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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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명. 세계 최저 수준인 우리나라의 지난해 합계 출산율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대한민국이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화하면서 저출산 문제는 시급한 국정 현안이 된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문제 해결의 시작부터 잘못됐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저출산'이라는 용어부터 바꿔야 한다는 건데요, 이 용어가 성차별적이라는 이유에서입니다.

국회에서도 관련 법안을 내놨습니다. 지난 13일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저출산' 용어를 '저출생'으로 바꾸는 것을 골자로 한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이길래 법률까지 바꿔야 한다는 걸까요.

'저출산' → '저출생', 왜 바꿔야 하나


사전적 의미로 ‘저출산’은 ‘아이를 적게 낳음’이라는 뜻입니다. 아이가 적게 태어나는 현상보다 여성이 아이를 적게 낳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어, 저출산 문제라고 하면 인구감소의 책임이 여성에게 있는 것으로 오인하게 할 수 있다는 지적이 있어왔습니다.

또 여성계에서는 저출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인구감소는 모두가 해결해야 할 사회구조적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만의 문제로 비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식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서라도 성차별적 용어인 '저출산'을 아이의 탄생 자체에 보다 방점을 두는 ‘저출생’이라는 용어로 대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겁니다.

박 의원도 "현행법이 사용하고 있는 ‘저출산’은 가임 여성 또는 산모 중심의 용어로 ‘여성이 아이를 적게 낳음’이라는 뜻이며 인구문제의 책임이 여성에게만 있는 것으로 오인될 소지가 있다"며 "신생아가 줄어드는 현상은 ‘일정 기간 태어나는 아이의 수가 적은 것’이므로, 아이 중심의 ‘저출생’이라는 용어가 보다 적합하다"고 법안의 취지를 밝혔습니다.

실제로 현행법과 정책은 저출생 대신 저출산을 용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관련 법안에서부터 '저출산·고령화사회기본법'이며 문제 해결을 담당하는 대통령직속기관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입니다.
서울시 성평등 언어사전
서울시 성평등 언어사전
한편 법안과는 별개로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조례에서 저출산을 저출생으로 바꿔나가고 있습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의 검토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5개 시도 및 16개 시군구가 조례에서 저출산 대신 저출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울시는 조례에서 저출생을 저출산으로 바꾼 데 이어 성평등 언어사전을 내고 성차별적 시각이 담긴 단어들을 대체했습니다. '유모차'를 '유아차'로, '학부형'을 '힉부모' 등으로 바꾼 게 대표적입니다.

문화체육관광부 역시 공식 정책용어는 아니지만 주요 캠페인 등에서 저출산을 저출생으로 변경해 쓰고 있습니다.

거듭 발의돼도 통과되지 못하는 이유는

박광온 의원이 발의한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 일부
박광온 의원이 발의한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 일부
사실 '저출산'을 '저출생'으로 바꾸자는 법안이 발의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20대 국회에서 김해영 전 의원이 같은 내용을 담은 법안을 발의했으나 임기만료로 폐기됐습니다.

이번 21대 국회에서도 강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양금희 국민의힘 의원이 각각 지난해 5월과 2020년 7월에 '저출생'으로의 용어 변경을 위한 법안을 대표 발의했으나 법제사법위원회의 문턱도 밟아보지 못하고 상임위원회에 계류돼 있습니다.

한 국회 입법조사관은 "먼저 발의된 법안을 먼저 처리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린다"면서 "보건복지위의 경우 코로나19 사태가 벌어지면서 감염병 관련 법안 등 시급한 문제가 먼저 처리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현재 국회 보건복지위에 계류된 법안만 1238건입니다. 저출산을 저출생으로 바꾸는, 사실상 같은 내용을 담은 법안이 두 개나 계류돼 있기 때문에 이번에 박 의원이 발의한 법안도 쉽게 통과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법안의 발의보다 처리 및 심사 과정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용어 변경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보건복지위가 검토보고서를 통해 "용어 변경에 신중해야 한다"며 사실상 반대 의견을 낸 것도 법안이 계류된 이유 중 하나로 꼽힙니다. 지난해 6월 보건복지위는 강민정 의원이 대표 발의한 '저출산'을 '저출생'으로 변경하는 법안에 대한 검토보고서에서 "저출산이 여성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전체의 구조적·종합적인 문제라는 인식변화를 유도하는 방안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개정취지는 타당한 측면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다만, '저출산'이라는 용어는 오랜기간 동안 법령이나 정책 등에서 공식화되어 사용해 오고 있다"며 "전세계적으로도 '출생아 수가 적다'는 의미로도 통용되어 사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정책의 흐름이 임신·출산을 개인의 선택으로써 존중하되 구조적인 사회적·경제적 제약을 완화하려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고 덧붙였습니다.

저출산이 이미 전 세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법안 변경 시 혼란이 예상된다는 겁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출산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Fertility'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용어"라며 "여성이 아이 낳는 도구라는 성차별적 의미를 내포한다는 주장에는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출산율(Fertility rate)과 출생률(Birth rate)은 다른 개념이기 때문에 용어 변경 시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통계적으로 사용하는 주요 지표로는 ‘합계출산율’과 ‘조출생률’이 있는데, 합계출산율은 여성 1명이 가임기간(15세~49세)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출생아 수를 나타냅니다. 조출생률은 인구 1000명당 새로 태어난 사람의 비율을 말합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인구 증감 여부를 합계출산율을 중심으로 측정·비교하고 있습니다. 이에 가임 여성 수가 아닌 전체 인구 대비 출생아 수를 측정하는 출생률은 고령화, 남녀 성비 등 현재의 인구 구조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실제 출산 수준을 측정하는 지표로는 부적합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입니다.

보건복지위는 "출산을 출생이라는 용어로 대체하게 되면 오히려 세대·지역·계층 등 사회 전반의 종합적 맥락이 축소되고 정책적 대상이 불분명해진다"며 "출생·양육 과정에서의 여성의 중요성이 오히려 약화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견도 있으므로 보다 심도 있는 사회적 의견수렴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맹진규 기자 mae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