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 인상과 주택시장 침체 여파로 올해 전국의 월세 계약 건수(확정일자 기준)가 처음으로 100만 건을 돌파하고 거래량에서도 전세를 처음으로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송파구 잠실동 아파트 상가의 한 중개업소 안내 게시판이 월세 매물로 채워져 있다.     임대철 한경디지털랩 기자
금리 인상과 주택시장 침체 여파로 올해 전국의 월세 계약 건수(확정일자 기준)가 처음으로 100만 건을 돌파하고 거래량에서도 전세를 처음으로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송파구 잠실동 아파트 상가의 한 중개업소 안내 게시판이 월세 매물로 채워져 있다. 임대철 한경디지털랩 기자
“전세는 찾는 사람이 없어 매물만 쌓이고 있습니다. 월세 문의만 옵니다.”(서울 마포구 A공인 관계자)

10일 서울 마포구 일대 중개업소 게시판에는 전세 물건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매물은 넘쳐나지만 찾는 이가 없어 아예 내걸지도 않은 것이다. 중개업소들은 월세 소개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총 3885가구 규모인 서울 아현동 ‘마포래미안푸르지오’에서 지난달 체결된 임대차 계약은 총 5건. 전세 계약은 계약갱신청구권을 사용한 단 한 건이고 나머지는 모두 월세였다.

국내 임대차 시장이 중대 변화를 맞고 있다. 올해는 월세 첫 100만 건 돌파와 함께 사상 처음으로 월세 계약이 전세를 앞지르는 원년이 될 전망이다. 국내 임대차 시장은 “매달 고정적으로 나가는 월세는 저축을 갉아먹는다”는 인식 아래 오랜 기간 전세가 주도해왔다. 하지만 최근 2~3년간 가파르게 오른 전셋값 부담, 금리 인상, 주택 시장 침체가 맞물리면서 전·월세 거래 비중 역전이 고착화하는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월세 선호는 부동산 침체기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이라면서 “국내 임대차 시장에서 갈수록 월세 비중이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첫 100만 건 돌파’ 월세, 대세 되나

대법원 등기정보광장이 최근 공개한 1월부터 9월까지의 월세 확정일자 신고 건수는 총 107만3412건이다. 통계조사 이후 처음으로 연간 월세 확정일자 신고 건수가 100만 건을 돌파한 데다 전세 확정일자 신고 건수(101만1172건)를 추월했다. 국토교통부가 지난달 말 발표한 ‘8월 주택 통계’에서 월세 거래량은 11만9794건으로 7월보다 12.9%, 전년 동월 대비 26.3% 증가했다. 반면 전세 거래량(10만7796건)은 전년 동월 대비 7.5% 줄었다. 전체 임대차 거래에서 월세가 차지하는 비중도 51.6%로 전년 동기(42.6%) 대비 9%포인트 높아졌다.

전세는 영어로 나타낼 표현이 마땅치 않아 ‘jeonse’라고 쓴다.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임대제도다. 집주인에게 목돈을 맡겼다가 퇴거할 때 전액 그대로 돌려받는 시스템 때문에 외국인들은 “공짜로 집을 빌려 쓰는 것”이라며 신기해하는 임대 방식이다. 세를 끼고 집을 사 두는 갭투자, 비교적 낮은 문턱의 전세자금대출 등 임대·임차인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며 오랜 기간 임대차 시장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전세는 빙하기를 맞은 최근 부동산 시장에서 점차 밀려나고 있다. 집값 하락기에 세를 끼고 집을 사려는 투자 수요가 자취를 감췄을 뿐 아니라 높은 금융비용을 감당하고 세 들어 사는 것도 부담스러워졌기 때문이다.

금리 인상 외에도 월세를 가속화하는 요인은 다양하다. 그동안 신고가 잘 이뤄지지 않던 오피스텔, 원룸 등 준주택의 월세 계약 신고가 지난해 6월부터 적용된 ‘전·월세 임대차 신고제’로 의무화됐다. 월세 부담이 상대적으로 작은 연립·다가구주택의 월세화도 빨라지는 추세다. 여경희 부동산R114 수석연구원은 “임대차 신고 의무화 후 신규 계약하는 임대 물건의 주거면적이 좁아진 것으로 나타났다”며 “저소득층 1인 가구 증가로 저렴한 다가구·연립주택 월세를 찾는 수요가 크게 늘었다”고 설명했다.

‘전세의 종언’ 놓고 갑론을박

월세 가속화에는 대부분 전문가의 의견이 일치한다. 이창무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금리 인상이 장기화하는 추세인 만큼 월세 가속화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며 “해외에서도 월세를 살면서 내집 마련에 나서는 만큼 전세 위축을 ‘계층 사다리 끊기’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보증금을 1년치 월세 정도로 확 낮춘 대신 세입자의 신용도와 월세 지불 능력에 따라 차등화한 미국·호주식 월세제도 도입 필요성도 제기된다.

아파트를 중심으로 전세가 완전히 사라지기는 어려울 것이란 목소리도 여전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전세 소멸론’이 나왔지만 주택가격이 다시 상승하자 전세 거래가 활발해졌다. 국내 주택 시장을 아파트와 비(非)아파트로 나눠서 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허윤경 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임대수익 목적의 오피스텔, 생활숙박시설의 월세화는 한층 빨라질 것”이라면서도 “아파트는 중산층의 소득 수준을 고려할 때 완전 월세보다는 준전세, 준월세 등으로 다양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종필 기자 j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