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의 아버지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비범한 천재. 노동자의 친구이자 스승. 밝게 빛나는 태양과 같은 인간적 매력에 사회주의에 활력을 불어넣는 인물….” 인민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과거 제정 러시아의 차르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아부’ 속에 둘러싸여 있었다. 신문기사와 시(詩)뿐만 아니라 공공장소에서 한 연설, 공산당의 각종 결정문, 문학비평과 과학실험 결과 발표에까지 ‘스탈린 찬양’은 소련 사회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였다.공산당 기관지 프라브다는 매일 1면에 ‘강철 같은 친애하는 지도자’에게 보내는 소련 시민들의 감사편지를 싣는 게 일종의 관행이었다. 흔히 스탈린 독재체제가 확립된 시기를 프라브다에서 스탈린 생일을 대대적으로 축하한 1929년 12월로 본다. 이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아부 경쟁이 벌어졌다. 10년 뒤인 1939년 12월 19일. 스탈린의 예순 번째 생일에 프라브다는 “지구상에 스탈린이라는 이름에 필적할만한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탈린은 자유의 횃불처럼 밝게 빛나며, 전 세계 수백만 명의 노동자에게는 투쟁의 깃발처럼 나부낀다.…스탈린은 현재의 레닌이다! 스탈린은 당의 두뇌요 심장이다! 스탈린은 더 나은 삶을 위해 투쟁하는 수백만 명의 기치다”라고 공표했다. 이후 그의 생일만 되면 낯뜨거운 찬양 문구가 신문 지상을 도배했다. 신문기사뿐 아니라 “모스크바는 잠들어 있다./ 깨어 있는 이는 오직 스탈린뿐/ 이 늦은 시각에~/ 스탈린은 우리를 생각한다./…초원의 작은 소년은 스탈린에게 편지를 쓸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크렘린의 답장을
“신께서 원하신다. (Deus le volt)”1095년 11월 27일.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교황 우르반 2세의 연설을 듣던 군중들은 어느 순간부터 한목소리로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신의 영광’을 지상에서 구현하기 위한 열정이 운집했던 군중들을 휘감았다.군중들을 자극한 우르반 2세의 연설은 튀르크인들의 침입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동방 기독교도들을 도와야 하며 더는 이교도가 동방의 기독교 영지를 침입해 성지와 교회를 휩쓸고 다니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교황의 열변을 들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전체 기독교 세계가 동방을 구원하기 위해 진군해야 한다고 느꼈다. 모두가 예루살렘으로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그들은 이제 내부에서 치고받고 싸우며 살육과 분쟁을 이어가던 것을 멈추고 ‘올바른 전쟁’. 즉 신을 위한 일에 나설 것이었다.이처럼 십자군 전쟁의 종교적, 정신적, 감성적인 것으로 촉발됐다.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을 따져보면 그 배경엔 경제적 요인이 자리 잡고 있는 법. 중세 유럽인들이 그처럼 대외 공격·팽창의 목소리에 쉽게 감응하고 그런 공격적인 움직임이 오래 지속된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당시 유럽은 인구가 빠르게 늘기 시작하던 때였다. 온난한 기후와 삼포제 등 농업기술의 개선 덕에 농업생산량이 늘어난 영향이었다. 자연스럽게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까지 진행된 십자군 전쟁의 전 기간은 유럽의 인구가 증가하던 때와 겹쳤다.인구 관련 사료가 상세하게 남아있는 잉글랜드의 경우, 12세기 하반기 0.2%였던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13세기가 되면 0.75%로 상승했다. 12세기 프랑스의 연평균 인구증가율이 0.39%, 독일이 0
‘노총각세’(Aes uxorium).독특한 이름 덕에 고대 로마 특유의 세금 제도는 일찍부터 관심의 대상이 됐다. 현대 로마사 연구의 기틀을 다진 테오도르 몸젠 이후 수많은 학자가 이 세금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노력해왔다.하지만 법안의 구체적인 내용은 불분명하다. 제도 도입 이후 지속해서 세금이 부과된 것인지도 확실치 않다. 모두 자료가 부실한 탓이다.분명한 것은 ‘노총각세가 도입됐었다’라는 단 한 가지 사실이다.기원전 403년 호구감찰관이었던 푸리우스 카밀루스는 전격적으로 노총각세를 도입하며 사실상 로마 시민들의 결혼을 의무화했다. 나이가 들어서까지도 결혼하지 않은 남성에게 세금을 부과한 것이다.제도의 도입 취지는 ‘인용의 인용’ 형식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제도가 시행된 지 한참 뒤인 기원후 1세기 로마의 역사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로마 시민은 아이를 양육함으로써 부모에 대한 감사의 빚을 갚는 것”이라며 “남편과 아버지로서 명예롭지 않은 이들은 국가의 금고에 돈을 지급하는 것으로서 부모로부터 받은 빚을 갚아야 했다”며 제도 도입의 명분을 설명했다.실질적으로 노총각세에 해당하는 세금이 부과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기원전 18년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전제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사회개혁의 목적으로 혼인과 부모의 의무, 간음 등과 관련한 법 제도를 대거 정비했다.법 개정의 이면에는 이탈리아반도 내에서 본토인들의 인구를 증대시켜야겠다는 의도도 담겨있었다.당시 도입된 법 중에는 아이를 세 명(또는 네 명) 이상 낳으면 각종 혜택이 부과되는 ‘세 아이 법(jus trium liberorum)’도 있었다. 유아 사망률이
백제 개로왕(蓋鹵王·재위 기간 455~475년)은 바둑을 좋아했던 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과 ‘도미(都彌) 열전’에 각각 바둑과 얽힌 일화가 전한다.그리 많지 않은 개로왕에 관한 정보 중 바둑에 관한 내용이 공통으로 전해지는 것을 보면 그의 ‘바둑 사랑’은 유독 남달랐던 듯하다.하지만 그의 바둑 에피소드들은 긍정적이라기보다는 시종일관 부정적인 내용으로 그려진다. 왕과 평민의 ‘내기바둑’은 최고 권력자가 평민의 처를 빼앗는 수단이었다. 바둑에 빠져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던 그의 취미를 파고든 것은 적국 고구려의 스파이였다. 그렇게 바둑은 망국의 문을 여는 단초가 됐다.<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 9월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은 첩자로 승려 도림(道琳)을 점찍었다. 백제 개로왕(근개루(近蓋婁))이 ‘장기와 바둑’(博奕)을 두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노린 것이었다.바둑은 적극 권력의 최상층부에 침투하는 무기가 됐다. 도림은 대궐 문에 이르러 “신이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워 자못 신묘한 경지에 들었으니 바라건대 대왕의 곁에서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臣少而學碁, 頗入妙, 願有聞於左右)”라고 개로왕의 자존심을 건드렸다.왕이 불러들여 바둑을 두어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개로왕은 도림을 높여 상객(上客)으로 삼고 “매우 친하게 지내면서 서로 늦게 만난 것을 아쉬워했다(甚親昵之, 恨相見之晩)”고 전해진다.개로왕의 마음을 연 도림은 대규모 토목사업을 유도해 ‘나라의 창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지도록’해 고구려의 침공 길을 열었다고 전해
“코바, 왜 내가 죽기를 바라는 거지?” 1938년 니콜라이 부하린은 혁명 동지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냈다. 숙청돼 총살되기 직전 쓴 짧은 편지에는 스탈린의 옛 이름이자 수많은 가명 중 하나인 ‘코바’라고 부르며 원망 섞인 마음을 드러냈다. (조지아의 작가 알렉산드르 카즈베기의 소설 <부친살해>에 나오는 캅카스 지방 의적에서 이름을 딴 ‘오시프 코바’는 스탈린 본인은 물론 동료들도 자주 썼던 이름이다. 스탈린이라는 이름도 가명이다.) ‘대량학살자’ 또는 ‘20세기의 괴물’이라 불린 스탈린은 레닌이 “권력을 잡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쉽지만 통치하기는 가장 어려운 나라”라고 평했던 러시아를 30년 가까이 홀로 지배했다. 스탈린은 지하정치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잠입과 은폐, 배반은 스탈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특질이었다. 그는 러시아 사회 곳곳에서 음모가 횡행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을 때도 항상 “음모가 있지 않을까”하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는 쓸모가 있는 자들에겐 필요한 동안만큼은 후하게 베풀었고, 방해되는 자들은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고 책략으로 쓰러뜨렸다. 스탈린은 “무자비했고 기회주의적이었으며 전술적으로 유연했고, 사사로운 생존을 위해 비타협적으로 정치적 행보를 이어간”인물(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스탈린이 자란 환경은 척박했다. 그가 어린 시절 살았던 조지아의 고리 지역은 살벌한 정글 같은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도 스탈린은 가난하지만 강한 아이였다. “우리는 그가 무서워서 피했다”라는
고대 그리스, 특히 스파르타에서 공동생활은 의무였다. 스파르타 구성원들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공동생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스파르타의 용사들은 식사도 같이하고, 초라한 진흙 벽돌로 지은 집에서 잠도 같이 잤다. 거의 완벽한 ‘병영사회’가 스파르타 사회를 정의하는 특질이었다.스파르타의 남성 소년들은 20세까지 아고게(ἀγωγή)라는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했다. 20세부터 30세까지는 10년간 중앙 기숙사에서 공동으로 숙박을 같이했다. 또 20세 이후 40년간은 ‘페이디티아(φειδίτια)’라는 식사 공동체에서 집단생활을 했다. 스파르타의 의무 복무기간이 60세까지였던 만큼 자유로운 개인 생활은 평생 불가능한 일이었다.공동식사에서 예외는 없었다. 2명의 왕을 뒀던 스파르타 사회에서 왕들도 제사 의식 같은 특별한 사유가 없이는 공동식사에서 빠질 수 없었다.함께 식사하고, 함께 훈련받고, 함께 전투하는 이 공동체는 격렬한 운동으로 ‘시장이 반찬’이 아니면 먹기 힘들다는 악명 높은 ‘멜라스 초모스(μέλας ζωμός)’라는 ‘검은 국(죽)’으로 끼니를 때우며 공동체 의식을 키웠다. '검은 죽'의 악명은 대단해 지금도 서양 사회에선 '스파르타 수프(spartan soup)'는 볼품없고 맛없는 음식의 상징처럼 쓰이기도 한다.스파르타인들은 왜 이렇게 엄격한 공동체 생활을 강조했을까. 플루타르코스 등에 따르면 BC 7세기의 전설적 입법자 뤼쿠르고스는 부를 축적하고 사치를 누리는 것을 없애기 위해 사실상 화폐의 사용을 금지했다고 한다. 토지는 추
조선 왕조 500년간 유학을 숭상했지만, 조선의 식자층이 유교 발전에 기여한 성과는 초라하다. 세계 철학사나 동양 사상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할 만한 결과물을 찾기가 쉽지 않다. ‘상복을 몇 년간 입느냐’(예송논쟁),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냐 다르냐’(호락논쟁),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 중 누가 서열이 높으냐’(병호시비)와 같은 공허한 입씨름만 거듭했을 뿐이다. 뿌리 깊은 '줄 세우기'유교의 본토 중국에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는 양명학, 합리적 분석을 강조하는 고증학이 교차하며 근대적 사유가 싹을 틔우고, 변방 일본에서 오규 소라이(荻生徠)가 공맹(孔孟)의 가르침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때 조선에선 이미 수백 년 전 유행이 끝난 성리학에만 매몰됐다.사회 엘리트가 총력을 기울여 유학에 ‘올인’했던 조선에서 학습의 결실이 이처럼 초라한 이유는 무엇일까. ‘책 속에 천종의 봉록이 있다(書中自有千種祿)’(진종황제 ‘권학문’)는 문구에 충실하게 출세를 위한 수험 공부에만 집중한 탓이 클 것이다.그리고 이처럼 부실한 기초라는 부끄러운 실상은 허례허식에 대한 집착과 편 가르기, 줄 세우기로 가렸다. 노론, 소론, 벽파, 시파, 완론, 준론 식으로 집권층의 패거리는 세분돼 갔다. 이렇게 너와 나를 가르는 기준은 ‘근본 따지기’였다. 실력과 내용보다는 핏줄이 중요했고 부모가 누군지, 스승이 누군지, 자란 곳이 어디인지 따위가 우선시됐다.민망한 과거를 되짚어본 것은 요즘도 옛 치부가 오버랩되는 일을 곳곳에서 마주하기 때문이다. 수험생 시절부터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로 시작
“재단사, 대장장이, 목공, 석공 등 모든 기능공과 노동자는 왕의 재위 20년(1346~1347년) 혹은 그 언저리 시절 임금보다 더 받으면 안 된다. 만약 더 받는다면 투옥할 것이다.” 1349년 영국 에드워드3세 자문위원회는 ‘노동자 조례’를 작성해 근로자 임금을 흑사병 창궐 이전 수준으로 붙들어 매려 했다. 흑사병이 덮쳐 인구가 급감한 영향으로 임금이 치솟고 물가가 거침없이 뛴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상한선 이상 임금을 받는다면 구금형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엄혹한 법규만으로 임금 상승의 도도한 물결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상당수의 장원 기록부는 근로자들이 각종 ‘조례’와 ‘법령’이 규정한 것을 크게 웃도는 임금을 받았음을 증명한다. <중세 서유럽의 흑사병>은 국내 중세사 전문학자가 흑사병에 대해 종합적으로 정리한 학술서다. 어느덧 희미한 기억이 된 코로나19처럼 인류사에 큰 충격을 입혔지만, 여전히 실체가 불분명한 중세 대역병의 모습을 복합적으로 살펴본다. 페스트(페스티스)나 전염병(에피데미아), 죽을병(모르탈리타스) 등으로 불리던 역병에 ‘검은 죽음’이라는 뜻의 라틴어 ‘모르스 니그라’라는 이름을 붙인 이는 당대의 연대기작가 시몽 드 쿠뱅이었다. 화농성 농양 탓에 사타구니 등에서 ‘타는 듯한 고통’을 유발하는 증상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명칭이었다. 강렬한 병명만큼이나 전염병이 중세 유럽 사회에 미친 영향은 컸다. 당대의 문헌들은 1348년 여름 피렌체 인구의 4분의 3이 사망했고, 케임브리지셔 지역 인구의 80% 이상이 죽었다고 전한다. 과장을 고려해도 1347~1351년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대재난은 재앙을 불
단테 알리기에리가 묘사한 지옥 편에는 사기꾼이 득시글거린다. 생전 직업 기준으로는 성직자와 정치인이 지옥 거주민 중 가장 흔하지만, 죄목으로 분류하면 사기범의 수가 압도적이다. 아첨꾼, 허풍쟁이, 위선자, 도둑, 위조범 등의 형태로 주변인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던 ‘뱀의 영혼’들은 지옥의 똥물 속에서 끝없이 허우적댄다. “이 저주받은 영혼아! 이곳에 갇혀 영원토록 통곡하여라!”라는 단테의 외침은 사기 피해자의 절규가 담긴 듯 생생하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단테가 다룬 ‘지옥도’ 속 사기꾼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얼마 전에도 한 사기극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공짜' 권하는 사회 남현희 전 펜싱 국가대표가 재벌 3세를 사칭한 전청조 씨와 얽힌 사건은 소위 ‘막장 드라마’가 무색할 정도로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재벌 가문의 혼외자로 개인 은행 계좌 잔액만 51조원에 달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에 혹해 적잖은 이들이 지갑을 열었다. 여자를 남자라고 믿게 할 정도로 사람의 정신을 쏙 뺀 데에는 초호화 레지던스에 살면서 수억원짜리 고급 차량과 명품 가방을 척척 선물하는 전씨의 ‘경제력’이 큰 몫을 했다. 그 재력이라는 것이 갈취한 돈으로 세운 모래성이라는 것은 중요치 않았다. 하지만 허풍쟁이와 야바위꾼, 위조사범의 일인다역(一人多役)을 수행한 전씨의 ‘사기 캐릭터’만으로 황당극의 전말을 설명할 수는 없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거짓을 진실이라고 믿고 싶은 ‘피해자’들의 탐욕, 기만행위를 깨달았더라도 애써 현실에 눈감은 ‘공범’들의 허영이 황당극을 지탱한 또 다른 기둥이 아닐까 싶다. 전씨에게 돈을 맡기며 한배를 탔던 이들은
“스탈린이 만든 굴락(Gulag·강제수용소)이 아우슈비츠의 원형이었다.” 독일의 역사학자 에른스트 놀테는 일찍이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거울을 보고 마주한, 뒤집어 놓은 판박이로 봤다. 죽기 살기로 총력전을 치렀던 극우와 극좌세력은 외견상 모든 것이 대비되는 상극의 존재로 여겨졌지만, 실상은 서로를 모방하며 비슷한 ‘괴물’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때아닌 '역사 논쟁'놀테는 두 전체주의 체제의 상호 따라하기 양상을 600쪽이 넘는 라는 책에 상세히 담았다. 그에 따르면 소련의 수용소군도를 본 후에야 나치는 유대인을 강제수용소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유대인 절멸 정책의 뿌리에는 볼셰비키의 계급 학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체제 선전에 앞장선 양국의 기관지들은 마치 서로를 베낀 듯 비슷한 극단적 용어를 동원하며 상대방을 악마화했다. 40여 년 전 독일 역사학계에 큰 논쟁을 일으킨 놀테의 주장을 떠올린 것은 최근 한국 사회에서 이어지고 있는 역사 논쟁과 비슷한 점이 적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광주광역시의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추진과 육군사관학교의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움직임을 계기로 얼마 전부터 역사적 사실과 역사관을 둘러싼 논쟁이 거세졌다. 특히 홍 장군의 사례가 논란의 핵심이다. 6·25전쟁 당시 중공군 군가를 작곡하고 인민군 선무활동에 앞장선 이력 탓에 손쉽게 시비(是非)를 가를 수 있는 정율성과 달리 홍 장군의 행적은 보기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과 평가가 가능해서다. 주목되는 점은 최근의 역사 논쟁에선 공수가 교대됐다는 것. 야권을 비롯한 소위 진보 진영은 오랫동안 반대 진영에 ‘친일파’의 낙인을 찍어왔다. 그간 진보 진영은 복잡하게 뒤얽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 북한 핵과 관련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북핵에 대해 논하는 많은 이들이 구체적으로 북한의 핵이 어떤 특성을 지녔으며 어떤 경로로 개발됐는지를 도외시한다. 하지만 뭉뚱그려 핵무기 혹은 핵폭탄이라고 지칭하고 넘어갈 때 놓치는 문제는 과연 없을까. 은 베이징사범대, 베이징대, 중국과학원, 옌볜과학기술대 등에서 활동했던 사회주의권 과학기술 전문가인 저자가 북한의 핵 개발 과정과 현재의 기술 수준, 북한 정권이 추구하는 핵전략을 냉철한 과학의 객관적 언어로 분석한 책이다. 정치적 해석 위주의 북한 핵 담론장에 ‘기초부터 확인하라’고 일침을 놓는다. 북한의 핵은 오랜 개발 역사를 지녔다. 북한이 1990년대 이후 ‘벼락치기’로 핵 개발에 뛰어들었다는 일반의 선입견과는 거리가 멀다. 북한의 핵 연구 인력들은 1956년 모스크바에 설립된 연합핵연구소(JINR)에 참여해 일찍부터 관련 기술을 확보했다. 1960년대에 이미 300명 넘게 인력을 파견하며 200여 명의 중국을 능가했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비서는 “북한의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은 1980년대부터 시작됐고 1990년대 초반에 성공했다”고 못 박았다. 마침내 2006년엔 풍계리에서 최초의 지하핵실험을 강행하며 세계에 충격을 줬다. 주목할 점은 북한이 감행하는 핵실험은 정치적 의도보다는 핵무기의 기술적 성능을 검증하고 개선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는 사실이다. 북한의 3~5차 핵실험은 핵탄두 소형화와 표준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고, 4~6차 실험은 수소탄 개발과 연관됐다. 남북관계와 대미 전략은 북한에는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같은 맥락에서 북한이 7차 핵실험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저자는 예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 북한 핵과 관련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북핵에 대해 논하는 많은 이들이 구체적으로 북한의 핵이 어떤 특성을 지녔으며 어떤 경로로 개발됐는지를 도외시한다. 하지만 뭉뚱그려 핵무기 혹은 핵폭탄이라고 지칭하고 넘어갈 때 놓치는 문제는 과연 없을까. <북한의 핵패권>은 베이징사범대, 베이징대, 중국과학원, 옌벤과학기술대 등에서 활동했던 사회주의권 과학기술 전문가인 저자가 북한의 핵 개발 과정과 현재의 기술 수준, 북한 정권이 추구하는 핵전략을 냉철한 과학의 객관적 언어로 분석한 책이다. 정치적 해석 위주의 북한 핵 담론장에 ‘기초부터 확인하라’고 일침을 놓는다. 북한의 핵은 ‘족보’가 분명하다. 소련과 중국의 사회주의 과학개발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북한은 미국 등 서방과는 확연히 다른 핵기술 개발경로를 걸었다. 서구의 상식을 기준으로 삼았다간 핵 개발의 속도와 수준을 오판하기에 십상이다. 무엇보다 오랜 핵 개발 역사를 지녔다. 북한이 1990년대 이후 ‘벼락치기’로 핵 개발에 뛰어들었다는 일반의 선입견과는 거리가 멀다. 북한의 핵 연구 인력들은 1956년 모스크바에 설립된 연합핵연구소(JINR)에 참여해 일찍부터 관련 기술을 확보했다. 1960년대에 이미 300명 넘게 인력을 파견하며 200여명의 중국을 능가했다. 북한 핵 연구의 특징은 이론보다 응용에 집중했다는 것. 북한은 80% 이상의 인력이 핵 개발과 방사화학, 중성자물리 등 응용 분야에 주력했다.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뿐 아니라 영변 원자력단지에서 현장에 밀착된 교육을 받은 물리대학 출신 인력들은 곧바로 현장에 투입될 실무진으로 양성됐다. 북한의 핵 개발 속도
근원(根源)에 전쟁이 있었다. 현대 국가라면 무릇 갖춰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헌법, 그중에서도 성문헌법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을 마주하게 된다. “전쟁이 국가를 만들고 강화했다”는 역사사회학자 찰스 틸리의 유명한 명제는 성문헌법의 출현에도 큰 이질감 없이 적용된다. 은 저명 역사학자인 린다 콜리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성문헌법 출현의 역사를 되짚어본 책이다. 영국, 프랑스, 미국처럼 세계 헌법 역사와 관련해 큰 역할을 한 국가는 물론 18세기 이후 러시아, 아이티, 노르웨이, 튀니지, 베네수엘라, 인도, 하와이, 일본 등 다양한 나라의 헌법 제정사를 거침없이 다룬다. 헌법을 잉태하고 세상에 선보이는 자양분 역할을 한 것은 ‘총’으로 비유된 전쟁과 혁명 같은 폭력이었다. 대규모 재정이 투입되고, 육군과 해군을 아우르며,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공간으로 확장된 ‘하이브리드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유럽 제국들은 서둘러 성문헌법을 정비했다. 전에 없이 전쟁 규모가 커져 군비 부담과 징병 수요가 급증한 데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다. 대신 높은 세금과 징병을 수락한 대가로 남성은 선거권과 같은 권리를 확대해 나갔다. 성문헌법의 산모가 전쟁(총)이었다면 이를 전 세계로 확산하는 촉매 역할을 한 것은 ‘배’였다. 전 지구적 차원의 전쟁을 가능하게 한 대양해군 전함은 총탄뿐 아니라 민주주의와 혁명정신, 헌법에 대한 자각도 전파했다. 잇따라 성문헌법을 만든 프랑스와 미국의 움직임에 자극받은 유럽 변방과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 혹은 ‘정치체’들은 서둘러 저마다의 성문헌법을 갖췄다. 그리고 때마침 활
근원(根源)에 전쟁이 있었다. 현대 국가라면 무릇 갖춰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헌법, 그중에서도 성문헌법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을 마주하게 된다. “전쟁이 국가를 만들고 강화했다”는 역사사회학자 찰스 틸리의 유명한 명제는 성문헌법의 출현에도 큰 이질감 없이 적용된다. <총, 선, 펜>은 저명 역사학자인 린다 콜리 프린스턴대 교수가 성문헌법 출현의 역사를 되짚어본 책이다. 영국, 프랑스, 미국처럼 세계 헌법의 역사와 관련해 큰 역할을 했던 국가는 물론 18세기 이후의 러시아, 아이티, 노르웨이, 튀니지, 베네수엘라, 인도, 하와이, 일본 등 다양한 나라의 헌법 제정사를 거침없이 다룬다. 헌법을 잉태하고 세상에 선보이는 자양분 역할을 한 것은 ‘총’으로 비유된 전쟁과 혁명 같은 폭력이었다. 대규모 재정이 투입되고, 육군과 해군을 아우르며,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공간으로 확장된 ‘하이브리드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유럽 제국들은 서둘러 성문헌법을 정비했다. 전에 없이 전쟁 규모가 커지면서 군비 부담과 징병 수요가 급증한 데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다. 대신 높은 세금과 징병을 수락한 대가로 ‘남성’들은 선거권과 같은 권리를 확대해 나갔다. 성문헌법의 산모가 전쟁(총)이었다면, 이를 전 세계로 확산하는 촉매 역할을 한 것은 ‘배’였다. 전 지구적 차원의 전쟁을 가능케 한 대양해군의 전함은 총탄뿐 아니라 민주주의와 혁명정신, 헌법에 대한 자각도 전파했다. 잇따라 성문헌법을 갖춘 프랑스와 미국의 움직임에 자극받은 유럽 변방과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 혹은 ‘정치체’들은 서둘러 저마다의 성문헌법을
‘근대의 걸작’. 일본의 관료 출신 경제평론가 사카이야 다이치(堺屋太一)는 기업을 최상급 예술작품에 빗댔다. 산업혁명 이후 등장한 근대적 공업 생산에 최적화해 탄생한 조직이 기업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전근대 조직과 기업을 가르는 차이는 무엇일까. 사카이야가 주목한 것은 기업의 철저한 ‘비속인성(非屬人性)’이었다. 사람에게 얽매이지 않는 법인기업은 물자를 효율적으로 이용해 제품을 최대한 많이 생산하기 위해 탄생했다. 조직의 핵심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과 돈이었다. 그 자본을 중심으로 권리와 의무의 주체인 유사인격 ‘법인(法人)’이 성립했다. 기업은 ‘자본이 먼저다’라는 삭막해 보이는 특성을 발판으로 큰 도약을 이뤘다. 법인은 개인의 한계를 뛰어넘는 성과를 거뒀다. 개인이나 가족 단위로는 도저히 모을 수 없는 대규모 자금을 운용하고 대형 설비를 돌렸다. 무엇보다 개인의 굴레를 벗어남으로써 법인은 ‘영생’을 얻었다. 근대 기업에선 경영자가 바뀌어도 회사는 변함없이 존속할 수 있었다. 경영자 개인의 노화나 죽음은 기업 경영과 별개의 문제가 됐다. 토머스 에디슨이나 잭 웰치 없이도 제너럴일렉트릭(GE)은 100년을 훌쩍 넘겨 유지됐다. 스티브 잡스 사후에도 애플은 굳건하다. 헨리 포드와 포드의 관계처럼, 일론 머스크와 테슬라가 동일시되지 않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렇게 기업은 사람이 바뀌어도 조직은 변하지 않는, 영속적인 존재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법인과 개인의 분리라는 기업의 근대적 속성을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곳곳에서 자주 접한다. 기업의 경영 승계와 관련해 “부의 대물림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지난달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주한중국대사관저를 찾은 자리에서 “대한민국은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싱하이밍 주한중국대사의 ‘중국이 패배하는 쪽에 베팅하면 한국은 후회할 것’이라는 폭언에 묻혔지만, 국제 외교 무대에선 싱하이밍의 무례보다 이 대표의 발언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 정부는 단 한순간도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원칙'과 '정책'은 천지 차이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지한다는 것은 좁게 해석하면 정치적 실체로서 대만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부인한다는 것이고, 넓게 바라보면 신장위구르와 티베트, 홍콩 등지에서 불거지는 인권 탄압을 묵인하겠다는 얘기와 다름없다. 일제 식민 지배의 아픔을 겪은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자유와 인권 보장, 평화로운 교류와 협력 확대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중시하는 민주사회의 일원이라면 섣불리 뱉을 수 없는 말이다. 한국 정부는 중국이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밝혀왔을 뿐이다. 한국이 발신하는 외교 수사에는 줄곧 ‘원칙’이 빠진 ‘하나의 중국’이라는 문구만 거론됐다. 한·중 수교 공동성명에서 “오직 하나의 중국만이 있고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중국의 입장을 존중한다”고 명시된 게 대표적이다. 최영삼 외교부 차관보도 최근 중국을 방문해 “한국의 ‘하나의 중국’ 존중 입장은 1992년 수교 이후 변함없이 견지돼 왔다”고 확인했다. 한국 정부는 ‘하나의 중국’과 관련해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왔다. 이런 모호성은 미국, 일본과 유럽 주요국 등 서
나치 치하 독일에서 언어의 변용(變容)에 주목했던 문헌학자 빅토르 클렘퍼러는 그 실상을 주저 에 상세히 담았다. 이 책은 제목부터 독일어가 아니라 같은 뜻의 라틴어 약어 ‘LTI(링구아 테르티 임페리)’로 표기됐다. 메시지를 알아볼 이들만 찾아보라는 듯 은어(隱語) 같은 서명을 택한 것이다. 거짓말이 바꾼 진실‘무의식중에 들이켜는 독’에 비견된 왜곡된 명칭의 위험함은 책 곳곳에 상세히 담겼다.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강제 합병한 뒤 독일 내 전 언론은 그해 크리스마스를 ‘대독일의 크리스마스’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유대 볼셰비즘’이란 표현처럼 부정적인 내용에는 습관적으로 ‘유대인의’라는 형용사가 따라붙었다. 유대인 학살은 ‘최종적인 문제 해결’로, 강제수용소행은 ‘대피’로 바뀌었다. 독재자 히틀러는 독일의 신성함을 상징하는 ‘새로운 그리스도’로 격상됐다. 그의 말은 ‘시’가 됐고 ‘철학’으로 대우받았다. 소위 ‘믿음의 언어’는 참혹한 실상을 직시하는 눈을 가렸다. 갖은 말장난을 서슴지 않던 나치의 광기는 과연 먼 나라에서 벌어졌던 옛날얘기에 불과할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내용을 알기 어렵게, 두껍게 분칠한 용어들이 본질을 가리는 경우를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접한다. 야권에서 노란봉투법이라고 부르는 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이 법안은 불법파업에 대한 사측의 대항 수단인 손배가압류 청구를 제한하고, 정치사회 이슈까지 파업 대상에 포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노동계가 수시로 파업을 강행할 길을 활짝 열어젖힌 셈이다. 재산권 침해를 방조해 위헌 논란마저 빚어진 이 법안을 ‘파업 조장법’이라고 부르
“꿀이 가득 든 플라톤의 머리에 빠져 거기서 감미롭게 죽어간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허먼 멜빌의 소설 의 주인공 이슈메일은 향유고래 머리에서 작업하던 동료가 기름이 가득 찬 고래 두개골에 빠져 죽을 뻔한 장면에서 뜬금없이 플라톤을 떠올린다. 중대재해가 발생한 현장에서 작가가 고대 철학자를 소환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상점 심부름꾼으로 시작해 농장 일과 뱃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현장’ 출신. 자연스레 비현실적인 관념의 늪에서 허우적대다 파국으로 끝난 여러 경험이 생각났을 것이다. 그런 답답한 현실이 반복되지 말라고 문학적 일침을 놓았던 것은 아닐까. '관념 과잉'과 '목표 상실'만 있나소설 속 한 구절처럼 지난 정권에선 감미로운 목적을 앞세운, 현실과 유리된 관념적 정책이 쏟아진 탓에 수많은 이가 고통받았다. 마차를 말 앞에 놓았다는 소득주도 성장론, 다주택자를 투기꾼으로 몰다 집값만 다락같이 올린 부동산정책, ‘큰 봉우리’라며 중국을 섬기고 ‘공상 속 친일파’와 싸우다가 파탄이 난 외교정책, ‘친환경 에너지’라는 이상만 좇다 산업 근간을 훼손한 탈원전 정책까지 허공만 바라보다 국민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패착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정반대 고민이 생겼다. 과거에는 관념의 일방통행이 문제였다면, 현 정부는 ‘철학 부재’나 ‘목표 상실’이라고 지적받을 정도로 지향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가장 먼저 대두되는 문제는 ‘무엇을 하겠다’는 게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다 돼가지만, 여전히 국정의 청사진은 제시된 게 없다. 경제정책만 해도 관련 부처 차원의 모토조차 없다. ‘지역 균형발전’(노무현
변변찮은 실력이 드러나는 것만큼 민망한 일도 없다. 보잘것없는 밑천은 종종 인생의 ‘종합 계산서’로 마지막 순간에, 속속들이 만인에게 공개된다. 저서 한 권 없는 교수, 내세울 만한 실적이 없음에도 “나 때는 말이야”만 반복하는 전직 임원, 마지막 순간에 총구를 돌려 자결에 실패한 패장(敗將)처럼…. 얼마 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회에서 한국 야구의 참담한 실상이 폭로된 것도 비슷한 사례다.지난주 막을 내린 WBC 대회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는 투수진, 기초적인 주루플레이 실수를 연발하는 주자를 보며 실력과 기본기의 중요성을 많은 이가 뼈저리게 떠올렸다. '실력'만이 결과 보장비록 결과가 더디게 나올 수는 있어도, 기본기를 다진 노력은 끝내 결실을 본다는 점도 보여줬다. 고교 야구팀 3940개, 등록 야구선수 15만 명에 달하는 탄탄한 저변과 메이저리그 스타조차 수도승처럼 야구에만 매진한 노력을 발판으로 오랜 기간 기초부터 탄탄히 다졌던 일본은 전승 우승을 거뒀다.반면 한 수 아래라던 호주한테 덜미를 잡히고, 일본에 9점 차로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으며 3회 연속 본선 1라운드 탈락한 한국 야구팀은 ‘겉멋’에 취해 ‘거품’ 속만 헤맸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경우의 수를 꼽으며 ‘한 방’에 판을 뒤집을 요행을 바라는 것은 다 실력이 없어서다. 그런데 실속 없는 과대평가가 만연한 것이 과연 야구뿐일까. 기약 없이 노력을 반복하는 인내, 성실하게 벽돌을 한 장씩 쌓아가는 축적의 과정 없이 그럴싸한 과실만 손쉽게 취하려는 행태를 주변에서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MZ세대(밀레니얼
판소리 고전 <심청가>는 무척 불편한 작품이다. 효(孝)라는 유교 덕목에 대한 찬미로 덕지덕지 치장했지만 ‘자식 팔아먹고 살던’ 시대의 처참한 민낯을 감출 수 없어서다. 심봉사는 ‘당년 십오세’ 심청이를 넘긴 값으로 공양미 삼백 석 외에도 평생 먹고 입을 재산을 챙겼다. 전곡간(錢穀間)이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온 뺑파는 밥 잘 먹고, 떡 잘 먹고, 고기 잘 먹고, 술 사 먹고, 쌀 퍼주면서 그 많은 재산을 탕진했다.전근대 한국 사회는 심하게 말하면 ‘후손을 잡아먹는’ 체제였다. 외부와의 교류가 막힌, 무기력과 적당주의가 지배하는 폐쇄적 농촌사회가 확산하면서 힘없는 후대의 피를 빠는 경제적 카니발리즘이 반복됐다. 오늘날 국민 대다수가 양반의 자손을 칭하는 것은 선산과 제사로 상징되는 조상을 앞세워 후손을 ‘뜯어먹던’ 세태에 대응했던 과거 행태들이 남긴 집합적 흔적이다. 되돌아온 '노인 지배'근대화와 경제 발전으로 사라졌다고 여겼던 후속 세대에 대한 소위 ‘사회적 착취’가 부활하는 듯한 모습이다. 수명 연장과 출산 감소로 고령화가 빨라지고 경제 성장 둔화가 겹치면서 벌어진 일이다.세대 갈등은 눈앞의 문제가 됐다. 추계할 때마다 고갈 시기가 앞당겨지는 국민연금은 세대 간 대립의 심각성을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다.한 해 100만 명씩 포진한 1차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 출생)와 2차 세대(1968~1974년 출생)가 줄줄이 연급 수급자로 전환된다는 현실은 한 해 50만 명 안팎에 불과한 2030세대에겐 해결 불가능한 공포다. ‘더 내고 더 받는’ 미봉책으로도, ‘더 내고 덜 받는’ 정공법으로도 국민연금의 존속에 대
바닥에 드러누워선 보이지도 않는 난간의 뒷부분을 닦고 있었다. 지켜보는 이가 없어도 아파트 청소를 담당하는 관리인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맡은 일에 충실했다. 지하철 역사에선 열차가 드나들 때마다 누가 보건 말건 역무원은 허공에 수신호를 반복하며 안전을 챙겼다. 도쿄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당시, 일본인의 특성을 규정짓는 단어로 ‘책임’을 자주 떠올리곤 했다.‘세키닌(책임)’이란 단어의 무게는 일본 사회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때론 그 중압감이 지나쳐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무의미한 회의를 반복하는 게 일본 사회의 그늘이라는 지적까지 나온다. 일본어 사전에는 ‘책임을 지다’라는 뜻으로 ‘배를 가르다(腹を切る)’라는 무시무시한 표현이 등재돼 있을 정도다. 보기 힘든 '책임의 무게'비록 요즘엔 ‘한물간 나라’ 취급받곤 하지만 여전히 일본이 국제 경쟁력을 유지하고, 각종 안전사고 없이 빈틈없이 굴러가는 데는 일본인 특유의 책임감이 단단한 기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연말 대청소’로 분주하던 평범한 일본인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충실하게 책임을 수행하던 모습을 본 강렬한 기억은 지난 연말 무책임으로 점철된 한국 사회 리더들의 행태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권리만 누리고 책임은 지지 않는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국회는 정쟁에 매몰된 끝에 반도체 등 국가 첨단산업 설비투자 세액공제율을 미국, 대만 등 경쟁국에 비해 크게 뒤처지게 했다. ‘8시간 추가 연장 근로제’ 일몰을 방기하면서 수많은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를 사지로 몰았다. 이태원 대규모 압사
1958~1961년 시행된 대약진운동 기간 중국에서는 최대 3800만 명이 기아와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었다. 이를 두고 존 킹 페어뱅크 하버드대 교수는 “인류가 경험한 대재앙 중 하나”라고 잘라 말했다.대약진운동은 1957년 말 중국 인구가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보다 네 배나 많았지만 중국인의 생활수준이 소련인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던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추진됐다. 스탈린의 경제정책을 모방해 농업의 집단화와 산업화를 위한 5개년 계획이 마련됐다. 이를 통해 중국이 소련보다 더 빨리 후진성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소련의 계획을 참조했지만 중국 전통적인 방법으로 ‘공산화’를 이뤄 소련의 이데올로기적 지도력에 도전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마오쩌둥 자신도 농촌의 노동력을 대규모로 조직화해 농촌을 변화시키고 농업 생산을 증대할 수 있다는 ‘환상적’인 자기 확신에 빠졌다. 15년 안에 철강 등 주요 공업 생산량에서 영국을 앞지른다는 목표치도 구체화했다.결국 1958년 전 중국땅이 ‘쉬지 않고 일하는’ 노동력으로 가득 차게 됐다. 새로운 도로와 공장, 도시, 수로, 댐, 호수, 조림과 개간 등에 전국적으로 6억5000만 명의 중국 인민이 동원됐다. ‘대중적인 기술혁명’과 대규모 수리건설에 따른 농업과 공업의 대약진을 부르짖은 것이다. 손에 붉은색 표지의 ‘마오 주석 어록선’을 든 농민들은 “태양과 달에는 지금 떠 있는 위치가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쳐야 하며 인류를 위한 새로운 하늘과 대지를 창조해야 한다”고 외쳤다.서구 사회에서 대약진운동의 성과(?)로 가장 눈에 띈 것은 철강생산운동이었다. 1958년 7월부터 중국 각
일본 혹은 일본인이라고 하면 보통 철저한 준비와 분석 등이 연상된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전쟁을 수행할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큰일’을 저질렀다. 전쟁 상대마저도 자신들이 석유, 철강, 중기 등 필수전쟁 수행 물자 수입을 가장 크게 의존했던 미국을 선택하는 우를 범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인력과 물자는 계속 모자랐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무리수는 또 다른 무리수를 불렀다.태평양 전쟁 개시 전 일본군은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을 소위 ‘대동아공영권’으로 한데 묶고자 했다. 이는 1920년대 말 육군 장교들이 구상했던 대규모 자급자족적 경제연합체 수립계획에서 나온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1942년 11월 대동아(大東亞)를 창설해 점령지역 정부와 원활하게 협상하고자 했다. 하지만 실상은 현지의 일본군이 장악해버렸다. 1943년 일본 천황이 주재한 어전회의에서 결정된 ‘대동아지도대망’이란 계획은 “말레이,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 셀베스(뉴기니)를 대일본제국의 영토로 만들어 중요 자원의 공급원으로 개발한다”고 명시했다.일본은 점령지역 인력을 강제노역에 동원하는 형태로 전시 경제를 운영했다. 일본군은 또 점령지에서 군사 활동을 위한 물자 조달 원칙으로 ‘현지 조달주의’를 택했다. 석유, 주석, 고무 등과 같은 주요 군수 물자를 얻기 위한, 사실상의 자원 수탈에 집중한 것이다. 이는 점령지에서 식량 공출과 약탈로 이어졌다. 식량을 빼앗긴 현지 주민들은 심각한 식량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북부 베트남에선 일본군의 강제 식량 징발로 1944년 말에서 1945년까지 100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다.이 같은 현지 조달주의 원
케인스(사진)의 유명한 <일반이론>은 이해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재미없는 책이다. 책의 원제목 역시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으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든 장황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이렇게 따분하고, 웬만해선 책꽂이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성격의 책이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책장을 넘기다 보면 한순간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한 느낌이 드는 구절을 만날 수 있다. 바로 그 유명한 ‘유효수요’ 창출과 관련된 구절로, 신기하게도 케인스는 이 부분에선 화폐나 이자율 같은 각종 금융 관련 얘기나 수학공식이 아니라 마치 고대의 예언가가 된 듯 문학작품이 연상되는 표현을 구사하고 있다. 케인스의 표현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어불성설의 결론으로부터 빠져나오고자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낭비적인 형태보다도 오히려 완전히 낭비적인 개입 지출의 형태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금광으로 알려진 땅 한가운데 구멍을 파는 형태는 그것이 세계의 실질적인 부에 대해선 아무것도 보탬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오직 노동의 비효용을 가져올 뿐인데도 모든 해결책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이다.만약 재무성이 낡은 몇 개의 케이스에 은행권을 채워서 그것을 폐광된 탄광에 적당한 깊이로 묻고, 그 다음에 탄광을 도시의 쓰레기로 지면까지 채워놓은 뒤 자유방임의 원리에 입각해 개인 기업이 다시 파내게 한다면 더 이상 실업이 존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 그 반작용에 의해 사회의 실질소득이, 또 나아가선 그 자본적 부도 또한 현재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크게 될 것이다.물론 가옥 또는 그와 비슷한 것을 건조하는 것
‘로마제국이 멸망한 원인은?’과 같은 질문에 답하기 힘든 것은 아마도 인류사를 뒤흔든 대사건의 원인을 한두 가지로 꼽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1929년 세계 경제대공황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도 학자들의 설명이 엇갈린다.경기불황이 그처럼 광범위하고 장기적이었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학자들은 실물 요인 때문인지 아니면 화폐 요인 때문인지를 놓고 대립했다. 기원이 미국에 있는지 유럽에 있는지를 놓고도 논박을 거듭했다. 1920년대 기술 발전에 따른 대량생산 체제 도입과 대규모 실업 간 상관관계에 대한 의견도 엇갈렸다. 글로벌 경제가 동시에 대혼돈에 빠지게 된 치명적 약점이 국제자본주의 시스템의 본질에 있는지, 단순히 운영상 실수였는지를 놓고도 의견이 갈렸다.대공황의 원인을 짚은 경제학자들의 면면만 봐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급 거장들의 집합소라 할 만하다. 미국 금융정책 원인설(밀턴 프리드먼), 금본위제 오용설(라이어널 로빈스), 디플레이션 실책설(존 메이너드 케인스), 장기 정체설(앨빈 한센), 구조적 불균형설(잉바르 스베닐손) 등 ‘한가락’ 한다는 경제학자들은 한마디씩 경제대공황의 원인에 대한 설명을 내놓은 것이다.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설명은 찰스 P 킨들버거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의 주장이다. 킨들버거 교수는 경제대공황 발생 당시 글로벌 지도력 부재를 주요 요인으로 꼽았다. 그는 1929년 불황이 그처럼 광범위하고 심각하며 장기적이었던 이유로 국제경제 시스템이 불안정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불안정의 배경에는 글로벌 정치 리더십의 상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국제경제 시스템을 안정시킬 책무와 관련해 영
역사적으로 독일은 돈이 휴지 조각이 돼버리는 것을 경험한 나라다. 그 여파로 유럽 재정위기가 몇 년째 계속되지만 독일은 여전히 물가 상승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돈 풀기를 거부하고 있기도 하다.제1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 마르크화 가치는 영국 파운드나 프랑스 프랑, 이탈리아 리라화에 비해 매우 안정돼 있었다. 하지만 패전으로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패전에 따른 전쟁배상금 지급을 위해 대규모 재정적자가 불가피했고, 정부가 세금을 크게 올릴 것이라는 예상으로 민간자본의 해외 도피가 발생하면서 화폐가치 안정성이 크게 떨어졌다.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1파운드는 20마르크 선에서 교환됐지만 1918년 12월 파운드당 43마르크로 화폐가치가 추락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체결 이후엔 파운드당 60마르크가 됐고, 그해 겨울엔 파운드당 185마르크까지 폭락했다. 이어 1923년 파운드나 프랑, 리라와 마르크화를 교환하기 위해선 외국 통화당 무려 1조 마르크가 필요했다. 전국의 133개 인쇄소에서 1783기의 인쇄기가 밤낮으로 돈을 찍어댔지만 필요한 물건을 사기에 돈은 언제나 모자랐다.당시 달러 대비로 마르크화 가치 추이를 복기하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바이마르공화국의 화폐인 파피어마르크가 종이(파피어)라는 이름처럼 휴지 조각이 돼갔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제1차 세계대전 이전 달러당 4.2마르크였던 마르크화 가치는 전쟁 이후 달러당 8.9마르크로 떨어졌고, 1920년 달러당 14마르크가 됐다. 불과 1년 뒤에는 달러당 64.8마르크로 하락한 뒤 1922년엔 달러당 191.8마르크로 추락했다. 1923년에는 ‘천문학’에서 쓰일 법한 단위들이 동원된다. 1923년 1월 7260마르크에서 4월 2만 마르
1920년대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대중 잡지인 ‘별건곤’은 1929년 1월호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했다.“경성우편국을 끼고 돌아서면 요지경 같은 진고개다. 하라다 상점에 들어서니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그래도 놀라지 말라. 반수 이상이 조선남녀다. ( … ) 미스코시에 들어가니 아래층은 음식과 과자를 팔고, 이 층으로 가니 거기는 일본 옷감뿐이더라. 삼 층에 가니까 장난감, 학용품, 아동복, 치마감이 있다. 길거리에 나서니 진고개 2정목, 3정목 입을 벌리고 정신 다 빠져서 헤엄치듯 걸어나는 조선 부인들….”1920~1930년대 당시 경성의 번화가인 혼마치(서울 명동 근처)에선 거리를 구경 다니는 혼부라(혼마치와 어슬렁거리다의 합성어)가 득시글거렸다. 백화점 구경을 즐기는 주 고객인 여성과 학생에 대한 당대 언론인들의 시각은 그리 따뜻하지 않았다.‘별건곤’은 “조지야 하라다 상점 같은 큰 상점에는 언제나 조선 여학생, 신식 부인들로 꼭꼭 차서 불경기의 바람이 어디서 부느냐 하는 듯한 성황”이라며 “그곳들이 특별히 값이 싸서 그런 게 아니라면 무엇에 끌려서 그러는지 알 수 없다”고 한탄했다. “미스코시, 오복점(기모노점)이 또 낙성되었으니 제일 기뻐할 이는 조선 여학생일 것 같다”며 “어쨌든지 훌륭한 상점에서 물건을 사야만 자기 코가 높아지는 듯한 선입견을 가진 것이 신식 여자인가보다”라는 비꼼과 함께.당시 ‘모던 걸’(물론 ‘모던 보이’도)은 사회에서 매우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1920년대 이후 조선인들이 혼마치 상가의 구매자로 등장하면서 이들에 대한 당대인의 묘사와 평가도 늘어난다.이들
‘××시 1가(街) 23번지’나 ‘××로(路) 456’과 같은 숫자를 반영한 주소 체계(house numbering)는 유럽 절대왕정 시대에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거주민의 편의를 위한 것도, 여행자를 배려한 조치도 아니었다. ‘감나무집’으로 불러서는 세금을 걷고, 병역 자원을 징집하는 데 한계가 분명했기에 시행된 것이었다. 1737년 프로이센 정부가 병역 자원을 손쉽게 충원하기 위해 조그만 마을의 민가에까지 숫자를 부여한 이후 유럽 전역으로 이 같은 풍조가 확산했다.기계 같은 행정의 '그늘' 가옥에 번지를 매기는 것과 함께 깊이 뿌리내린 것은 관료제였다. 국민은 그저 효율적으로 관리할 대상일 뿐이었다. “모든 시민은 국가라는 기계의 부품이고 톱니바퀴”라는 당대의 풍조를 두고 ‘기계로서 국가(Der Staat als Maschine)’라는 비유까지 나왔다.‘기계’는 효율적이지만 부작용도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어떤 정책이 왜 나왔고, 왜 시행돼야 하는지 ‘목적’을 살피는 게 불가능했다. 정책의 대상이 정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개별 사정에도 눈을 감았다.그저 주어진 명령을 효율적으로 집행하는 데 매몰됐다. ‘관료주의 행정’ 그 자체가 지향점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얼마 전 KAIST 등 4대 과학기술원을 교육부 산하로 옮기려던 기획재정부의 시도가 해프닝으로 마무리됐다. 이 역시 ‘주객이 전도된’ 관료주의의 문제점이 드러난 사례라고 생각한다.기재부는 40년간 유지된 제도와 관행, 관련법을 무시하고 당사자인 4대 과기원과 주무 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건너뛰면서까지 2~3주 안
1920년대 미국 경제는 장밋빛이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시체제로 운영되던 경제가 정상화되면서 내수 소비가 급증했다. 1920년대 미국 공업생산은 약 90% 증가했다. 소비자의 구매력이 커지면서 자동차와 가전제품 같은 내구 소비재 소비가 늘었다. 인구는 꾸준히 늘어난 반면 물가는 안정됐다.1920년대에 사치품이었던 자동차는 범용제품이 됐다. 1914년 자동차 생산은 126만 대 수준이었지만 1929년이 되자 미국 자동차 업체들은 560만 대를 생산해냈다. 1927년 포드자동차의 히트 모델 ‘모델T’는 1500만 대나 판매된 뒤 단종됐다. 1918년 30만 대의 자동차가 등록됐던 캐나다에선 1929년까지 190만 대의 자동차가 보급됐다. 자동차산업은 철강, 고속도로, 모텔, 중고차 시장 등 다양한 2차시장을 창출했다. 정유, 유리, 철강, 고무산업은 덩달아 발전했다. 1925~1929년 미국의 제조업체 수는 18만3877개에서 20만6663개로 늘었다. 이들 업체의 생산액은 약 600억 달러에서 700억 달러로 커졌다.이 시기 라디오도 보급됐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라디오를 가진 가정은 흔치 않았지만 1929년에는 미국 내에서 1000만 가구 이상이 라디오를 보유했다. 유성영화는 무성영화를 대체했다. 화학산업도 정점을 이뤘다. 대형 백화점들은 지점을 계속 늘렸고, 통신판매 같은 새로운 유통 방법이 개발됐다. 개인 소득 증가에 따라 당시 하이테크 전자산업이던 냉장고와 세탁기 등 전자제품 소비도 급증했다. 백화점의 고가품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월가는 1923년 발생한 순간적인 조정기를 빼곤 1922~1929년까지 초호황을 누렸다. 1차 세계대전 기간 전비 마련을 위해 공모한 ‘자유채권’에 참여해 짭짤한 재미를 봤던 투자
‘한민족은 역사 이래 흰옷을 즐겨 입었다’는 백의민족 신화는 어느 정도 진실일까. 오늘날 많은 한국인은 한민족이 흰옷을 숭상하고, 즐겨 입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정말로 흰옷을 좋아하고 흰옷만 고집했는지를 냉정히 따져본 적은 거의 없다.최공호 박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백의민족에 대한 관념은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을 포함한 일제 강점기의 여러 학자에 의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백의민족’ 개념이 부각된 것은 당시 야나기 무네요시가 한국 미술에 대해 ‘색채 결핍론’과 ‘비애미’를 들고나온 데 대한 반론의 성격도 적지 않았다.하지만 정말로 흰옷 착용이 한민족을 다른 민족과 구별하는 특질이었을까.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한국인이 흰옷을 즐겨 입었다”는 기록은 삼국시대 이후 빈번하게 발견된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부여’에 “부여인은 흰색 옷을 숭상해 흰옷에 소매가 넓은 포와 바지를 입는다”는 기록이 있다. <수서(隋書)>에는 “신라의 복색은 흰색”이라는 묘사가 나온다. 이후 1487년 조선에 명나라 사신으로 온 동월의 저술인 조선부에 이르기까지 흰옷은 외국인의 시선에 한민족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포착됐다.이 같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이 백색 패션을 선호해서 의도적으로 추구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우선 고구려 고분벽화 등 현재까지 전하는 전근대 시기 시각자료에선 흰옷에 대한 숭상을 확인하기 어렵다.더 주목할 만한 것은 조선시대의 적지 않은 문헌에서 “한민족이 흰옷을 피하려고 했다”는 기록을 전하는 점이다. 19세기 충청 지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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