 하던 탄통은 학교 도착 이후엔 의자로 변신했다. 누가 시켜서 한 일도 아니었다. 이씨는 그렇게 '고학'을 했다. 전쟁통에 천막으로 세워진 부산의 한 종합학교를 속성으로 졸업한 그는, 군대에 갔다.
◆"이북 사람이 갈 데가 어디있겠어"
▷군대엔 언제 가셨나요?
"1951년 7월에 강릉에 있는 공군 K-18 기지로 들어갔어요. 거기가 미 해병대 MAG-12 항공전대가 기지로 쓴 곳이에요. MAG-12 부대에서 전투기 무장정비 임무를 맡았어요."
▷왜 갑자기 군대에 가신 건가요?
"원래는 군대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부산에서 강릉에 온 것도 애초에 저 아껴주시던 신문사 지국장님 따라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강릉에 오니까 미국 해병대가 사람을 구한다면서 어린 나이도 받아준다고 하더라고요. 마침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니까 들어갔죠. 강릉 사람들이 전부 피난을 떠나는 바람에 사람이 없었는데, 내가 들어가니까 부대에서 반겨주더라고."
▷현역 군인은 아니었겠네요.
"그렇죠. 16세에 어떻게 현역 군인이 되겠어요. 그런데 하는 일은 똑같았어요. 제가 무장정비대 소속이었는데, 바로 옆에 군인이랑 같이 전투기 날개에 폭탄 장착하는 일을 했어요. 또 퓨즈를 조립하는 일도 했는데, 미사일에 퓨즈를 끼우고 철사로 마무리질 하는 일을 매일같이 했죠."
▷부대에서 기억에 남는 일이 또 있나요?
"수없이 뜨고 내린 전투기가 기억에 남죠. 전투기가 공중전을 벌이고 부대로 복귀할 때 망가진 채로 착륙할 때가 많아요. 하루는 미사일이 전투기 밑에 얇은 철사에 묶여서 대롱대롱 매달려서 왔어요. 그 철사가 완전히 분리되면 퓨즈를 건드리면서 터지는 건데, 부대에서 다행히 터지지는 않았어요. 그때 아슬아슬했지 아주…."
▷총도 받았나요?
"그럼 받았지. 군인이랑 똑같았다니까 글쎄.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중공군이 대관령을 넘어서 쳐들어온다는 말이 있었어요. 전부 총 들고 초소에서 비상 대기를 섰죠. 그 시절엔 학생이고 뭐고 봐주는 것 없어요. 누구든 싸울 수 있으면 해야 하는 건데 뭘…."
이인범 학생은 그렇게 미 해병대에서 싸우다 휴전을 맞았다. 그러나 그는 휴전 이후에도 계속 부대에 남았다. 이씨는 "고향이 이북인 사람들은 갈 곳이 없어서 많이들 군대에 남았다"며 "휴전 이후에도 막연히 통일을 꿈꾸며 고향에 돌아갈 생각만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귀향을 꿈꾸던 이씨는 1954년 대한민국 공군 이등병으로 입대했다. "될 듯, 말 듯한 통일을 군대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다"던 이씨는 1968년 중위 계급장을 달고 전역했다. 당시 그의 나이 만 33세. 공부를 위해 38선을 넘은 지 20년이 지난 때였다.
[한국전쟁 70주년 기획 인터뷰-참전자의 기억]
① "가슴 속 실탄 박힌 채 70년…학도병 참전 후회 없다"
② 군번도 총도 없이 싸운 女軍 "살려면 돌이라도 들어야지"
③ 인민군 탈영후 국군 입대…"오로지 고향 땅 밟기 위해 싸웠다"
정의진 기자 justjin@hankyung.com
엄밀히 말해 이씨는 한국전쟁 당시 군인이 아니라 학생이었다. 자유를 찾아, 양질의 교육을 찾아 정든 고향과 가족을 두고 이북에서 떠나온 중학생이었다. 나이 열 다섯의 학생에 불과했지만, 이인범 학생은 분명 나라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 직접 퓨즈를 조립한 폭탄을 전투기 날개에 달았다. 그렇게 이씨는 18년 동안의 군생활을 시작했다.
▷고향이 어디신가요?
“평안북도 용천군이 내 고향이에요. 서쪽으로는 압록강이 있고, 바로 북쪽에는 신의주가 있죠. 1948년 3월에 38선 밑으로 월남(越南)하기 전까지 쭉 거기서 살았어요.” ▷굉장히 먼 곳인데, 왜 월남하셨나요?
“나는 전적으로 공부를 하기 위해서 왔어요. 내가 월남했을 적에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는데, 북한이 당시만 해도 남쪽보다 훨씬 잘 살았거든요? 고깃국에 흰쌀밥 먹고 다닐 정도였으니까요. 문제는 자유가 사라지고 있다는 거였어요. 개인재산을 전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좋은 선생님들이 대부분 월남했어요. 이북에 남은 건 공산당쪽 선생님밖에 없었는데, 가르치는 게 원….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벌써 산수는 안 알려주고 공산주의 사상만 가르치더라고요. 어린 나이에도 그게 너무 싫었죠.”
▷가족과 함께 오셨나요?
"다 같이는 못 왔어요. 제가 4형제 중에 막내인데, 내 바로 위인 셋째 형님하고 어머니는 못 왔어요. 짐 정리하고 한달 후에 뒤따라 온다고 하셨는데 말이죠…. 여태 소식을 몰라요…."
▷월남할 때 어려움은 없었나요?
"38선 부근에서 소련군한테 들켜가지고는 큰일 날 뻔한 적이 있었죠. 그곳이 철원 즈음이었는데, 한밤중에 소련군이 나타나서 내 가슴팍에 총부리를 확 대더라고. 아이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어린 마음에 그대로 도망쳤어요."
▷그래도 결국 도망쳐서 다행이네요.
"그러게 말이야, 그때 만약 쏘면 죽는 거였지…. 그렇게 밤에 도망치다가 제가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정신을 잃었어요. 눈 뜨고 보니까 어딘지 모르는 주막에 누워있더라고. 인근에서 장사하는 분들이 나를 발견하고 짊어다가 데려다 놨대요. 어린 나이에 혼자고, 다리까지 다쳐서 쩔뚝이게 되니까 한참 울었어요."
▷같이 넘어오던 가족들은 어떻게 됐나요?
"주막에 있다 보니 마침 형님 가족이 주막으로 오더라고요. 약속한 것도 아닌데, 그 지역에 주막이 거기 한 곳밖에 없으니까 그리로 왔대요. 얼마나 반가웠는지…. 나중에 듣고 보니까 소련군이 시계랑 값진 것들만 좀 빼앗고 붙잡아가지는 않았다고 해요. 그렇게 다시 출발해서 결국 38선 넘었어요. 38선을 막 넘었을 때 다같이 만세를 불렀던 기억이 나네요."
◆포기할 수 없는 꿈, 공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대한민국에 도착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남한의 경제는 고깃국은커녕 쌀밥 먹기도 버거울 정도로 좋지 않았다. 평안도 이방인에게 안정적 터전은 더더욱 없었다. 자식 세 명이 딸린 이씨의 친형은 동생까지 보살필 여력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씨는 결국 친형과 헤어져 혼자 학업과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이씨처럼 스스로 학비를 벌어 생활하는 학생을 당시엔 '고학생(苦學生)'이라고 불렀다. '쓸 고(苦)' 자에 '배울 학(學)' 자. 모진 고생의 의미가 그대로 담겨있는 단어다. 이씨는 "신문 배달을 하면서 학비를 벌었다"며 "고학 생활이 얼마나 고달팠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당시 그의 나이 열 셋이었다.
▷월남 이후에 어디에서 사셨어요?
"대전에서 살았어요. 원래 서울에 좋은 학교 다니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는데, 서울은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가지고 도저히 생활을 못할 정도로 번잡했어요. 같이 월남한 형님도 서울에선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길래 곧장 대전으로 갔어요."
▷대전에선 어떻게 지내셨나요?
"대전에서 신문 배달하면서 중학교를 다녔어요. 워낙 신문을 잘 팔아서 신문 대전지국장이 나를 엄청 이뻐했죠. 내가 지국장님 집에서 혼자 얹혀 사니까 용돈도 조금씩 주셨는데, 다 공부하는 데에 썼어요. 그리고 당시엔 정부 수립 직후라 헌법이 적힌 종이도 팔았어요. 헌법도 내가 하루에 1000장씩 팔았지."
▷대전에서 전쟁을 맞으신 건가요?
"1950년 1월에 먼저 강릉으로 갔습니다. 신문 지국장님이 그리로 이사를 간다길래 따라간 거에요. 강릉에서 신문 좀 팔다가 거의 곧바로 전쟁이 터져버렸지…. 그때 같이 신문 배달하던 친구놈 형이 육군 정보장교여서 전쟁 터진 날 바로 나도 입대하겠다고 말했는데, 나이가 어리다고 안 받아줬어요. 바로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었죠. 그때 내 나이가 열 다섯이었어요."
▷피난길은 어땠나요?
"우선 형님 만나려고 대전까지 육군 8사단 트럭을 얻어타고 갔어요. 대전부터가 문제였는데, 형님 만나서 경북 김천까지 걸어갔습니다. 대전에서 김천으로 갈 때 벌써 뒤쪽 산 너머로는 북한군 탱크가 내려오는 게 보이더라고…. 하루도 못 쉬고 종일 100리(약 40km)씩은 걸었을 거에요. 김천에선 도저히 더는 못 걷겠더라고요. 다 포기할 뻔할 때 마침 김천역에 기차가 있어서 올라탔는데, 아주 난리였지…. 기차 겉에 사람이 빼곡히 붙어있고, 사람 위에 또 사람이 얹혀서 피난을 갔으니까…. 그렇게 기차 몇 번 갈아타고 부산으로 갔어요."
이씨는 피난길에서도 학업을 멈추지 않았다. 가난 탓에 가방도 없었지만, 길가에 굴러다니던 실탄 탄통에 연필과 노트를 넣고 학교를 다녔다. 등굣길 가방 역할을 하던 탄통은 학교 도착 이후엔 의자로 변신했다. 누가 시켜서 한 일도 아니었다. 이씨는 그렇게 '고학'을 했다. 전쟁통에 천막으로 세워진 부산의 한 종합학교를 속성으로 졸업한 그는, 군대에 갔다.
◆"이북 사람이 갈 데가 어디있겠어"
▷군대엔 언제 가셨나요?
"1951년 7월에 강릉에 있는 공군 K-18 기지로 들어갔어요. 거기가 미 해병대 MAG-12 항공전대가 기지로 쓴 곳이에요. MAG-12 부대에서 전투기 무장정비 임무를 맡았어요."
▷왜 갑자기 군대에 가신 건가요?
"원래는 군대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부산에서 강릉에 온 것도 애초에 저 아껴주시던 신문사 지국장님 따라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강릉에 오니까 미국 해병대가 사람을 구한다면서 어린 나이도 받아준다고 하더라고요. 마침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니까 들어갔죠. 강릉 사람들이 전부 피난을 떠나는 바람에 사람이 없었는데, 내가 들어가니까 부대에서 반겨주더라고."
▷현역 군인은 아니었겠네요.
"그렇죠. 16세에 어떻게 현역 군인이 되겠어요. 그런데 하는 일은 똑같았어요. 제가 무장정비대 소속이었는데, 바로 옆에 군인이랑 같이 전투기 날개에 폭탄 장착하는 일을 했어요. 또 퓨즈를 조립하는 일도 했는데, 미사일에 퓨즈를 끼우고 철사로 마무리질 하는 일을 매일같이 했죠."
▷부대에서 기억에 남는 일이 또 있나요?
"수없이 뜨고 내린 전투기가 기억에 남죠. 전투기가 공중전을 벌이고 부대로 복귀할 때 망가진 채로 착륙할 때가 많아요. 하루는 미사일이 전투기 밑에 얇은 철사에 묶여서 대롱대롱 매달려서 왔어요. 그 철사가 완전히 분리되면 퓨즈를 건드리면서 터지는 건데, 부대에서 다행히 터지지는 않았어요. 그때 아슬아슬했지 아주…."
▷총도 받았나요?
"그럼 받았지. 군인이랑 똑같았다니까 글쎄.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중공군이 대관령을 넘어서 쳐들어온다는 말이 있었어요. 전부 총 들고 초소에서 비상 대기를 섰죠. 그 시절엔 학생이고 뭐고 봐주는 것 없어요. 누구든 싸울 수 있으면 해야 하는 건데 뭘…."
이인범 학생은 그렇게 미 해병대에서 싸우다 휴전을 맞았다. 그러나 그는 휴전 이후에도 계속 부대에 남았다. 이씨는 "고향이 이북인 사람들은 갈 곳이 없어서 많이들 군대에 남았다"며 "휴전 이후에도 막연히 통일을 꿈꾸며 고향에 돌아갈 생각만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귀향을 꿈꾸던 이씨는 1954년 대한민국 공군 이등병으로 입대했다. "될 듯, 말 듯한 통일을 군대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다"던 이씨는 1968년 중위 계급장을 달고 전역했다. 당시 그의 나이 만 33세. 공부를 위해 38선을 넘은 지 20년이 지난 때였다.
[한국전쟁 70주년 기획 인터뷰-참전자의 기억]
① "가슴 속 실탄 박힌 채 70년…학도병 참전 후회 없다"
② 군번도 총도 없이 싸운 女軍 "살려면 돌이라도 들어야지"
③ 인민군 탈영후 국군 입대…"오로지 고향 땅 밟기 위해 싸웠다"
정의진 기자 justj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