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혹은 일본인이라고 하면 보통 철저한 준비와 분석 등이 연상된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전쟁을 수행할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큰일’을 저질렀다. 전쟁 상대마저도 자신들이 석유, 철강, 중기 등 필수전쟁 수행 물자 수입을 가장 크게 의존했던 미국을 선택하는 우를 범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인력과 물자는 계속 모자랐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무리수는 또 다른 무리수를 불렀다.태평양 전쟁 개시 전 일본군은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을 소위 ‘대동아공영권’으로 한데 묶고자 했다. 이는 1920년대 말 육군 장교들이 구상했던 대규모 자급자족적 경제연합체 수립계획에서 나온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1942년 11월 대동아(大東亞)를 창설해 점령지역 정부와 원활하게 협상하고자 했다. 하지만 실상은 현지의 일본군이 장악해버렸다. 1943년 일본 천황이 주재한 어전회의에서 결정된 ‘대동아지도대망’이란 계획은 “말레이,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 셀베스(뉴기니)를 대일본제국의 영토로 만들어 중요 자원의 공급원으로 개발한다”고 명시했다.일본은 점령지역 인력을 강제노역에 동원하는 형태로 전시 경제를 운영했다. 일본군은 또 점령지에서 군사 활동을 위한 물자 조달 원칙으로 ‘현지 조달주의’를 택했다. 석유, 주석, 고무 등과 같은 주요 군수 물자를 얻기 위한, 사실상의 자원 수탈에 집중한 것이다. 이는 점령지에서 식량 공출과 약탈로 이어졌다. 식량을 빼앗긴 현지 주민들은 심각한 식량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북부 베트남에선 일본군의 강제 식량 징발로 1944년 말에서 1945년까지 100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다.이 같은 현지 조달주의 원
케인스(사진)의 유명한 <일반이론>은 이해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재미없는 책이다. 책의 원제목 역시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으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든 장황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이렇게 따분하고, 웬만해선 책꽂이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성격의 책이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책장을 넘기다 보면 한순간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한 느낌이 드는 구절을 만날 수 있다. 바로 그 유명한 ‘유효수요’ 창출과 관련된 구절로, 신기하게도 케인스는 이 부분에선 화폐나 이자율 같은 각종 금융 관련 얘기나 수학공식이 아니라 마치 고대의 예언가가 된 듯 문학작품이 연상되는 표현을 구사하고 있다. 케인스의 표현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어불성설의 결론으로부터 빠져나오고자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낭비적인 형태보다도 오히려 완전히 낭비적인 개입 지출의 형태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금광으로 알려진 땅 한가운데 구멍을 파는 형태는 그것이 세계의 실질적인 부에 대해선 아무것도 보탬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오직 노동의 비효용을 가져올 뿐인데도 모든 해결책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이다.만약 재무성이 낡은 몇 개의 케이스에 은행권을 채워서 그것을 폐광된 탄광에 적당한 깊이로 묻고, 그 다음에 탄광을 도시의 쓰레기로 지면까지 채워놓은 뒤 자유방임의 원리에 입각해 개인 기업이 다시 파내게 한다면 더 이상 실업이 존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 그 반작용에 의해 사회의 실질소득이, 또 나아가선 그 자본적 부도 또한 현재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크게 될 것이다.물론 가옥 또는 그와 비슷한 것을 건조하는 것
‘로마제국이 멸망한 원인은?’과 같은 질문에 답하기 힘든 것은 아마도 인류사를 뒤흔든 대사건의 원인을 한두 가지로 꼽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1929년 세계 경제대공황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도 학자들의 설명이 엇갈린다.경기불황이 그처럼 광범위하고 장기적이었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학자들은 실물 요인 때문인지 아니면 화폐 요인 때문인지를 놓고 대립했다. 기원이 미국에 있는지 유럽에 있는지를 놓고도 논박을 거듭했다. 1920년대 기술 발전에 따른 대량생산 체제 도입과 대규모 실업 간 상관관계에 대한 의견도 엇갈렸다. 글로벌 경제가 동시에 대혼돈에 빠지게 된 치명적 약점이 국제자본주의 시스템의 본질에 있는지, 단순히 운영상 실수였는지를 놓고도 의견이 갈렸다.대공황의 원인을 짚은 경제학자들의 면면만 봐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급 거장들의 집합소라 할 만하다. 미국 금융정책 원인설(밀턴 프리드먼), 금본위제 오용설(라이어널 로빈스), 디플레이션 실책설(존 메이너드 케인스), 장기 정체설(앨빈 한센), 구조적 불균형설(잉바르 스베닐손) 등 ‘한가락’ 한다는 경제학자들은 한마디씩 경제대공황의 원인에 대한 설명을 내놓은 것이다.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설명은 찰스 P 킨들버거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의 주장이다. 킨들버거 교수는 경제대공황 발생 당시 글로벌 지도력 부재를 주요 요인으로 꼽았다. 그는 1929년 불황이 그처럼 광범위하고 심각하며 장기적이었던 이유로 국제경제 시스템이 불안정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불안정의 배경에는 글로벌 정치 리더십의 상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국제경제 시스템을 안정시킬 책무와 관련해 영
역사적으로 독일은 돈이 휴지 조각이 돼버리는 것을 경험한 나라다. 그 여파로 유럽 재정위기가 몇 년째 계속되지만 독일은 여전히 물가 상승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돈 풀기를 거부하고 있기도 하다.제1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 마르크화 가치는 영국 파운드나 프랑스 프랑, 이탈리아 리라화에 비해 매우 안정돼 있었다. 하지만 패전으로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패전에 따른 전쟁배상금 지급을 위해 대규모 재정적자가 불가피했고, 정부가 세금을 크게 올릴 것이라는 예상으로 민간자본의 해외 도피가 발생하면서 화폐가치 안정성이 크게 떨어졌다.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1파운드는 20마르크 선에서 교환됐지만 1918년 12월 파운드당 43마르크로 화폐가치가 추락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체결 이후엔 파운드당 60마르크가 됐고, 그해 겨울엔 파운드당 185마르크까지 폭락했다. 이어 1923년 파운드나 프랑, 리라와 마르크화를 교환하기 위해선 외국 통화당 무려 1조 마르크가 필요했다. 전국의 133개 인쇄소에서 1783기의 인쇄기가 밤낮으로 돈을 찍어댔지만 필요한 물건을 사기에 돈은 언제나 모자랐다.당시 달러 대비로 마르크화 가치 추이를 복기하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바이마르공화국의 화폐인 파피어마르크가 종이(파피어)라는 이름처럼 휴지 조각이 돼갔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제1차 세계대전 이전 달러당 4.2마르크였던 마르크화 가치는 전쟁 이후 달러당 8.9마르크로 떨어졌고, 1920년 달러당 14마르크가 됐다. 불과 1년 뒤에는 달러당 64.8마르크로 하락한 뒤 1922년엔 달러당 191.8마르크로 추락했다. 1923년에는 ‘천문학’에서 쓰일 법한 단위들이 동원된다. 1923년 1월 7260마르크에서 4월 2만 마르
1920년대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대중 잡지인 ‘별건곤’은 1929년 1월호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했다.“경성우편국을 끼고 돌아서면 요지경 같은 진고개다. 하라다 상점에 들어서니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그래도 놀라지 말라. 반수 이상이 조선남녀다. ( … ) 미스코시에 들어가니 아래층은 음식과 과자를 팔고, 이 층으로 가니 거기는 일본 옷감뿐이더라. 삼 층에 가니까 장난감, 학용품, 아동복, 치마감이 있다. 길거리에 나서니 진고개 2정목, 3정목 입을 벌리고 정신 다 빠져서 헤엄치듯 걸어나는 조선 부인들….”1920~1930년대 당시 경성의 번화가인 혼마치(서울 명동 근처)에선 거리를 구경 다니는 혼부라(혼마치와 어슬렁거리다의 합성어)가 득시글거렸다. 백화점 구경을 즐기는 주 고객인 여성과 학생에 대한 당대 언론인들의 시각은 그리 따뜻하지 않았다.‘별건곤’은 “조지야 하라다 상점 같은 큰 상점에는 언제나 조선 여학생, 신식 부인들로 꼭꼭 차서 불경기의 바람이 어디서 부느냐 하는 듯한 성황”이라며 “그곳들이 특별히 값이 싸서 그런 게 아니라면 무엇에 끌려서 그러는지 알 수 없다”고 한탄했다. “미스코시, 오복점(기모노점)이 또 낙성되었으니 제일 기뻐할 이는 조선 여학생일 것 같다”며 “어쨌든지 훌륭한 상점에서 물건을 사야만 자기 코가 높아지는 듯한 선입견을 가진 것이 신식 여자인가보다”라는 비꼼과 함께.당시 ‘모던 걸’(물론 ‘모던 보이’도)은 사회에서 매우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1920년대 이후 조선인들이 혼마치 상가의 구매자로 등장하면서 이들에 대한 당대인의 묘사와 평가도 늘어난다.이들
‘××시 1가(街) 23번지’나 ‘××로(路) 456’과 같은 숫자를 반영한 주소 체계(house numbering)는 유럽 절대왕정 시대에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거주민의 편의를 위한 것도, 여행자를 배려한 조치도 아니었다. ‘감나무집’으로 불러서는 세금을 걷고, 병역 자원을 징집하는 데 한계가 분명했기에 시행된 것이었다. 1737년 프로이센 정부가 병역 자원을 손쉽게 충원하기 위해 조그만 마을의 민가에까지 숫자를 부여한 이후 유럽 전역으로 이 같은 풍조가 확산했다.기계 같은 행정의 '그늘' 가옥에 번지를 매기는 것과 함께 깊이 뿌리내린 것은 관료제였다. 국민은 그저 효율적으로 관리할 대상일 뿐이었다. “모든 시민은 국가라는 기계의 부품이고 톱니바퀴”라는 당대의 풍조를 두고 ‘기계로서 국가(Der Staat als Maschine)’라는 비유까지 나왔다.‘기계’는 효율적이지만 부작용도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어떤 정책이 왜 나왔고, 왜 시행돼야 하는지 ‘목적’을 살피는 게 불가능했다. 정책의 대상이 정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개별 사정에도 눈을 감았다.그저 주어진 명령을 효율적으로 집행하는 데 매몰됐다. ‘관료주의 행정’ 그 자체가 지향점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얼마 전 KAIST 등 4대 과학기술원을 교육부 산하로 옮기려던 기획재정부의 시도가 해프닝으로 마무리됐다. 이 역시 ‘주객이 전도된’ 관료주의의 문제점이 드러난 사례라고 생각한다.기재부는 40년간 유지된 제도와 관행, 관련법을 무시하고 당사자인 4대 과기원과 주무 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건너뛰면서까지 2~3주 안
1920년대 미국 경제는 장밋빛이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시체제로 운영되던 경제가 정상화되면서 내수 소비가 급증했다. 1920년대 미국 공업생산은 약 90% 증가했다. 소비자의 구매력이 커지면서 자동차와 가전제품 같은 내구 소비재 소비가 늘었다. 인구는 꾸준히 늘어난 반면 물가는 안정됐다.1920년대에 사치품이었던 자동차는 범용제품이 됐다. 1914년 자동차 생산은 126만 대 수준이었지만 1929년이 되자 미국 자동차 업체들은 560만 대를 생산해냈다. 1927년 포드자동차의 히트 모델 ‘모델T’는 1500만 대나 판매된 뒤 단종됐다. 1918년 30만 대의 자동차가 등록됐던 캐나다에선 1929년까지 190만 대의 자동차가 보급됐다. 자동차산업은 철강, 고속도로, 모텔, 중고차 시장 등 다양한 2차시장을 창출했다. 정유, 유리, 철강, 고무산업은 덩달아 발전했다. 1925~1929년 미국의 제조업체 수는 18만3877개에서 20만6663개로 늘었다. 이들 업체의 생산액은 약 600억 달러에서 700억 달러로 커졌다.이 시기 라디오도 보급됐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라디오를 가진 가정은 흔치 않았지만 1929년에는 미국 내에서 1000만 가구 이상이 라디오를 보유했다. 유성영화는 무성영화를 대체했다. 화학산업도 정점을 이뤘다. 대형 백화점들은 지점을 계속 늘렸고, 통신판매 같은 새로운 유통 방법이 개발됐다. 개인 소득 증가에 따라 당시 하이테크 전자산업이던 냉장고와 세탁기 등 전자제품 소비도 급증했다. 백화점의 고가품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월가는 1923년 발생한 순간적인 조정기를 빼곤 1922~1929년까지 초호황을 누렸다. 1차 세계대전 기간 전비 마련을 위해 공모한 ‘자유채권’에 참여해 짭짤한 재미를 봤던 투자
‘한민족은 역사 이래 흰옷을 즐겨 입었다’는 백의민족 신화는 어느 정도 진실일까. 오늘날 많은 한국인은 한민족이 흰옷을 숭상하고, 즐겨 입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정말로 흰옷을 좋아하고 흰옷만 고집했는지를 냉정히 따져본 적은 거의 없다.최공호 박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백의민족에 대한 관념은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을 포함한 일제 강점기의 여러 학자에 의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백의민족’ 개념이 부각된 것은 당시 야나기 무네요시가 한국 미술에 대해 ‘색채 결핍론’과 ‘비애미’를 들고나온 데 대한 반론의 성격도 적지 않았다.하지만 정말로 흰옷 착용이 한민족을 다른 민족과 구별하는 특질이었을까.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한국인이 흰옷을 즐겨 입었다”는 기록은 삼국시대 이후 빈번하게 발견된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부여’에 “부여인은 흰색 옷을 숭상해 흰옷에 소매가 넓은 포와 바지를 입는다”는 기록이 있다. <수서(隋書)>에는 “신라의 복색은 흰색”이라는 묘사가 나온다. 이후 1487년 조선에 명나라 사신으로 온 동월의 저술인 조선부에 이르기까지 흰옷은 외국인의 시선에 한민족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포착됐다.이 같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이 백색 패션을 선호해서 의도적으로 추구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우선 고구려 고분벽화 등 현재까지 전하는 전근대 시기 시각자료에선 흰옷에 대한 숭상을 확인하기 어렵다.더 주목할 만한 것은 조선시대의 적지 않은 문헌에서 “한민족이 흰옷을 피하려고 했다”는 기록을 전하는 점이다. 19세기 충청 지방의
19세기 말 영국에선 원정 출산이 성행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영국이었지만 각 식민지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부모의 출신 성분에 상관없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식민지에서 관료로 봉직한 ‘있는 집’ 부인들은 애를 낳기 위해 오랜 뱃길과 불편한 철로를 마다하지 않고 애를 낳으러 아시아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영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특히 영국의 대표 식민지인 인도에 파견 근무하는 고위공직자들의 부인은 지체가 높을수록 아기 출산 시기에 맞춰 본국인 영국으로 돌아가 가까운 친척이나 자신의 성 혹은 영지에서 출산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는 장차 태어날 아기의 출생지가 인도가 아니라 영국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모두 자식을 ‘2등 국민’으로 만들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유대인의 경우 더 심각해서 당시 영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유대인은 부모가 영국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더라도 외국인으로 간주돼 땅을 구입할 수도 없었고 식민지 교역에서 배제됐다. 뿐만 아니라 영국 상인에 비해 두 배의 세금을 내야 했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의 유대 상인들은 임신한 부인을 영국으로 원정 출산 보내 영국 시민권을 얻도록 했다고도 전해진다.하지만 모든 식민지 거주 영국인이 본국으로 원정 출산을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때론 식민지 출생이란 차별을 떨치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본국의 제국주의, 식민주의 정책을 찬양하고 이를 전파하기 위해 매진하는 인물도 등장했다.대표적 인물이 19세기 말 20세기 초 영국의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이다. 1907년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했던 키플링은 우리에겐 <정글북>
철도 발달에 따른 수혜에서 보헤미아 지역은 빠지지 않는다. 페트르 초르네예와 지르지 포코르니 등 체코 학자들에 따르면 19세기 중엽 이미 보헤미아 지역은 중부 유럽에서 가장 발전된 산업지대가 됐다. 국내외 철도 네트워크를 통한 경제 통합의 효과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비트코비체 철강사나 필젠에 있던 스코다작업소, 브라우하우스 같은 기업들은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다. 프라하뿐만 아니라 오스트라바, 클라드노(휘텐베르크와 콜베르크바우사의 거점)를 비롯해 기계공업의 중심지였던 브륀, 유리공업에서 강점을 보였던 북부 보헤미아, 직물산업의 중심지였던 동북부 보헤미아 지역 등 보헤미아 전 지역이 비교적 골고루 산업화의 수혜를 입었다.그 결과 합스부르크제국 내 체코인들의 영역은 전체 토지의 26.4%에 불과했지만 제국 전체 인구의 35%를 체코인이 차지할 정도로 보헤미아 지역의 경제 발전 수준도 나쁘지 않았다. 보헤미아의 인구 밀도 역시 1854년 ㎢당 84명에서 1880년에는 104명으로 늘었다. 1910년에는 ㎢당 128명 수준으로 증가했다. 이는 1910년 현재 오스트리아 지역 인구밀도인 ㎢당 95명을 뛰어넘을 정도로, 도시화가 진행된 징표로 해석됐다. 체코지역에서 인구 1만 명 이상 도시는 1880년 38개에서 1910년 77개로 늘었다. 같은 기간 체코 도시인 숫자는 80만 명에서 190만 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19세기 후반 지역 간 통합이 강화되면서 상품 가격이 지역별로 큰 차이가 없어졌고, 이자율과 임금 수준도 평준화돼갔다. 당시 인도 곡물가의 지역별 편차가 오스트리아-헝가리보다 컸고, 국가 내 이자율 격차는 미국이나 일본이 오스트리아-헝가리보다 심했다는 국제비교도 곁들여졌다.앨
합스부르크 가문은 19세기까지 유럽 최대 지배가문이었다. 1848년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재위했을 때 그는 오스트리아 영지(저지와 상부 오스트리아 공작령과 스티리아 공작령, 카르니오라와 카린티아, 티롤 백작령, 포랄베르크, 고리치아, 그라디스카, 이스트리아 변경백령과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시)와 헝가리 국왕령(헝가리 왕국, 트란실바니아 대공국,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헝가리 군사 접경구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보헤미아 왕령(보헤미아 왕국, 모라비아 변경백령, 상부 및 저지 실레지아 공작령)과 갈리시아 왕국, 크라쿠프 대공령, 부코비나 공작령, 달마티아 왕령, 잘츠부르크 공작령도 그의 땅이었다. 여기에 비록 종이 위의 명목상 영지이긴 하지만 상부 및 저지 루사티아와 로렌, 키부르크도 법적으로는 합스부르크의 영지였다. 1291년 이후 실재하지 않았던 예루살렘 왕국도 이론적으로는 그의 지배지에 포함됐다.과거 스페인 펠리페 2세 시대에 비해 제국의 규모가 줄어든 19세기에도 합스부르크가(家)의 위세는 대단했다. 가문은 3750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25만7478㎢의 영지를 보유하면서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넓은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합스부르크제국 내 인종도 550만 명의 독일인과 500만 명의 마자르족, 400만 명의 이탈리아인, 300만 명의 체코인, 250만 명의 루데네인, 200만 명의 루마니아인, 200만 명에 가까운 폴란드인으로 구성됐다. 150만 명 규모의 슬로바키아인과 비슷한 규모의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100만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의 슬로베니아인과 75만 명의 유대인, 50만여 명의 집시와 기타 아르메니아인, 불가리아인, 그리스인도 제국의 신민이었다.하지만 제1
독일의 약진 원인으론 여러 가지가 꼽힌다. 첫 번째가 ‘후발자의 이점’이다. 일찍이 알렉산더 거셴크론이 독일과 러시아의 산업화 사례를 관찰한 뒤 설파한 것이 ‘후진성 가설’이다. 후진 사회들은 역설적으로 ‘대도약’이 가능했다는 것인데, 앞선 사회의 경험에서 배우거나 선발 사회가 개척한 기술과 지식을 공짜로 또는 값싸게 획득할 수 있어 빠르고 효율적인 산업화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논리다. 독일은 영국 공장을 모방해 자본과 노력, 시간을 줄일 수 있었던 데다 신기술도 자유롭게 적용했다.독일 은행들이 기업에 대한 금융지원뿐 아니라 기업 설립과 운영, 감독, 혁신의 촉진에까지 밀접하게 관여한 것도 특징이다. 소위 ‘D-은행들’로 불린 다름슈타트방크, 디스콘토게젤샤프트, 도이체방크, 드레스트너방크가 1870~1913년 보유한 자산의 가격은 6억마르크에서 175억마르크로 급증했다. 이는 독일 은행들이 보유한 산업자본 주식이 크게 늘어난 영향이다.보불 전쟁 후 독일에 유입된 막대한 전쟁보상금 덕에 창업과 투기 열풍이 분 것도 한몫했다. 배상금으로 철도 같은 기반시설 투자가 늘었고, 새로운 제철기술을 활용한 철도를 이용해 시장에 제품을 대량으로 공급하는 게 가능해졌다. 실제 당대인들은 이때를 ‘창업시대’로 부르기도 했다. 여기에 독일 특유의 카르텔(기업 연합) 구조가 효율적으로 작동한 측면도 있다.2차 산업혁명 시기 독일을 대표하는 기업가들의 사례도 이 같은 독일적 발전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소위 ‘대포왕’이라고 불린 알프레드 크루프가 대표적인 경우다.크루프 가문은 16세기부터 에센지역의 유력 가문으로 그의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시작됐지만 철강·전기·화학 기술의 비약적 발전이 이뤄진 ‘2차 산업혁명’은 독일이 주도했다. 19세기 후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독일 산업의 발전상은 놀라웠다.프로이센이 유럽의 주요 경쟁국들보다 빠르게 성장하게 된 것은 1850~1860년대 이후의 일이다. 1830년대만 해도 프랑스의 국민총생산(GNP)은 1960년 미국 달러로 환산할 때 86억달러로 프로이센(72억달러)을 앞섰지만, 1880년이 되면 프랑스 174억달러, 프로이센 200억달러로 역전된다. 1913년이 되면 프로이센의 GNP는 498억달러로 프랑스(274억달러)의 두 배 규모가 된다. 유럽 전체 부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830년에는 프랑스가 21%로 프로이센(5%)의 네 배를 넘었지만 1880년이 되면 프로이센은 20%로 프랑스(13%)를 크게 앞선다. 1913년엔 프로이센이 40%로 프랑스(12%)의 네 배 수준이 돼 처지가 180도 바뀐다. 1860년 비등했던 에너지 소비량도 1913년이 되면 프로이센이 프랑스의 세 배에 달한다.산업별로 살펴봐도 독일의 성장은 가파르다. 19세기 초 프로이센의 연간 철강 생산량은 5만t으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뿐 아니라 합스부르크제국에도 못 미쳤다. 하지만 ‘2차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산업지형도는 급격히 변화한다.1871년 프로이센 주도로 독일이 통일된 이후 독일의 철강 생산량은 1890년대만 해도 연간 410만t으로 영국(800만t)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1900년이 되면 630만t으로 영국(500만t)을 추월하게 된다. 1910년대가 되면 독일(1360만t)이 오히려 영국(650만t)의 두 배를 넘는 철을 생산하게 된다.전기, 광학, 화학 같은 20세기적 산업 분야를 개척한 것도 독일이었다. 대표적 전기 관련 기업인 지멘스와 AEG는 19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여러 면에서 차이가 크다. 흔히 연봉과 인지도 격차, 첨단업종 여부를 떠올리기 쉽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가장 두드러지는 격차는 시스템 유무(有無)가 아닐까 싶다.개개인의 면면만 봐서는 대기업 종사자 못지않은 중소기업 직원이 적지 않다. 다양한 분야의 실무를 익힌 중소기업 출신이 대기업에 가서 능력을 인정받는 사례도 수두룩하다. 반면 유명 대기업의 ‘간판’만 보고 중소기업으로 모셔 온 인사가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핀잔이나 듣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하지만 개인 차원에선 크게 드러나지 않는 차이를 조직 레벨로 확대하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간극이 민망할 정도로 벌어진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조직의 목표와 해야 할 임무, 예상되는 위험 요소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대기업을 직원의 ‘개인기’에 의존하는 중소기업은 절대로 넘어설 수 없기에 빚어진 결과일 것이다. '뛰는 개인' 위에 '나는 조직'중소기업 전문가들이 “중소기업의 생산성을 대기업 수준으로 높이려면 성과 보상 체계를 개선하고, 교육 훈련을 강화해야 하며, 조직적으로 신시장을 개척하는 등 경영 전반을 시스템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강조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중소기업과 대기업을 가르는 시스템의 차이를 장황하게 언급한 것은 최근 국정 전반에서 ‘시스템 부재(不在)’라고 느껴지는 일을 접하는 경우가 잦아졌기 때문이다. 큰 조직에는 큰 조직의 논리가 있고, 일정 수준 이상으로 도약하려면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필수적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최근의 국정 시스템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노동운동이 초기부터 정당 설립 형태로 진화한 나라다. 독일에서 노동운동이 정치운동으로 손쉽게 바뀔 수 있었던 이유로는 독일이 중상주의와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요약되는 계몽주의적 절대주의 전통이 강했던 점이 꼽힌다. ‘국가가 각종 사회문제를 해결해줘야 한다’는 국가 중심적 문화가 강했다는 설명이다. 영국이 나폴레옹의 경멸적 표현처럼 ‘소매상인들의 국가’였던 반면, 독일의 부르주아지는 정부의 보조와 규제, 관세 조치로 보호받으며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독일 부르주아는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보다 국가를 지배하는 봉건 엘리트에 종속됐다. 마르크스는 이를 두고 “독일의 사업가 계급은 역사적 사명이 없는 부르주아지”라고 비꼬기도 했다.여기에 노동자 계급이 정치적 목소리를 높이는 데 대해 독일 부르주아지들이 매우 소극적이고 모호한 태도를 보인 점도 노동정당의 출현을 방조했다. 당시 독일 부르주아들은 노동자 계급이 급속하게 팽창해 정치적 해방을 맞이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프로이센 특유의 납세액에 따른 차등선거제도인 ‘3계급 선거권’을 폐지하고자 했다. 즉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닌’ 모호한 양면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여기에 부르주아 명사들의 지도하에 노동자들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어설픈 낙관론도 퍼져 있었다.독일 통일 과정에서 불거졌던 대독일주의와 소독일주의의 대립, 민족주의의 부상도 노동자의 정치적 등장을 촉진시켰다. 1858년 새로운 황태자가 프로이센 황제로 즉위하면서 2~3년간 비교적 자유주의적 정책으로 전환됐던 ‘신시대’라
‘아편(opium)’은 메소포타미아가 원산지로, 중국에선 아랍어 ‘아프염(af-yum)’이나 ‘아푸용(a-fu-yong)’을 음역해 ‘아편’ 또는 ‘아부용’이라고 표기했다.아편은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삼은 뒤 동인도회사를 매개로 주요 교역 품목이 됐다. 애초에 포르투갈인들이 인도 중부에서 생산되던 아편을 인도 고아를 통해 마카오로 운반해 팔았다. 영국은 이 같은 아편의 생산과 수출 시스템을 체계화하고 확대했다. 중국의 차와 비단, 도자기를 원했지만 중국 시장을 뚫을 힘이 없었던 영국 상인들은 아편을 무기로 중국 시장의 관문을 강제로 열었다.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판 방식은 노골적이면서도 교묘했다. 인도를 식민 지배하던 영국은 인도에서 대량으로 아편을 재배한 뒤 검은색 축구공만 한 크기로 만들어 ‘약’이라고 쓰인 나무 상자에 넣어 중국으로 밀수했다. 동인도회사가 아편을 볼링공 모양으로 만들어서 대량으로 공급한 것이다. 중국에서 아편은 약품으로만 유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중국의 아편 수입량을 보면 1770년대 연평균 200상자였던 것이 1780년대엔 연평균 1000상자로 증가했다. 1800~1809년 3871상자이던 아편 거래가 1811년에는 5000상자를 넘었다. 이는 또다시 1820~1829년에 1만311상자로 늘었고, 1830~1839년에는 2만2941상자로 급증했다. 1838년 한 해에만 4만 상자 이상이 쏟아져 들어왔다.19세기 첫 30년 만에 거래량이 여덟 배 늘어난 아편은 당시 세계에서 단일 상품으로는 최고의 교역 물품이었고, 영국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던 은을 회수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중국의 은 보유액은 1793년 7000만 냥에서 1820년 1000만 냥으로 급감했다. 1814~1850년 사이에 청나
19세기 중반만 해도 아프리카 내륙은 ‘미지의 세계’였지만 1880년대부터 1900년 사이 수천 개의 아프리카 내륙 왕국은 40개의 국가로 재편됐고, 그중 36개는 유럽 국가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된다. 아프리카는 영국에 정치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지역이라기보다 알짜배기 최대 식민지인 인도로 가는 길목 내지 인도를 보호하기 위한 완충장치 역할을 했다. 인도로 가는 배들이 연료로 사용할 석탄을 보관하는 장소의 의미로도 개척됐다.이 같은 유럽의 확장 배경에는 금융과 무력의 결합이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맥심 기관총으로 상징되는 기술 우위가 핵심적 역할을 했다. 맥심 기관총은 원래 미국에서 개발됐지만 개발자 하이람 맥심은 언제나 영국 시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런던의 허튼가든에 있는 지하 작업장에서 맥심 기관총 프로토타입이 작동할 수 있게 되자 총을 시험해볼 수 있도록 저명 인사들을 초청했다. 1884년 영국에서 맥심건컴퍼니가 설립됐을 때 영국의 금융 재벌 로스차일드경이 이사로 참여했고 로스차일드의 은행에선 1900만 파운드의 자금을 제공, 맥심컴퍼니와 노르덴펠트총기사의 합병을 지원했다. 이어 로스차일드가는 “백인은 지구상의 더 많은 곳에 거주할수록 인류 복지에 더 이바지한다”는 신념을 지닌 세실 로즈와 합심해 아프리카 진출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맥심 기관총의 능력이 여실히 드러난 것은 1898년 9월 수단에서 발생한 옴두르만 전투에서였다. 사막 부족 연합군이 역사상 최강 제국의 정규군에 정면으로 도전한 이 전투는 잔혹한 학살극으로 마무리됐다. 사막 부족군이 영국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지만 영국의 맥심 기관총 앞에 말 그
네덜란드어로 농부를 뜻하는 ‘부어(boer)’(독일어로 농부를 가리키는 ‘바우어(bauer)’를 연상하면 이해가 쉽다)에서 나온 보어(boer)인은 남아프리카 지역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이다.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계 사람들은 1650년대 동인도회사 소속 식민지 주민으로 시작했다. 한때 케이프타운은 세인트헬레나에서 봄베이, 벵갈 지역까지 영향을 미치는 동인도회사의 영화를 상징하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지역 네덜란드인들은 1795년 독립을 선언했지만 몇 년 만에 영국에 점령당한 뒤 영국의 신민으로 살아갔다. 이후 영국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일부 네덜란드계 주민은 영국과의 마찰을 피해 남아프리카 내륙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트란스발 지역에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오렌지자유국이라는 네덜란드계 국가를 건설했다.조용한 ‘농업 독립국’으로 남을 법했던 이들 지역의 운명을 바꾼 것은 다이아몬드였다. 1866년 오렌지강 연안에서 21캐럿짜리 초대형 다이아몬드 원석이 발견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농사짓고 있는 발밑에 초대형 다이아몬드 광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또 프리토리아 지역에선 무려 ‘3025캐럿’이라는 역사상 최대 크기의 다이아몬드가 발견됐다. 185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에 이어 남아공에도 거대한 금광맥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남아공 지역은 맹목적인 충동과 탐욕이 집결하는 땅이 됐다.이 같은 ‘노다지 판’을 영국이 가만 놔둘 턱이 없었다. 수에즈 운하 개통 이후에도 세계 식민지를 오가는 교통의 요지로서 남아프리카의 위상이 높았던 데다 당장 얻을 ‘돈’도 적지 않았기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등 소위 프랑권 국가들이 1870년대 금본위제로 이행했고 미국도 1900년 금본위제를 채택했다. 1900년이 되면서 유럽과 북미, 일본, 아르헨티나까지 금에 기반을 둔 화폐체제를 구축했다. 고전적 금본위제가 자리잡은 것이다. 이때에는 지폐를 통화당국에 들고 가면 언제라도 법이 정한 무게의 순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1914년 이전 영국에선 파운드당 순금 113.0016그레인으로 교환됐고, 미국에선 달러당 순금 23.22그레인의 비율로 태환됐다. 금태환성을 보장하기 위해 영국은 1844년 ‘은행허가법’에서 영국중앙은행의 은행권 발행액이 금 보유액에 1400만 파운드를 더한 금액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했다. 독일도 1876년 관련법을 통해 독일제국은행이 발행하는 지폐량은 제국은행 금 보유액 및 재무성 증권 보유액의 세 배를 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금에 기반을 둔 안정된 통화체제가 갖춰지면서 세계화가 빠르게 진전되고, 인플레이션 위협이 약해졌다. 금본위제 아래 통화정책은 금의 화폐가치를 유지한다는 준칙에 따라 이뤄졌고, 이 준칙이 잘 지켜지면서 인플레이션 문제가 이후에 비해 훨씬 적었던 것이다. 덴마크의 경제학자 윌리엄 샤를링의 분석에 따르면 1873~1886년 사이 유럽 주요 은행의 귀금속 보유량이 33억2900만 라이히스마르크에서 60억4400만 라이히스마르크로 증가하는 동안 이 귀금속을 본위로 발행된 지폐 액수는 113억3280만 라이히스마르크에서 103억8900만 라이히스마르크로 오히려 감소했다.이처럼 19세기 후반 금과 은 모두 생산이 늘었지만 두 금속의 위상이 극과 극으로 달라진 금본위제로의 이행 배경에는 영국의 힘이 있었다. 바로 금의 가치가 지고지
드라크마. 유로화의 등장으로 사라질 때까지 수천 년간 통용된 그리스의 화폐 단위 ‘드라크마’는 원래 ‘한 손 가득히’란 뜻으로 쇠꼬챙이 여섯 가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고대 오리엔트 세계에선 오랫동안 은이 주요 가치 척도 및 교환 수단으로 기능했다. 아나톨리아 고원 주요 광산에서 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양의 은이 산출됐고, 국제 교역에서도 활발하게 사용됐다. 하지만 은은 주조된 단위에 따라 계산된 게 아니라 그때그때 중량을 달아 계산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등에선 주화가 아닌 은괴의 무게를 달아 사용했고, 상황마다 금속의 가치는 천칭에 달아 결정했다.이에 따라 정의를 집행하는 법규에도 은의 무게를 통한 지불 방식이 명문화됐다. 기원전 2세기 메소포타미아 에슈눈나 법전에 “다른 사람의 코를 물었을 때 은 1미나(고대 그리스 무게 단위, 약 500그램)의 벌금이, 뺨을 때렸을 때는 10세켈(유대 무게 단위, 약 5온스)의 벌금이 부과됐다”는 식이다.반면 앤서니 앤드루스 옥스퍼드대 교수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7세기경 표준화된 철물을 교환 목적으로 사용했고, 철물의 대표주자는 바로 쇠꼬챙이였다. 이 같은 철물을 사용한 명칭은 화폐 명칭으로 이어졌다. ‘오볼로스’라는 작은 은화를 가리키는 단위는 한 가닥의 쇠꼬챙이에서 유래했고 ‘드라크마’는 여섯 가닥의 쇠꼬챙이에서 나왔다.이후 등장한 주요 화폐 단위도 대부분 귀금속의 무게를 재는 단위에서 유래한 것이 많다. 영국의 ‘파운드’와 발음과 철자가 똑같은 무게 단위 ‘파운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파운드는 원래 은 1파운
‘공정’에 민감한 것은 MZ세대(밀레니얼+Z세대)만이 아니다. 희끗희끗한 머리, 거친 손과 깊게 팬 주름에서 그간 겪었을 갖은 풍파와 노고를 짐작할 수 있는 중소기업인들도 공정을 중히 여긴다. 그들의 목소리는 요란하진 않지만 분명하다.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은 “혁신의 가치가 부동산의 가치보다는 크게 대접받아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입에 달고 있다. 강승구 케이원전자 대표는 “기업 하는 사람들이 남다른 대접을 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세금을 내는 만큼만 사회가 대우해줬으면 할 뿐”이라고 강조한다.모두 중소기업이 합당한 사회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처럼 중기인들이 비슷한 맥락에서 공정의 가치를 언급하는 데는 그들이 겪은 아픈 경험이 기저에 깔려 있을 것이다. '천형(天刑)' 소리 듣는 중기외형적으로 중소기업은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기반이다. 2020년 말 현재 국내 전체 기업의 99.9%(728만 개)를 차지하고, 전체 기업 종사자(2158만 명)의 81.3%(1754만 명)를 담당할 정도로 중기가 맡은 역할은 절대로 적지 않다.하지만 중기인들이 일상에서 접하는 현실은 합당한 ‘대접’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한국에서 중소기업, 특히 제조업을 영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제품 개발과 생산, 판로개척, 인력확보에서부터 인사관리까지 뭐 하나 순탄한 것이 없다. “꼬박꼬박 월급날이 돌아올 때마다 등에서 진땀이 흐른다”는 중기 사장들의 공통된 고백은 결코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다.납품 대기업부터 각종 인허가와 규제 권한을 앞세우는 관청까지 눈치 볼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다. 기업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상정한 중
전통시대 중국은 관료의 나라였다. 관료에 의한, 관료를 위한 국가가 바로 중국이었다. 존 킹 페어뱅크에 따르면 청나라 말 중국은 관료제의 천국이었고, 에티엔 발라스는 중국을 ‘영원한 관료제 사회’로 묘사했다. 그리고 이 같은 관료제의 최상부에 진입하기 위해 중국의 지식인들은 ‘시험지옥’(미야자키 이치사다)이라 불리는 과거에 통과하기 위해 쓸모없는 ‘시험용’ 팔고문에 몰두했다.반면 거대 인구를 바탕으로 세계 최대 경제력을 유지하던 중국의 상업은 중세 이후 정체에 빠졌다. 청나라 말이 되면 이 같은 현상은 더욱 뚜렷해진다. 그리고 중국 경제의 발목을 잡은 원흉으로 흔히 관료제가 거론된다.청말 상인들의 힘과 능력이 커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관료들의 독단적인 행동에 종속돼 있었다. 관료들은 홍수나 가뭄 같은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상인들에게 헌금을 요구했고, 면허장이나 독점권을 빌미로 부자들에게서 선물받기를 원했다. 상인들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공업 분야보다는 토지나 부동산에 투자해 지주신사층(地主紳士層)에 합류하는 길을 택했다. 관료들마저 관직을 통해 조성한 합법적·비합법적 재산을 토지에 재투자하는 상황에서 힘없는 상인들이 취할 다른 길은 없었다. 중국에서도 도시화가 시작되면서 관리에 대한 상인의 종속은 다소 느슨해졌지만 그들은 결코 관료의 감독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관료들에게 상인은 언제나 개인적 이익 혹은 국가적 이해관계를 위해 이용하거나 쥐어짜야 할 존재에 불과했다. 상업 활동은 언제나 관료의 감독과 징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소금과 철, 차, 비단, 담배, 소금, 성냥 등은 국가가 전매제도로
19세기 중반까지 마을마다 독자적인 시간 개념이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은 별과 태양을 보고 시계를 맞췄다.(매일 같은 시간에 산보를 나섰다는 칸트의 유명한 에피소드도 진위가 좀 의심스럽긴 하다.) 19세기 이전에는 정확한 시간을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었기에 시계에 분침이 없었지만 1880년대에는 사람들이 초 단위까지 정확히 맞출 것을 요구할 정도로 사회가 급변했다. 경영자와 관리인, 노동자는 점점 더 시계와 호각으로 규율되는 노동 일과에 묶여버렸다. 시간 엄수가 장려됐고, 늦으면 벌금이나 해고로 벌을 받아야 했다. 시간은 절약해야 하는 대상이 됐고, ‘시간이 돈’인 세상이 됐다.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 주인공으로, 편집증적으로 시간에 집착하는 인물로 묘사된 포그 씨는 이런 배경 속에서 태어났다. 영국에 철도 생기며 시간망 통일이런 상황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철도의 등장이었다. 1830년 영국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에 최초의 여객철도가 들어섰고, 이후 철도산업은 이윤이 쏠쏠하게 남는 산업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1836~1837년 영국에서만 총 44개 회사가 총연장 2410㎞의 사업을 승인받는 ‘철도 붐’이 일었다. 1845~1847년에는 626개 회사가 승인받은 철도 건설 총연장이 1만5340㎞에 달했다. 일부 시행되지 않은 사업도 있었지만 1852년까지 영국에 건설된 철도의 총연장은 1만2000㎞로 오늘날 영국 철도 총연장의 3분의 1에 해당한다.철도 사업 투자자들은 1990년대 후반의 인터넷처럼 철도를 획기적인 것으로 바라봤고 수익 창출 전망이 무한하다고 해석했다. 다른 철도회사들이 똑같은 목적지에 나란히 철도를 건설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이
시계는 근대의 산물로, 등장 초기엔 대표적인 사치품으로 꼽혔다. 1797년 영국에선 모든 시계에 세금이 부과됐다. 사치품인 시계는 철저히 징세 대상이었다. 당시 영국의 세리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조세 감정인의 신고서는 영국인 사이에 시계가 얼마나 보급돼 있었는지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의 피블스라는 조그만 마을의 조세신고서에는 ‘읍내에는 시계(괘종시계 탁상시계)가 15개, 은제 회중시계가 5개 있으며 금제 회중시계는 없다. 피블스 읍내와 시골, 교구를 통틀어 시계는 105개, 은제 회중시계는 112개, 금제 회중시계는 35개 있다’는 식으로 꼼꼼하게 기록을 남겨두었다. 세금 부과를 위한 것이다. 시청사 시계 건립을 위한 세금 걷기도14~15세기까지만 해도 개인이 시계를 소유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기계식 시계가 매우 비싸 공공 부문에서 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356년 볼로냐의 시청사에 공공시계를 건립하기 위해 20세 이상 모든 시민에게 18페니의 세금이 부과됐다. 1386년 프랑스 국왕은 리옹 시의회가 공공시계 건립을 위해 부담금을 징수하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당시 일부 리옹 시민은 세금 부담 탓에 시계 건립 계획에 격렬히 반대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하지만 시계가 인간의 삶에 본격적으로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것은 19세기다. 그리고 그 본고장은 영국이었다. 19세기 후반 세계 전역을 지배했던 ‘대영제국’은 세계 각지의 영토뿐 아니라 각종 주요 표준까지 지배했다. 이와 함께 자연스럽게 영국이 세계 측량 단위의 기점 역할도 병행했다. 1884년 국제위원회는 런던 근교 그리니치를 지나는 선을 세계 경
18세기 말 직물의 마무리 작업은 고도로 전문화된 공정이었다. 일부 대형 제조업체는 전 공정을 하나의 ‘공장’(오늘날의 공장과 비교하면 매우 소박했다)에서 수행했다. 고트라는 이름의 기업인은 한 지붕 밑에 80명의 전모공을 두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상인은 소규모 직물업자로부터 미완 상태의 옷감을 구입해 작업장으로 보낸 뒤 마무리 작업을 하도록 했다. 리즈의 작업장은 40~50명 또는 60명의 기술자와 수련공을 고용하고 있었다. 웨스트라이딩의 촌락에 있는 더 작은 마무리 작업장에선 겨우 5~6명을 고용했다. 1806년 통계 수치를 보면 웨스트라이딩의 직물 마무리업 마스터는 500명, 전모공은 수련공을 포함해 3000~5000명 수준을 오갔다.이런 전모공들은 마무리 공정을 통제했고, 조직을 갖추고 비숙련공을 배제했다. 그들은 웨스트라이딩 직물노동자 중 귀족층을 이뤘고, 정식으로 고용되기만 하면 19세기 초반 몇 년간은 주당 30실링이라는 고소득도 가능했다. 전모공은 ‘독립적이면서 고분고분하지 않은 태도’에 높은 정치의식으로 유명했다. “맥줏집에서 직조공이나 마무리공, 염색공보다 두세 배의 돈을 썼다”고도 전해진다. 당대 리즈 머큐리지는 “전모공은 엄밀히 말해 피고용인이 아니다”고 평했다.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하룻밤 사이 자신을 노동 엘리트에서 ‘제조업에서 불필요한 신분층’으로 전락시킬 수 있는 기계의 위험성도 잘 알았다. 좌파적 시각에서 보면 자본과 노동 간 경쟁관계 속에서 지속적인 비용 절감 노력은 불가피하고, 그에 따른 노동자의 프롤레타리아화와 이윤율 저하 경향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계화는 이 같은 과정
‘창조적 파괴’는 낯익은 용어다. 하지만 그간 진부한 표현으로 치부됐던 것도 사실이다. 빛바랜 채 경제학 교과서의 구석을 차지하는 허다한 성장이론도 마찬가지 처지다. 현대사회가 어떻게 전대미문의 부를 일굴 수 있었는지, 경제적 도약인 ‘이륙’은 왜 1820년대가 돼서야 이뤄졌는지, 어떤 나라는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어떤 나라는 ‘중진국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는지 궁금한 것투성이다. 그런데도 이를 풀 열쇠가 되는 ‘창조적 파괴’는 80년 전 조지프 슘페터가 선보였을 당시 그대로 화석처럼 떠돌 뿐이었다. 그랬던 낡은 개념에 뜻밖의 새로운 숨결이 불어 넣어졌다.《창조적 파괴의 힘》은 미국 하버드대를 거쳐 콜레주 드 프랑스와 런던정경대, 인시아드 교수를 겸임하고 있는 프랑스 경제학 석학 필리프 아기옹과 일군의 학자가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 개념을 현대적 관점에서 벼리고 재구성한 책이다. 미국과 유럽, 일본, 한국 등을 배경으로 한 공시적·통시적 분석을 통해 익숙한 듯하지만 낯설었던 창조적 파괴의 힘이 역사 발전을 이끌었음을 눈앞에 보이듯 선명하게 그려냈다.창조적 파괴는 ‘경제 성장을 이끄는 동력은 무엇인가’라는 경제학의 오랜 난제를 풀어낼 후보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자본 축적이 늘어나면 생산이 증가한다’는 기존 신고전주의 성장이론으로는 장기적 경제성장을 결정하는 요소를 규명하지 못하고, 성장 추세가 돌변하거나 나라마다 경제성장 속도에서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한계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새로운 혁신이 지속해서 이뤄져 기존 기술을 폐기하고 일자리를 대체
1811년 영국에선 ‘러다이트 운동’이라고 불린 폭력적인 소요가 발생했다. 랭커셔에선 역직기가 파괴됐다. 요크셔에선 전단기가 부서졌다. 미들랜즈에선 편직기가 박살났다.1811~1817년 발생했던 일련의 기계파괴운동은 영국 내 세 지역, 세 가지 직종에 한정된 운동이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1811년 11월 노팅엄셔에서 시작돼 이듬해 요크셔의 웨스트라이딩 지역으로 번졌다. 1813년 3월엔 랭커셔까지 기계파괴운동에 동참했다. 영국 정부는 러다이트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나폴레옹 전쟁 기간 웰링턴 장군이 이베리아반도에 파견했던 것보다 더 많은 1만2000명의 군대 병력을 투입했다. 또 강력한 법적 처벌로 재발의 싹을 잘랐다.1810년대 러다이트 운동 첫 신호탄은 편직기 편물공들이 쐈지만 사실 기계를 때려 부수는 것은 오랜 역사가 있었다. 출처가 명확하진 않지만 ‘러다이트’라는 명칭도 1799년 두 대의 양말 짜는 기계를 부쉈던 네드 러드라는 노동자의 이름을 훗날 전모공들이 차용한 데서 비롯됐다. 그보다 앞선 1785년 에버레트가 영국 최초의 전모기를 만들자 실업자들은 그 기계를 불태웠고, 5만 명의 노동자가 아크라이트의 방적기계 사용을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진정서를 의회에 제출하기도 했다.유럽 대륙에서도 기계파괴운동의 전사라 불릴 만한 일이 적지 않았다. 1630년대 독일 단치히에서는 직물 짜는 기계의 사용을 금지하고 기계 발명가를 몰래 교살하거나 물에 던져 죽여도 시장이 이를 묵인한다는 말이 돌았다. 기계의 발명으로 다수의 노동자가 거지가 될 것을 두려워한 조치였다. 네덜란드 레이덴에서도 레이스 직공들의 폭동으로 시의회가 1629년까지 직물 짜는 기계의
대혁명 직후 프랑스에선 시간과 달력이 확 바뀌었다. 1793년 십진법을 기반으로 제정된 새 달력은 한 달이 30일, 한 주가 10일로 매달이 일수의 차이 없이 ‘평등하게’ 짜였다. 하루는 10시간, 한 시간은 100분, 1분은 100초로 통일됐다. 들쑥날쑥한 ‘자연의 법칙’은 인간이 만든 규격에 욱여넣어졌다. 각 달에는 ‘제르미날(싹이 트는 달)’ ‘방데미에르(포도 수확의 달)’ ‘테르미도르(뜨거운 달)’ 같은 목가적인 이름이 붙었다. 이분법에 발목 잡힌 시장시간도 칼 자르듯 했던 혁명 세력은 사회도 ‘덕(德)의 공화국’과 ‘인민의 적’으로 양분했다. 1794년 방토즈(바람의 달) 8일 강경파 혁명가 생쥐스트는 “조국의 적은 재산을 소유할 수 없고, 애국파의 재산은 신성하다”며 ‘혁명의 적’의 재산을 몰수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부자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애국자’에게 분배한다는 소위 ‘풍월(風月)의 법’이 발동된 것이다.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하나의 토지, 하나의 작은 작업장, 하나의 상점을 소유하는’ 소생산자의 사회를 꿈꿨던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같은 해 프레리알(목초지의 풀이 자라는 달) 22일 ‘대공포 정치법’을 동원했다.반대파를 비도덕적 적폐로 몰아 변호권을 완전 박탈하고, 재판소엔 석방과 사형 중 양자택일을 강요한 ‘공포정치’가 시작되면서 법 제정 45일 만에 1286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진보’를 표방하는 이들이 이끌었던 프랑스 혁명의 실상은 ‘중세 이단 재판’과 다를 게 없었다.낡은 역사 속 한 장면을 굳이 들춰낸 것은 지난 21일 윤
청나라 역대 황제들은 국어(만주어)와 기사(말타면서 활쏘기) 그리고 조상들의 소박한 생활양식을 지키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만주족이 고유의 전통을 잃지 않도록 하는 데 많은 신경을 쓴 것이다. 이는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되면서 중국 지배의 근간인 전쟁 수행능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우려한 것이었다. 특히 중국 대륙에서 만주족의 지배 체제가 확고해진 건륭제 시대가 되면 만주족 기인들에게 자존심을 지키고 만주족 고유의 방식을 유지할 것을 촉구하는 칙령이 계속해서 반포됐다. 중국 대륙 정복의 근간이고, 청나라 성공의 DNA였던 군사력의 골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건륭제(사진)는 특히 기마술과 궁술을 중시했다. 말을 탄 상태에서 활 쏘는 기술을 만주족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기본 덕목으로 여겼다. 이 같은 기술이 쇠락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 조상의 신뢰를 배신하는 행위였다. 건륭제는 “건국 시대부터 우리나라는 기마 상태에서 활을 쏘는 궁술을 매우 중시했다”며 “오래된 관습과 제도는 엄격한 노력을 통한 연습과 체득을 통해 공손하게 수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런 강조에도 만주족의 실상은 그의 의도와 계속해서 멀어져갔다. 당장 주변 인사들부터 필수 코스를 제대로 습득하지 못했다. 건륭제, 기마술·궁술 기본덕목으로 여겨건륭 연간 초기의 저명한 귀족이자 군사지도자로 활동했던 눌친은 티베트 원정에 나섰다가 그만 용렬한 모습만 드러냈다. 그 사실은 건륭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결국 눌친을 북경으로 소환한 건륭제는 중과실과 직무유기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눌친은 1749년 1월 연병장으로 끌려나와 군대 앞에서
일찍이 게르만족은 무기 제작과 관련이 깊은 대장간 일처럼 특수한 기예를 갈고닦을 필요가 있는 수공업을 존중했다.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금속을 다루는 일 외에도 제빵, 정육업, 목수 등이 별도의 수공업 분야로 등장했고,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이 동업조합(길드·Zunft) 체제로 발전해나갔다. 문헌에 등장하는 동업조합 중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1106년 결성된 보름스 어류상인 단체를 꼽을 수 있다. 전설상으로는 마인츠 방직업자 단체가 1099년 결성됐다고 하지만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다. 이어 1128년 결성된 뷔르츠부르크 제화업 단체 등 다양한 단체가 등장한다.초창기 이들 단체는 라틴어로 ‘fraternitas’ ‘consortium’ ‘societas’ ‘unio’ 같은 단어로 불렸고, 훗날 독일어로 된 사료에 따르면 북부독일에선 ‘Gilde’ ‘Amt’ 등이 주로 쓰였다고 한다. 동부독일에선 ‘Zeche’ ‘Einung’ ‘Innung’ 같은 용어로 불렸고, 16세기 이후엔 독일어권 지역에서 ‘Zunft’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됐다. 12세기 동업자 단체 길드 등장길드가 도시국가의 정치 영역에까지 큰 역할을 했던 이탈리아에선 13세기 초까지 대부분 도시에서 30~40개 길드가 활동했다. 베네치아에는 142개 길드가 있었다. 1380년대 크레모나에는 8000명의 길드 조합원이, 볼로냐에는 9000명의 길드 조합원이 활동한 것으로 전해질 정도다.이들은 도시를 장악한 귀족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 힘을 합쳐 무장하기도 했다. 귀족들의 면세특권을 철폐하고자 조직적 활동도 했다. 무장 조합들은 성인 또는 구역의 이름을 따거나 별, 선원, 말, 사자, 용 등의 문양을 내세웠다. 피렌체에서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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