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중대선거구제, 지역주의 양당제 정치구도 해소할 대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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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 "소선거구제, 진영 양극화·갈등 심화시켜…중대선거구제 검토 필요"
국내서도 9∼12대 총선, 중선거구제로 치러져…13대 이후 소선거구제 고착
'중선거구제가 지역구도·거대양당제 해소?' 물음에는 '글쎄…'
윤석열 대통령이 새해 벽두에 '중대선거구제'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이 문제가 정치권의 화두로 떠올랐다.
윤 대통령은 연초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소선거구제는 전부 아니면 전무로 가다 보니 선거가 너무 치열해지고 진영이 양극화되고 갈등이 깊어졌다"며 "중대선거구제를 통해 대표성이 좀 더 강화되는 방안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역 특성에 따라 2명, 3명, 4명을 선출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때마침 중대선거구제가 지론인 것으로 알려진 김진표 국회의장도 2월까지 각 정당에 선거법 개정안을 내달라고 요청하며 선거구제 개편에 힘을 실었다.
정치권도 당초 중대선거구제로의 개편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은 지난 3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골목정치와 지역정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중대선거구제"라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의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 간사인 전재수 의원도 지난 2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소선거구제는 여야를 막론하고 망국적 제도라고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다만 이후 국민의힘을 중심으로 '신중론'이 제기되며 후속 논의가 주춤하고 있으나 중대선거구제는 향후 국회 정개특위에서 의제로 다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중대선거구제는 현행 소선거구제의 폐단을 극복할 대안으로 자주 거론돼 왔다.
중대선거구제 아래에선 각각 영남·호남을 지역 기반으로 삼아 국내 정치를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거대 양당 구도를 흔들어 영남에서 진보 인사가, 호남에서 보수 정치인이 당선되고 소수 정당도 당선자를 배출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중대선거구제는 그런 효과를 가져올까.
◇ 소선거구와 중대선거구제는 어떤 차이?
소선거구제와 중대선거구제는 단위 선거구에서 선출하는 의원 수에 따라 나뉜다.
한 선거구에서 1명을 뽑으면 소선구제, 2인 이상이면 중대선거구제라고 한다.
더 세분화하면 통상 선출 인원이 2∼4인일 때 중선거구제, 5인 이상은 대선거구제로 분류된다.
우리 국회의원 선거에선 소선거구제가 주를 이뤘지만 5대와 9∼12대 총선은 중대선거구제로 치러지기도 했다.
5대 총선(1960년 7월)은 의원내각제로 전환된 시절로, 상원인 참의원 선거에만 중대선거구제가 적용됐다.
대통령제로 한정하면 중선거구제로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는 9∼12대로 4차례에 불과했고, 13대 총선(1988년 4월) 후 현재까지는 소선거구제가 30년 넘게 자리를 잡고 있다.
특히 국내 소선거구제는 유권자가 후보자 1명만 선택하는 '단기명'(單記名) 투표를 하고, 후보자 중 가장 많은 득표를 한 이가 선출되는 방식(단순다수대표제)을 취하고 있다.
이와 달리 특정 기준, 예를 들어 과반을 충족한 최다 득표자를 선출하는 절대다수제도 있다.
과반 기준에 미달할 경우 결선투표를 할 수 있다.
과거 중선거구제를 시행할 땐 유권자가 1명만 기표하고 득표 순위 1위와 2위가 선출되는 단기 비(非)이양식 제도로 진행됐다.
다른 방식으론 유권자가 1명만 기표하되 후보자 선호순위를 표시해 나중에 그 선호순위에 따라 해당 표를 다른 후보에게 이양하는 단기이양식 제도도 있고, 아예 유권자가 복수의 후보자를 선택하는 연기명(連記名) 투표 방식도 있다.
◇ 소선거구제, '여야 나눠 먹기' 중선거구제에 대한 반발로 13대 총선서 재도입
현재와 같은 소선거구제는 민주화 이후 치러진 1988년 13대 총선 때 그 기반이 마련됐다.
선거를 한 달 앞둔 그해 3월 '국회의원선거법' 개정으로 소선거구제가 재도입됐다.
지금은 소선거구제가 "망국적인 제도"로 비판받지만 당시엔 반대로 중선거구제가 그러했다.
당시 연합뉴스 보도를 보면 그해 4월 총선(13대 선거)은 "소선구제로 실시됨으로써 우리 정치 풍토를 왜곡시켜온 '유신(維新) 정치제도'가 청산되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됐다.
당시 중선거구제는 '여야 동반 당선', '여야 나눠먹기식' 제도라는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제 소선거구제라는 엄격한 '적자생존'의 경쟁에 의해 상당수의 기존 정치인이 도태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실제 중선거구제는 유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선거구제는 유신 시절 치러진 9대 총선(1973년 2월)에 처음 도입됐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집권당의 안정적인 의석 확보를 위해 중선거구제로 전환을 꾀했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박 전 대통령은 심지어 국회의원 전체 의석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유신헌법에서 도입된 대통령·국회의원 선출 기구)에서 선출하는 방식도 도입했다.
이렇게 뽑힌 국회의원들은 '유신정우회'로 불렸다.
직선제로 전환돼 치러진 1987년 대통령선거 이후 선거법 개정 논의 과정에서 당초엔 중대선거구제가 우세했다.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은 소선거구제와 중선거구제의 혼합 형태를, 야당인 통합민주당(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공화당)은 중선거구제를 각각 지지했고, 평화민주당(평민당)만이 소선구제를 주장했다.
하지만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소선거구제로의 전환에 전격 합의하면서 소선거구제가 대세가 됐다.
호남이라는 확실한 지역 기반이 있는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는 소선거구제로 바뀌어야 승산이 있을 것으로 봤고, 노태우 대통령은 국회에 새로운 인물을 내세울 필요성이 있었는데 이런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는 당시의 중선거구제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이해할 수 있다.
한 선거구에서 2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에서 각 정당은 선거구당 후보자를 2명 낼 수 있었지만 실제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의 논문 '한국의 중선거구제가 선거 결과에 미친 영향'(2010년)에 따르면 중선거구제로 치러진 11대 총선에서 여당인 민정당과 당시 제1야당인 민주한국당이 후보자 2명을 낸 선거구는 한 곳도 없었다.
12대 총선에서도 여당인 민정당은 각 선거구에 후보자 1명만을 냈고, 당시 제1야당인 신한민주당이 후보자 2명을 출마시킨 선거구는 3곳에 불과했다.
후보자 2명을 세웠다가 표가 분산돼 다른 당 후보가 어부지리로 당선되는 것을 우려해 여당이든 야당이든 후보자를 1명만 내 선거구당 1석을 확실히 챙기자는 전략을 취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나눠 먹기 전략'은 현실에서 통했다.
예컨대 민정당은 12대 총선에서 전라북도(7명/총 의석 14석), 전라남도(11명/22석), 경상북도(10명/20석), 경상남도(10명/20석) 등에서 지역별 총의석수의 절반을 챙겼다.
호남에 확실한 지지 기반이 있는 평민당으로선 소선구제로 바뀐다면 할당된 의석을 다 가질 수가 있다는 셈법이 나올 수 있다.
실제 13대 총선 결과도 그랬다.
평민당은 광주(5명/총 의석 5석), 전북(14명/14석), 전남(17명/18석) 등 호남 지역을 사실상 싹쓸이한 덕분에 제1 야당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공천하는 입장에서도 이해관계가 달라진다.
중선거구제에선 선거구당 2명을 뽑는데 1명씩 후보자를 내왔지만 소선거구제에선 전체 의석에 후보를 낼 수가 있다.
예컨대 민정당은 중선거구제로 치러진 12대 총선에선 지역구 의석수(184석)의 절반인 92명만 입후보시켰지만, 소선거구제로 전환된 13대 총선에선 지역구 의석수(224석)만큼 후보를 출마시켰다.
노 전 대통령으로선 공천권을 행사할 여지가 대폭 늘어난 셈이다.
◇ 중대선거구제로 전환 논의 줄곧 이어져
소선거구제는 재도입 이후 끊임없이 중대선거구제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다만 실제 개편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서복경 서강대 정치연구소 전임연구원의 '선거구제 개편 논의의 한국적 맥락'(2010년)에 따르면 '문민정부' 당시인 1997년 10월 여당인 신한국당의 이회창 당시 총재가 중대선거구제로 개편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국민의 정부' 시절 제16대 총선을 1년여 앞두고 진행된 1999년 선거제도 개편 논의에서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여당인 국민회의는 '중대선거구제+정당명부제'를, 야당인 한나라당은 소선거구제 유지를 각각 주장했다.
이어 집권연합인 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은 '중대선거구제+정당명부 비례대표'에 합의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지역주의 정당구조를 전국정당화하기 위해 중선거구제를 채택하기로 했다"고 밝히기까지 했다.
소선거구제가 김 대통령의 주장으로 13대 총선에 재도입된 바를 감안하면 상당한 입장 선회인 셈이다.
'참여정부'에선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지역구도를 해소하기 위해선 중대선거구제가 가장 바람직한 대안이라고 밝히며 선거제도 개편 논의를 주도했다.
'이명박 정부'에선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가 "현행 선거제도(소선거구제)가 지역주의 정치 갈등과 지역별 일당독점 체제 강화의 주요 원인으로 개선책이 필요하다"며 중대선거구제로 개편을 제안했다.
'박근혜 정부'에선 헌법재판소가 2014년 10월 선거구별 인구 편차를 현행 3대 1에서 2대 1 이하로 바꾸라고 판결한 것을 계기로 선거제도 개편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중대선거구제가 또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문재인 정부'에서 진행된 국회 정개특위에선 농촌의 경우 현행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되 대도시는 중대선거구제를 적용하는 '도농복합 선거구제'가 논의되기도 했다.
◇ '중대선거구제가 지역구도 해소에 효과?'엔 물음표
그렇다면 중대선거구제는 지역주의와 거대 양당 구도를 타파하는 데 효과적인 제도일까.
중선거구제로 치러진 9∼12대 총선에선 실제 지역주의적 선거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준한 교수는 '한국의 중선거구제가 선거 결과에 미친 영향'이란 논문에서 이를 두고 "당시 시대적 환경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며 당시는 "아직 대선에서도 지역주의가 맹아 수준이었고 유신과 군사정권으로 인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보장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설령 당시 선거 결과에서 중선거구제로 지역주의가 완화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입장에 따라 이를 '여야 나눠먹기식 제도'라고 볼 여지도 있다.
정태일 충북대 교수는 '한국 국회의원 선거제도의 비판적 검토'(2019년)에서 9∼12대 총선 결과를 토대로 선거제의 대표성과 공정성을 분석한 결과 "중대선거제도는 제1당(집권당)과 제2당(제1야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미 중선거구제로 치러지는 기초의원 선거의 결과를 봐도 중선거구제가 지역구도 해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기초의원 선거에서 중대선거구제는 지역주의가 만연해진 2006년부터 도입됐으나 지역주의가 완화됐다고 볼 만한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지난해 치러진 제8회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전북의 기초의회 의석 172석 중 146석을 챙겼고, 국민의힘은 1석도 얻지 못했다.
특히 2명을 뽑는 선거구 대부분에서 2명 다 민주당 후보가 당선됐고, 3명을 뽑는 선거구에서도 3명 다 민주당 후보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는 국민의힘이 미리 당선이 안 될 것으로 판단해 아예 후보를 내지 않은 탓이 크다.
당시 기초의원 선거에서 전북 지역 국민의힘 후보자는 13명에 불과했다.
반대로 경북에선 국민의힘이 기초의회 의석 251석 중 192석을 얻었지만 민주당이 확보한 의석은 21석에 그쳤다.
국회의원과 기초의원 간 위상 차이를 감안해야겠지만 지역주의가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상황에선 중대선거구제 전환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고 풀이할 수 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지역주의 완화를 위한 기초의회 선거제도 개선방안'(2011년)에서 오히려 "중선거구제는 지역주의 정치 구도에서 특정 정당의 의석 독점을 초래하는 역효과를 냈다"고 평가했다.
입법조사처는 이런 역효과가 "지역구 선거에서 한 표라도 더 획득한 최다득표자 1인만이 선출되는 다수제 방식과 관련이 있다"며 "외형적으로 한 선거구에서 당선자의 수는 늘어났지만, 다수대표제 방식으로 선출되기 때문에 지역의 밀집된 지지를 갖는 정당의 후보가 대부분의 의석을 독점할 가능성이 높게 된 셈"이라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국내서도 9∼12대 총선, 중선거구제로 치러져…13대 이후 소선거구제 고착
'중선거구제가 지역구도·거대양당제 해소?' 물음에는 '글쎄…'
윤석열 대통령이 새해 벽두에 '중대선거구제'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이 문제가 정치권의 화두로 떠올랐다.
윤 대통령은 연초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소선거구제는 전부 아니면 전무로 가다 보니 선거가 너무 치열해지고 진영이 양극화되고 갈등이 깊어졌다"며 "중대선거구제를 통해 대표성이 좀 더 강화되는 방안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역 특성에 따라 2명, 3명, 4명을 선출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때마침 중대선거구제가 지론인 것으로 알려진 김진표 국회의장도 2월까지 각 정당에 선거법 개정안을 내달라고 요청하며 선거구제 개편에 힘을 실었다.
정치권도 당초 중대선거구제로의 개편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은 지난 3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골목정치와 지역정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중대선거구제"라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의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 간사인 전재수 의원도 지난 2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소선거구제는 여야를 막론하고 망국적 제도라고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다만 이후 국민의힘을 중심으로 '신중론'이 제기되며 후속 논의가 주춤하고 있으나 중대선거구제는 향후 국회 정개특위에서 의제로 다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중대선거구제는 현행 소선거구제의 폐단을 극복할 대안으로 자주 거론돼 왔다.
중대선거구제 아래에선 각각 영남·호남을 지역 기반으로 삼아 국내 정치를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거대 양당 구도를 흔들어 영남에서 진보 인사가, 호남에서 보수 정치인이 당선되고 소수 정당도 당선자를 배출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중대선거구제는 그런 효과를 가져올까.
◇ 소선거구와 중대선거구제는 어떤 차이?
소선거구제와 중대선거구제는 단위 선거구에서 선출하는 의원 수에 따라 나뉜다.
한 선거구에서 1명을 뽑으면 소선구제, 2인 이상이면 중대선거구제라고 한다.
더 세분화하면 통상 선출 인원이 2∼4인일 때 중선거구제, 5인 이상은 대선거구제로 분류된다.
우리 국회의원 선거에선 소선거구제가 주를 이뤘지만 5대와 9∼12대 총선은 중대선거구제로 치러지기도 했다.
5대 총선(1960년 7월)은 의원내각제로 전환된 시절로, 상원인 참의원 선거에만 중대선거구제가 적용됐다.
대통령제로 한정하면 중선거구제로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는 9∼12대로 4차례에 불과했고, 13대 총선(1988년 4월) 후 현재까지는 소선거구제가 30년 넘게 자리를 잡고 있다.
특히 국내 소선거구제는 유권자가 후보자 1명만 선택하는 '단기명'(單記名) 투표를 하고, 후보자 중 가장 많은 득표를 한 이가 선출되는 방식(단순다수대표제)을 취하고 있다.
이와 달리 특정 기준, 예를 들어 과반을 충족한 최다 득표자를 선출하는 절대다수제도 있다.
과반 기준에 미달할 경우 결선투표를 할 수 있다.
과거 중선거구제를 시행할 땐 유권자가 1명만 기표하고 득표 순위 1위와 2위가 선출되는 단기 비(非)이양식 제도로 진행됐다.
다른 방식으론 유권자가 1명만 기표하되 후보자 선호순위를 표시해 나중에 그 선호순위에 따라 해당 표를 다른 후보에게 이양하는 단기이양식 제도도 있고, 아예 유권자가 복수의 후보자를 선택하는 연기명(連記名) 투표 방식도 있다.
◇ 소선거구제, '여야 나눠 먹기' 중선거구제에 대한 반발로 13대 총선서 재도입
현재와 같은 소선거구제는 민주화 이후 치러진 1988년 13대 총선 때 그 기반이 마련됐다.
선거를 한 달 앞둔 그해 3월 '국회의원선거법' 개정으로 소선거구제가 재도입됐다.
지금은 소선거구제가 "망국적인 제도"로 비판받지만 당시엔 반대로 중선거구제가 그러했다.
당시 연합뉴스 보도를 보면 그해 4월 총선(13대 선거)은 "소선구제로 실시됨으로써 우리 정치 풍토를 왜곡시켜온 '유신(維新) 정치제도'가 청산되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됐다.
당시 중선거구제는 '여야 동반 당선', '여야 나눠먹기식' 제도라는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제 소선거구제라는 엄격한 '적자생존'의 경쟁에 의해 상당수의 기존 정치인이 도태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실제 중선거구제는 유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선거구제는 유신 시절 치러진 9대 총선(1973년 2월)에 처음 도입됐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집권당의 안정적인 의석 확보를 위해 중선거구제로 전환을 꾀했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박 전 대통령은 심지어 국회의원 전체 의석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유신헌법에서 도입된 대통령·국회의원 선출 기구)에서 선출하는 방식도 도입했다.
이렇게 뽑힌 국회의원들은 '유신정우회'로 불렸다.
직선제로 전환돼 치러진 1987년 대통령선거 이후 선거법 개정 논의 과정에서 당초엔 중대선거구제가 우세했다.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은 소선거구제와 중선거구제의 혼합 형태를, 야당인 통합민주당(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공화당)은 중선거구제를 각각 지지했고, 평화민주당(평민당)만이 소선구제를 주장했다.
하지만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소선거구제로의 전환에 전격 합의하면서 소선거구제가 대세가 됐다.
호남이라는 확실한 지역 기반이 있는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는 소선거구제로 바뀌어야 승산이 있을 것으로 봤고, 노태우 대통령은 국회에 새로운 인물을 내세울 필요성이 있었는데 이런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는 당시의 중선거구제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이해할 수 있다.
한 선거구에서 2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에서 각 정당은 선거구당 후보자를 2명 낼 수 있었지만 실제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의 논문 '한국의 중선거구제가 선거 결과에 미친 영향'(2010년)에 따르면 중선거구제로 치러진 11대 총선에서 여당인 민정당과 당시 제1야당인 민주한국당이 후보자 2명을 낸 선거구는 한 곳도 없었다.
12대 총선에서도 여당인 민정당은 각 선거구에 후보자 1명만을 냈고, 당시 제1야당인 신한민주당이 후보자 2명을 출마시킨 선거구는 3곳에 불과했다.
후보자 2명을 세웠다가 표가 분산돼 다른 당 후보가 어부지리로 당선되는 것을 우려해 여당이든 야당이든 후보자를 1명만 내 선거구당 1석을 확실히 챙기자는 전략을 취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나눠 먹기 전략'은 현실에서 통했다.
예컨대 민정당은 12대 총선에서 전라북도(7명/총 의석 14석), 전라남도(11명/22석), 경상북도(10명/20석), 경상남도(10명/20석) 등에서 지역별 총의석수의 절반을 챙겼다.
호남에 확실한 지지 기반이 있는 평민당으로선 소선구제로 바뀐다면 할당된 의석을 다 가질 수가 있다는 셈법이 나올 수 있다.
실제 13대 총선 결과도 그랬다.
평민당은 광주(5명/총 의석 5석), 전북(14명/14석), 전남(17명/18석) 등 호남 지역을 사실상 싹쓸이한 덕분에 제1 야당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공천하는 입장에서도 이해관계가 달라진다.
중선거구제에선 선거구당 2명을 뽑는데 1명씩 후보자를 내왔지만 소선거구제에선 전체 의석에 후보를 낼 수가 있다.
예컨대 민정당은 중선거구제로 치러진 12대 총선에선 지역구 의석수(184석)의 절반인 92명만 입후보시켰지만, 소선거구제로 전환된 13대 총선에선 지역구 의석수(224석)만큼 후보를 출마시켰다.
노 전 대통령으로선 공천권을 행사할 여지가 대폭 늘어난 셈이다.
◇ 중대선거구제로 전환 논의 줄곧 이어져
소선거구제는 재도입 이후 끊임없이 중대선거구제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다만 실제 개편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서복경 서강대 정치연구소 전임연구원의 '선거구제 개편 논의의 한국적 맥락'(2010년)에 따르면 '문민정부' 당시인 1997년 10월 여당인 신한국당의 이회창 당시 총재가 중대선거구제로 개편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국민의 정부' 시절 제16대 총선을 1년여 앞두고 진행된 1999년 선거제도 개편 논의에서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여당인 국민회의는 '중대선거구제+정당명부제'를, 야당인 한나라당은 소선거구제 유지를 각각 주장했다.
이어 집권연합인 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은 '중대선거구제+정당명부 비례대표'에 합의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지역주의 정당구조를 전국정당화하기 위해 중선거구제를 채택하기로 했다"고 밝히기까지 했다.
소선거구제가 김 대통령의 주장으로 13대 총선에 재도입된 바를 감안하면 상당한 입장 선회인 셈이다.
'참여정부'에선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지역구도를 해소하기 위해선 중대선거구제가 가장 바람직한 대안이라고 밝히며 선거제도 개편 논의를 주도했다.
'이명박 정부'에선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가 "현행 선거제도(소선거구제)가 지역주의 정치 갈등과 지역별 일당독점 체제 강화의 주요 원인으로 개선책이 필요하다"며 중대선거구제로 개편을 제안했다.
'박근혜 정부'에선 헌법재판소가 2014년 10월 선거구별 인구 편차를 현행 3대 1에서 2대 1 이하로 바꾸라고 판결한 것을 계기로 선거제도 개편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중대선거구제가 또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문재인 정부'에서 진행된 국회 정개특위에선 농촌의 경우 현행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되 대도시는 중대선거구제를 적용하는 '도농복합 선거구제'가 논의되기도 했다.
◇ '중대선거구제가 지역구도 해소에 효과?'엔 물음표
그렇다면 중대선거구제는 지역주의와 거대 양당 구도를 타파하는 데 효과적인 제도일까.
중선거구제로 치러진 9∼12대 총선에선 실제 지역주의적 선거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준한 교수는 '한국의 중선거구제가 선거 결과에 미친 영향'이란 논문에서 이를 두고 "당시 시대적 환경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며 당시는 "아직 대선에서도 지역주의가 맹아 수준이었고 유신과 군사정권으로 인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보장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설령 당시 선거 결과에서 중선거구제로 지역주의가 완화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입장에 따라 이를 '여야 나눠먹기식 제도'라고 볼 여지도 있다.
정태일 충북대 교수는 '한국 국회의원 선거제도의 비판적 검토'(2019년)에서 9∼12대 총선 결과를 토대로 선거제의 대표성과 공정성을 분석한 결과 "중대선거제도는 제1당(집권당)과 제2당(제1야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미 중선거구제로 치러지는 기초의원 선거의 결과를 봐도 중선거구제가 지역구도 해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기초의원 선거에서 중대선거구제는 지역주의가 만연해진 2006년부터 도입됐으나 지역주의가 완화됐다고 볼 만한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지난해 치러진 제8회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전북의 기초의회 의석 172석 중 146석을 챙겼고, 국민의힘은 1석도 얻지 못했다.
특히 2명을 뽑는 선거구 대부분에서 2명 다 민주당 후보가 당선됐고, 3명을 뽑는 선거구에서도 3명 다 민주당 후보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는 국민의힘이 미리 당선이 안 될 것으로 판단해 아예 후보를 내지 않은 탓이 크다.
당시 기초의원 선거에서 전북 지역 국민의힘 후보자는 13명에 불과했다.
반대로 경북에선 국민의힘이 기초의회 의석 251석 중 192석을 얻었지만 민주당이 확보한 의석은 21석에 그쳤다.
국회의원과 기초의원 간 위상 차이를 감안해야겠지만 지역주의가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상황에선 중대선거구제 전환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고 풀이할 수 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지역주의 완화를 위한 기초의회 선거제도 개선방안'(2011년)에서 오히려 "중선거구제는 지역주의 정치 구도에서 특정 정당의 의석 독점을 초래하는 역효과를 냈다"고 평가했다.
입법조사처는 이런 역효과가 "지역구 선거에서 한 표라도 더 획득한 최다득표자 1인만이 선출되는 다수제 방식과 관련이 있다"며 "외형적으로 한 선거구에서 당선자의 수는 늘어났지만, 다수대표제 방식으로 선출되기 때문에 지역의 밀집된 지지를 갖는 정당의 후보가 대부분의 의석을 독점할 가능성이 높게 된 셈"이라고 설명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